장사하시는 부모님을 둔, 동대문에서 나고 자란 친구가 한 말이다. 한때 '인간시장'이라는 '악명'을 가졌던 평화시장. 많은 것이 변한 현재에도 '평화시장' 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부피감을 가지고 존재하는 동상이든, 슬픈 역사이든, 전태일을 떠올린다.
오전 9시, 살갗에 닿는 공기는 아플 정도로 차갑다. 어제 내린 눈이 단단하게 굳어 있는 빙판길 위,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뎌 미끄러진다. 그렇게 조마조마한 겨울 길 위로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멀리 건물 하나가 보인다. 도시의 다른 건물들과 비교해 높지는 않지만, 육식동물처럼 커다란 몸집의 건물이다.
'서울 동부지역 청계천6가에서 동대문운동장 쪽으로 약 600m가량 뻗어 있는 3층 건물', 바로 평화시장이다. 평화시장 건물이 들어서기 전, 이곳은 어설픈 판잣집이 다닥다닥 들어선 무허가 판자촌이었다고 한다. 이 판자촌에는 소규모 피복 공장들이 있었고 이 공장들은 철거되었다가 평화시장 건물이 생긴 이후 다시 들어섰다. 건물은 수백 개의 작업장과 개인 점포로 나뉘어 분할등가 되었다. 이것이 평화시장의 과거, '슬픈' 전성기의 상황이다.
"근데 거기 옛날에나 대단했지 지금이야 별거 없잖아." 친구가 이렇게 덧붙였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가장 가까운 출입구로 재빨리 들어간다. 계단은 좁고 분주하다.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과 계속 눈을 마주친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들의 눈빛에 약간의 호기심이 어리지만, 그것은 곧 그들이 향해 갈 목적지를 향해 사라져버린다. 그들을 관찰하다 보니 카페인이라도 섭취한 양 가슴이 두근거린다. 시장 사람들의 노동은 특유의 활력을 지니고 있다. 인스턴트커피의 카페인이 주는 활력보다 훨씬 힘이 넘치며, 조금은 잔인한 구석도 있는 활력이다.
3층, 구석에 위치했지만 모녀식당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입구의 투박한 간판부터 세월의 체취가 느껴진다. 40년 동안 이곳은 그대로다. 모녀식당은 똑같은 간판, 똑같은 인테리어, 똑같은 메뉴로 40년 전에도 장사를 했다. 입구에서 잠시 멈춰 선다. 방송 프로그램을 캡처한 사진이 액자에 고이 담겨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지금이야 이 식당의 음식이 TV에도 소개된 명물이자 관광객들의 특식일지 몰라도 과거에는 완전히 달랐다. 평화시장, 이곳에는 굶주림의 기억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전태일이 버스비로 굶주림에 지친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 먹이고는 자신은 한 시간 길을 걸어 집에 왔다는 일화만 봐도 그렇다. 과거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은 한 끼 밥을 위해 인간 이하의 조건에서 일했다. '밑지는 인생', 전태일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그렇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하루 세 끼 밥 먹는 것조차 힘들고, 남에게 밑지게 되는 인생이라는 말이다. 이곳의 감자탕 역시 그들의 흘러간 기억 속, 서럽고 필사적인 '한 끼 밥'이었겠지. 방송을 캡처한 사진 속, 근사하게 찍힌 감자탕 사진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들어선 순간, 좁아도 너무 좁은 내부를 보고 당황한다. 서너 명의 직원들이 왼쪽 식탁에 모여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다.
"사장님 밤새 일하고 자고 계신 데 어떡해. 그냥 돌아가요."
가게주인을 찾아 왔다는 말에 직원 하나가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이렇게 포기할 순 없다. 나는 사장님이 어디 계시냐고 다시 한 번 되묻는다. 직원이 내 뒤쪽을 가리킨다.
"아니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내 뒤쪽 식탁에서 머리를 괴고 있던 주인이 일어나 안경을 고쳐 쓴다. 순간 놀랐다. 그녀에게서 가게 인테리어만큼이나 깊은 연륜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 지난 2010년 전태일거리문화예술전에 전시됐다가 서울시설공단에 의해 철거돼 논란을 일으켰던 만평 중 권범철 화백의 작품. ⓒ권범철 |
평화시장 3층, 45년 '전통' 모녀식당을 아시나요?
"전태일 열사보다 두 살인가 어리다더라." 그녀의 나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나이를 대략 짐작하고 있었는데도 충격을 받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내 앞에 앉은 그녀의 모습은 영원히 젊은이로 남아 있는 전태일 열사의 이미지와 대비되어, 예상하지 못했던 충격을 안겨준다. 세월의 무게라는 게 이런 것일까. 문득 이 근처에 설치된 반신상의 얼굴이 떠오른다. 스물두 살 청년의 젊디젊은 얼굴. 다시 한 번 그 뼈아픈 괴리감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주인은 모녀식당의 간판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눈에도 세월의 체취가 느껴졌던 바로 그 간판이다.
"간판 말이야. 이거 처음 가게 차렸을 때 손님이 해준 게 아직 그대로 있는 거야. 그 손님이 간판 하는 사람이었거든. 아 여기 식당이 들어왔냐고, 모녀가 하는 식당이니까 모녀식당 하면 되겠네 하면서 달아줬지."
지금의 주인은 '모녀식당' 이름 속 '모녀' 중 딸이다. 그녀는 스무 살이 되던 해, 평화시장에 처음 발을 들였다. 처음에는 건물에 입점도 하지 않았고, 메뉴도 백반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발로 뛰며 백반장사를 하다 건물에 가게를 내고, 감자탕으로 바꾼 것이 벌써 삼십 년이 넘었다. 그만큼 오래된 가게다 보니 단골도 오래된 이들이 많다. 심지어 45년 된 단골들도 있다. 가게를 차린 초기부터 드나들었던 이들이다.
45년, 숫자로만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놓고 생각해본다면 참으로 아득한 세월이다. 그렇다 보니 세상을 떠난 이들도 많다. 죽음과 함께 발이 끊긴 이들도 있지만 어떤 단골들은 대를 이어 오기도 한다. 어릴 때 시장에서 일하는 부모님 손을 잡고 왔다가 그대로 단골로 자라난 이들이다. 처음에는 부모와 함께 식당에 온 이들이 나중에는 자신이 부모가 되어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다. 그렇게 대를 이은 단골들은 대부분 부모님의 가업을 이어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평화시장은 나한테는 고향이야."
주인이 말한다. 고향. 비록 이곳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인생의 2/3 가까운 세월을 평화시장에서 보낸 그녀로서는 당연한 말이다. 대를 이은 단골 이야기처럼, 그녀의 삶과 이 식당도 대를 이어갈지 궁금하다.
"내 대에서 끝낼 거야."
그녀는 딱 잘라 말한다. 단호한 목소리다. 문득 인터뷰하러 들어올 때, 그녀가 낡은 식탁에 잠이 부족한 수험생처럼 얼굴을 묻고 졸고 있던 것이 기억난다. 모녀식당은 밤에 배달 위주의 장사를 하는 가게이기 때문이다. 즉, 그녀는 스무 살부터 45년을, 밤낮 바뀐 생활을 하며 시장에서 일한 셈이다. 식당이 매스컴을 타고, 관광객들이 오기 시작한 지금도 그녀가 손수 배달 일을 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밤낮이 바뀐 45년,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녀가 고된 삶을 살아 그런 것일까? 그녀의 자식들 중에서는 시장의 삶을 물려받은 이가 한 명도 없다. 모두 독립해서 시장을 떠났다.
배고픈 전태일이 찾던 모녀식당…"손님들 배부르게 먹고 가면 그게 보람"
"시장도 많이 바뀌었지. 시대가 완전히 바뀌었는데 여기라고 뭐 별수 있겠어."
과거, 모녀식당의 주 고객들은 피복 공장의 노동자들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아니다. 공장은 거의 다 사라지고 의류 상점들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녀식당은 요즘 시장 상인들을 주 고객으로 한다.
"여기도 이제 관광지야. 아침저녁으로 버스가 와서 관광객들을 실어 나른다고."
맞는 말이다. '동대문'이라는 말로 통칭되는 이 부근은 이제 관광지다. 하지만 평화시장은 동대문의 다른 시장들에 비해 젊은 사람이 적은 편이다. 평화시장에서 팔리는 옷들은 나이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주로 계절이 바뀔 때, 옷을 새로 장만하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
"요즘 사람들은 뭐, 고생이라는 것을 너무 대단하게 생각해. 힘든 걸 자꾸 힘들다고 생각하면 못 버티는데 말이야."
중얼거리듯 그녀가 말한다. 두 눈동자가 밤샌 사람답지 않게 생생하다. 그 눈동자를 보며 그녀가 이곳에 발붙인 40년의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배고픈 손님들이 찾아와서 맛있게 배부르게 먹고 가는 거, 그게 제일 큰 보람이지 뭐. 배고프면 와. 맛있는 밥 줄게."
모녀식당 주인의 마지막 말이다. 나는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온다. 그 옛날, 배고픈 이들이 걸었을 거리를 걷는다.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눈이 스며들어 옷이 젖고 추위에 발가락이 단단하게 곱는다. 순간 어딘가 들어가야겠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추위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구나, 싶다. 그것은 굶주림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한때 이 거리를 채웠던 사람들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청춘을 바쳐 일했지만 한 끼 밥을 먹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 평균 14-15시간의 노동과 야간 작업, 열악한 노동 조건으로 인한 각종 질병, 심지어 어린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약물 사용까지. 그들은 인간 이하의 조건에서 일했다. 자신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그 상황에서 그들을 위해 희생했던 전태일 열사를 떠올린다. 그가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병원에서 죽기 전 한 말은 '배가 고프다'였다.
전태일, 그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이곳 평화시장에는 여전히 굶주림의 기억이 흐른다. 그리고 배고픈 이들의 배를 채우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는 모녀식당이, 45년째 버티고 있다.
"커피 값 50원" 전태일이 찾던 명보다방을 기억하세요?
어렴풋이 담배 냄새와 단내가 뒤섞인 냄새가 배어 있다. 불쾌한 냄새는 아니다. 고동색 바탕에 금색 덩굴무늬가 박힌 오래된 의자들을 바라본다. 조화가 꽂힌 화분들과 녹색 공중전화, 선풍기. 친근하지만 무척 낡았다. 명보다방, 이곳은 과거부터 서울 유명 다방 중 한 곳이었으며,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몇몇 다방 중 한 곳이다.
낡았지만 폭신해 보이는 의자에 앉는다. 40년 세월 동안, 이 의자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몸을 기댔을까. 이 의자가 새것이었을 때쯤, 이곳은 젊은이들이 모이는 만남의 광장이자, 최첨단 유행을 달리는 세련된 공간이었다. 커피 값은 50원. 그 당시 가치로는 평화시장의 시다가 14시간 하루 노동을 하고서 받는 돈이었다. 지금 이곳의 커피 값은 5000원이다. 노동부에서 정한 최저 시급을 조금 넘는다. 만일 내가 14시간 힘들게 일하고 5000원 정도를 받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억울한 것을 넘어 서럽지 않을까. 그 서러운 이들을 위해 싸웠던 전태일도 이 다방에 자주 왔다. 서러운 이들을 위해 더 열심히 싸우기 위해 다방에 왔다.
1969년, 전태일의 아버지 전상수 씨가 돌아가시던 시점, '바보회'가 성립된다. 바보들의 모임 바보회. 그들이 '바보'인 이유는 강자의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 인간상은 '하나의 존엄하고 독립된 주체적 인간으로 모든 내면적 욕구, 의지, 희망의 충족을 포기하고 강자를 위한 하나의 도구나 기능, 노동력으로 전락해 버린 인간상'이다. 그런 인간상은 세상의 평가로는 '똑똑한 사람', '약은 사람'이다. 전태일과 친구들이 스스로 바보라 선언한 것은 그런 이유다. 이 '바보회'의 모임은 주로 다방에서 열렸다. 비싼 찻값을 물기는 하지만 사람들의 눈을 피해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어떡해."
환하게 웃으며 주인이 이야기한다. 이제 '명보커피숍'으로 간판을 바꾼 '명보다방', 하지만 그것 빼고는 모두 그대로다.
"바꾼 지 한 2년 됐나? 에이, 커피숍이나 다방이나 그게 그거 아니겠어요."
주인이 말한다. 옛날에는 다방에 별다른 용무 없이 그냥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요즘의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에 젊은이들이 별 특별한 용무 없이 앉아 있는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요즘의 다방에는 단골손님들밖에는 오지 않고, 그들조차 그냥 약속장소를 여기로 해서 자기 용무만 보고 가는 사람들뿐이다.
옛날 다방에는 디제이도 있었고 주 고객은 대학생들이었다. 젊음과 문화의 공간이었다. 여가 시간을 가지러 온 대학생들 사이에서, 평화시장의 노동조건을 이야기하던 바보회의 멤버들은 어떤 것들을 느꼈을까. 전태일, 그는 이 다방이 자신의 이름으로 기억될 것을 알았을까.
주인은 쌍화차가 맛있다며, 한잔 내온다. 계란 노른자가 동동 떠 있는 쌍화차는 달콤한 냄새를 풍긴다. 말린 대추와 견과류가 씹힌다. 계란 노른자를 터뜨리니 고소한 맛과 감초 맛이 합쳐져 혀를 녹인다. 감성을 자극하는 맛이다. 프루스트의 마들렌 홍차만큼은 아닐지라도, 정말 맛있다. 전태일 열사도 이런 쌍화차를 마셨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그때, 누군가 들어온다. 주인과 같은 연령대로 보이는 여자다.
▲ 전태일다리에 있는 전태일 동상 ⓒ프레시안(최형락) |
대학교 교과서에는 전태일이 안 나오나요?
"30년지기 친구야."
담배를 피워 물며 여자가 말한다. 나는 30년 우정의 비법을 묻는다.
"뭐 별거 있나? 우리는 말이야, 서로 미친 듯이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싫어하는 것도 아냐.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것, 그게 인간관계 오래가는 비법이지."
여자가 말한다. 그녀의 시선은 다방 테이블 위, 검고 반들반들한 재떨이로 향한다. 그 속으로 여자가 담뱃재를 떤다. 익숙한 손놀림은 어떤 낭만을 불러일으킨다. 그녀에게 담배와 우정, 어느 것이 더 오래되었을까 궁금해진다.
"근데 전태일이 말이에요. 그, 교과서에도 나와요?"
주인이 묻는다. 아는 사람에게 명보다방을 인수받아 꾸려 나간 지 10년째, 이 공간의 역사는 그녀에게도 호기심의 대상이다. 나는 사회 교과서, 근현대사 교과서에 그의 이름이 나온다고 말한다.
"대학교 교과서에는 안 나와요?"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그녀가 묻는다. 나는 잠시 당황한다. 그리고 역사나 법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배울 것이라 대답한다. 그녀가 미소 짓는다. 자랑스러워하는 미소다.
"여기가 전태일이가 생전에 와서 차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것 때문에 찾아오는 손님들도 얼마 전까진 꽤 됐어요."
그녀가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대학생들이 이곳에 찾아와 다큐멘터리 영화도 찍고, 중고생들은 수행평가 답사 과제를 하기 위해서도 종종 왔다고 한다. 나는 다방의 메뉴에 대해 묻는다. 쌍화차 다음으로 인기 있는 메뉴는 바로 커피. 명보다방의 커피는 핸드드립커피도,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뽑아낸 원액도 아닌 인스턴트커피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 명보다방의 인스턴트커피에는 이곳 특유의 비법이 있다.
"커피는 맥심, 맥심만 써요. 컵의 입구가 좁고 항상 따뜻하게 데워놔야 커피가 맛있어요. 물은 꼭 팔팔 끓이고, 양도 잘 조절해야 해요."
이것이 명보다방 커피 맛의 비법이다. 주인은 보온이 되는 식기 보관함을 보여준다. 좁은 입구의 컵이 가득 들어 있다. 그녀가 끓여온 커피의 맛을 본다. 익숙한 인스턴트커피의 맛이다. 그런데 직접 해먹는 것보다 훨씬 진하고, 따뜻하다.
"단골이던 대학생들 두 명이 있었어요."
주인이 말한다. 몇 년 전, 명보다방에는 흔치 않은 젊은 단골손님들이 있었다. 매일 다방을 찾아오던 그들은 중국인 유학생들로 주인과는 서로 전화로 안부를 물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영국인가 어딘가로 유학 갔다고 하더라고. 한국 다시 오면 꼭 들르겠다고 했는데. 간 지 1년 됐는데 아직 소식이 없네요. 보고 싶은데…."
주인이 말한다. 그녀의 얼굴에 내가 헤아릴 수 없는 깊이의 감정이 떠오른다. 나는 주인에게 언제까지 가게를 운영할 거냐고 묻는다.
"글쎄요. 할 수 있는데까지 하겠죠."
주인이 말한다.
"명보다방 여기는 계속 이대로 있을 거야. 평화시장이 없어지지 않는 한."
친구가 덧붙인다. 나는 창밖을 본다. 눈발이 점점 세지고 있다. 더 이상 지체하다가 이곳을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할 것만 같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30년지기 두 친구의 얼굴이 보인다. 약간의 무료함과 평화로움이 섞인, 그다지 좋지도 싫지도 않은 표정. 적당한 온도의 그 표정을 뒤로하고 나왔다. 바깥세상은 무섭게 차다.
포탄이라도 피하듯 눈을 피해 달린다. 그리고 잠시 멈춰서 뒤를 돌아본다.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하고 있다. 눈사람처럼 점퍼에 눈을 묻힌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다니고 불법 주차된 오토바이들 위에는 생크림처럼 눈이 얹혀 있다. 포장마차들은 점점 굵어지는 눈발과 함께 그만큼 하얀 연기를 내뿜고 있다. 낡고 낮은 건물, '평화시장'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평화시장, 너무 많은 것이 변해버린 이곳은 지금 현재도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평화시장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을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이곳이 영원히 전태일의 이름으로 기억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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