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유엔총회의 결의에 따라 총선거가 결정되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이 결렬됨에 따라, 남한만의 단독 선거로 분단 정부가 수립되었다. 제헌국회는 "대통령과 부통령은 국회에서 무기명 투표로써 각각 선거한다."(제53조)는 제헌헌법에 따라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1948년 7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후 4.19혁명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날 때까지 12년간 장기 집권하였는데, 강만길 교수는 이승만 정권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성립 과정에서 좌익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독립당과 같은 민족해방운동전선 우익 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다만 국내 지주 세력 중심으로 조직된 한국민주당 세력과 친일세력 등을 기반으로 삼았을 뿐이다. 그러나 곧 한민당의 지지마저 잃고 그 세력 기반이 더욱 약해졌다. 1차 임기로 끝날 처지였다가 6.25전쟁 발발에 힘입어 그 명맥을 이을 수 있었던 이승만 정권은 이후 이데올로기 면에서는 철저한 반공주의와 표면적인 반일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물리적으로는 경찰·군부와 청년 단체, 그리고 사조직이나 마찬가지인 자유당을 기반으로 하여 정권을 유지하면서 많은 폭정을 거듭했다."(강만길, 1994, 292쪽)
▲ 댜큐멘터리 <백년전쟁> 포스터. ⓒ민족문제연구소 |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주의를 내세워 헌정 질서를 짓밟고 인권을 탄압하며 부정선거를 일삼다 민주주의 사수를 위해 궐기한 4.19혁명에 의해 쫓겨난 독재자라는 주장으로, 이는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평가이기도 하다.
반면 뉴라이트 교과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공산주의 국제 세력의 공세로부터 대한민국을 방어하고, 대한민국의 기틀을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경제 체제로 올바로 잡는데 동시대 어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커다란 공훈을 세웠다"(158쪽)라고 하여, 역사학계와는 상반되는 평가를 내렸다. 이어 교과서는 이승만의 정치 이념과 정책은 "자유민주주의, 반공주의, 반일 정책, 북진통일로 요약된다"라고 하였다(158쪽).
이들 네 가지 가운데 반일 정책은 이승만 정권이 표면적으로 표방한 데 불과하였다. 이승만은 일제강점기에는 외교독립론에 따라 항일무장투쟁을 배척하였으며, 해방이 되자 친일파를 기반으로 권력을 장악하였고, 반민특위를 불법적으로 해체시킴으로써 친일파 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좌절시켰으며, 친일 세력을 지지 기반으로 독재자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이 그 권력 기초가 친일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반일 정책을 표방한 것은 항일이 지니는 상징성과 정통성을 의식한 때문이었다. 민족해방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정통성 있는 정권임을 표방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형식적·표면적으로 내건 반일 정책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 이념과 정책을 기준으로 이승만 정권의 성격을 살펴보겠다.
뉴라이트는 어떻게 역사를 왜곡했나 ☞ <1> 11월 22일, 이승만-박정희가 부활한다 ☞ <2> 일제가 조선에 철도를 놓은 이유는? ☞ <3> 윤봉길 의사가 테러리스트인가? ☞ <4>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인 이유 ☞ <5> 경제민주주의와 보편적 복지, 제헌헌법에 다 나와 있었다! ☞ <6> 뉴라이트 교과서는 이승만 위인전인가? |
1. 자유민주주의
뉴라이트 교과서는 "이승만의 정치 이념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수많은 후진국의 정치적 지도가 가운데 이승만처럼 철저한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158쪽)라고 서술하여, 이승만을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로 치켜세웠다. 그러나 교과서의 주장은 반공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정치 원리 및 정부 형태를 말한다. 자유주의라는 토대와 전제 위에 민주주의의 이념을 수용한 것이 자유민주주의이다. 자유민주주의 역사의 출발점은 자유주의적이었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의 태내에서 성장해온 것이다. 자유주의라 함은 국가권력의 간섭을 배제하고 개인의 자유와 자율을 옹호하고 존중할 것을 요구하는 사상적 입장을 말한다. 자유주의는 원래 봉건 질서와 절대주의 정치 질서에 대항한 시민계급의 해방 이념이었다. 이에 대하여 민주주의라 함은 국민에 의한 지배 또는 국가권력이 국민에게 귀속되는 것을 내용적 특징으로 하는 정치 원리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의 기본 전제를 수용하면서도 정치적 선거권의 영역에서 민주주의(평등)의 요소를 도입하려 했던 실천적·이념적 조류였다.
자유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해서는 (가)기본적 인권의 존중 (나)권력 분립의 원리 (다)의회 제도 (라)복수 정당 제도 (마)민주적 선거 제도 (바)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를 골간으로 하는 경제 질서 (사)사법권의 독립 등이 요청된다(권영성, 2008, 136-139쪽). 자유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한 정권의 주기적 교체나 의회 정치와 같은 절차적·제도적 측면을 강조하며, 이를 위해 정치적 선호의 형성과 표현 기회의 평등, 즉 사상과 결사의 자유 같은 정치적 기본권을 보장한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국민주권의 원리, 법치주의, 권력 분립주의는 모두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려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반해 교과서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란 반공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교과서는 자유민주주의를 반공주의와 동의어로 오용(誤用)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축소·왜곡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이러한 잘못은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에 철저했던 만큼,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158쪽) 라는 서술에서 잘 드러난다.
대한민국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시작부터 반공의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민주공화국으로 출범한 제1공화국의 이승만 정권은 북한과 공산주의의 존재를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독재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하였다. 자유민주주의란 담론도 이때 선을 보이는데, 반공으로서 자유민주주의는 이후에 계속된 독재정권을 거쳐 민주화를 이룬 지금까지도 그 의미를 갖고 현재 극우파 및 보수 집단에 의해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뉴라이트 교과서처럼 자유민주주의를 반공주의와 등치시킬 경우, 자유민주주의의 역사적·보편적 성과마저 포섭하지 못하는 이념적 협소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체제 수호 논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넘어서는 보편적 가치를 품고 있다. 이것은 자유주의가 계몽주의 이래 비판적 정신의 산물이기도 했으며 대중운동과 시민혁명의 이념적 지주로서 기능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보편적 가치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사상과 양심의 자유이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4, 96쪽).
반면 반공주의는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적 가치인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반공주의는 자본의 논리를 절대자의 위치에 올려놓은 자본주의 사회의 유일 신앙이자 공인 종교이다. 따라서 반공주의는 본질적으로 교조주의적이다. 그것은 자본의 논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체의 이념이나 사상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보인다. 그 결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고전적 형태인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가치상대주의에 입각하여 자신이 이념적 지표로 내세웠던 사상의 자유시장은 설 자리를 잃고, 국가권력의 인증을 받은 체제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사고는 물론 역사의 진실까지도 지배하게 되는 닫힌 구조의 일차원적 암흑 사회가 눈앞에 펼쳐진다. 가치절대주의의 이 같은 폐쇄성은 사상의 자유시장을 전제로 하는 정치적 관용의 정신이 배어들 틈을 한 치도 내어주지 않는다. 안전 자유 통행이 보장되는 것은 반공주의일 뿐, 그 밖의 다른 이념이나 사상은 품질과 관계없이 전천후 감시 체제의 매서운 눈초리를 피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국순옥, 1994, 154-155쪽).
다원주의와 가치상대주의에 의거하여 인간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는 자유민주주의와 교조주의와 가치절대주의에 입각하여 인간의 비판적 사고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반공주의는 상호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따라서 교과서의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에 철저했던 만큼,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158쪽)라는 서술은 형용모순이다. 교과서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란 보통선거 제도, 정당 제도, 대의제, 국가권력의 제한, 개인주의, 다원주의를 강조하는 본래 의미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냉전반공주의'의 다른 이름일 따름이다.
냉전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은 집권 12년 동안 권력 분립, 의회 제도, 복수 정당 제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질서와 가치를 부정하고, 정권 장악을 위한 위헌적 개헌을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였다. 이승만 집권 12년은 자유민주주의 파괴의 역사였다.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를 수립한 공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파괴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우리가 4.19를 혁명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국민이 자신의 힘으로, 자발적으로 이승만 독재 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였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이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한 사례는 헤아릴 수 없으나 대한민국의 주춧돌이라 할 수 있는 헌법을 두 차례에 걸쳐 파괴한 위헌적 개헌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헌법 무시, 위헌이라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최대의 정치적 과오이며 죄악이기 때문이다.
1) 발췌개헌(1952년 7월 4일)
정부 수립 후 첫 번째 헌법 개정인 이른바 '발췌개헌'은 1952년 7월 4일 부산 피난국회에서 이루어졌는데, 이에 대한 교과서 서술은 다음과 같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반대파가 다수인 국회에서 차기 대통령에 재선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승만은 야당의 지도자들이 지나치게 미국에 의존적이어서 민족의 지상과제인 북진통일을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불신하였다. 야당의 지도자들은 미국의 협조를 얻어 정부 형태를 내각책임제로 바꾸기 위한 헌법 개정을 추진하였다. 미국도 정전협정 방침에 비협조적이면서 권위주의적인 이승만을 다른 지도자로 교체할 의향을 가졌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1952년 5월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병을 동원하여 다수 국회의원을 구금하였다. 이승만의 완강한 반발에 밀려 미국은 이승만과 야당의 정치적 타협을 주선하였다. 그 결과 국민이 대통령을 직선하면서 내각책임제 요소를 강화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였다(발췌개헌). 국민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이승만은 그해 8월 대통령 선거에서 무난히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163쪽)
교과서는 국민의 신임을 받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이 민족의 지상과제인 북진통일을 수행하고, 미국과 야당의 내각제 개헌을 통한 제거 계획에 맞서기 위해 이승만이 발췌개헌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발췌개헌으로 이어진 부산정치파동을 합리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억지 주장일 뿐이다.
먼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신임 여부인데, 이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이다. 이승만은 이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제헌헌법에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연임을 위해서는 국회를 장악해야 하였기 때문이었다. 극단적인 반공 정책과 테러와 폭력이 난무하는 살풍경 속에서 치러진 5.30총선의 결과는 이승만을 경악케 하였다. 이승만 지지 세력은 전체 의석(210석) 중 30여 석에 불과하였고 그 대신 무소속이 절반이 넘는 126명이나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취임 2년 만에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의 거짓말 방송과 무책임한 후퇴, 공비 소탕이라는 명목 하에 민간인을 학살한 '거창양민학살사건'(1951년 2월 11일), 100만 명의 제2국민병을 굶주림과 질병으로 몰아넣고 그 간부들이 23억 원과 5만 섬 이상의 양곡을 착복한 '국민방위군사건'(1951년 3월 9일) 등 거듭되는 실정으로 이승만은 1차 임기가 끝났을 때(1952년) 국회에서 이뤄지는 간접 선거로는 다시 당선되지 못할 것이 확실해졌다. 그가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데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한 '정치 파동'을 일으킨 것은 이 때문이었다.
다음, 민족의 지상과제인 북진통일을 위해 발췌개헌을 하였다는 주장이다. 이승만의 발췌개헌은 북진통일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였다. 발췌개헌으로 이어진 한국의 정치 파동은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목 하에 16개국을 동원한 유엔의 권위를 무색하게 하고, 미국을 국제 여론에서 궁지에 몰리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 아래 유엔을 동원하여 한국에 파병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대통령이 기본적인 의회민주주의마저 부정하면서 정권 연장을 획책하자, 유엔군에 참여하였던 영국과 호주는 미국에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이에 미국은 국제 여론을 의식해 유엔한국위원단을 내세워 이승만의 국회 탄압을 제지하는 정책을 취하는 한편, 유엔군의 일부와 이종찬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군의 일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승만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기까지 했다. 민주주의 헌정 질서를 짓밟는 부산정치파동은 북진통일의 동반자가 되어야 할 미국과 유엔의 신의를 배반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야당의 내각제 개헌이 미국의 '이승만 제거 계획(ever ready plan)'과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내각책임제는 제헌헌법 제정 당시부터 한민당의 기본 입장이었다. 원래는 국회는 양원제를 구상하고 정부 형태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하는 것이었는데, 헌법기초위원회에서 국회는 단원제를 채택하고 정부 형태는 소위 대통령 중심제 또는 대통령 책임제를 채용하기로 중대한 수정을 했다. 대통령 중심제가 1인 독재에 기울어지기 쉽고 따라서 대의제도와 법질서가 유린되기 쉽기 때문에, 이를 반대하고 법이 준수되고 만인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며 집권자가 국민의 대표 기관인 입법부에 대해 책임지는 의원내각제를 정치 형태로 채택하려는 것이 당초 구상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발췌개헌으로 이어지는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 까닭은 순전히 개인적인 권력 욕심 때문이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참패로 인해 국회에서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선거제로는 더 이상 대통령에 당선될 수 없게 되자, 이승만은 자신을 지지하는 정치 세력을 모아 자유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개헌안은 찬성 19표, 반대 143표, 기권 1표라는 압도적 표차로 부결되었으며(1952년 1월 18일), 오히려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대다수 국회의원의 발의로 제출되었다.
궁지에 몰린 이승만은 원외자유당을 비롯한 국회 외부의 세력을 동원해, 개헌안 부결 반대 민중대회 등의 관제 데모를 통해 국회에 압력을 넣었다. 정부가 동원한 민중자결단, 백골단, 땃벌떼 등의 폭력 조직을 비롯한 관제 데모대가 직선제 개헌안을 부결시킨 국회의원 소환 운동을 벌이며 테러를 자행하고 국회의원들을 협박하였으며 신문사를 습격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비 침투를 이유로 임시 수도 부산을 포함한 영남과 전라남북도 일대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으며(1952년 5월 25일), 다음 날 '정치 파동'을 본격적으로 일으켰다.
1952년 5월 26일 국회의원 50명가량을 태운 통근버스가 견인차에 끌려 헌병대로 연행되었으며, 그중 곽상훈 외 12명의 의원이 국제공산당과 연락하였다는 혐의로 국회의 동의도 없이 체포되었다. 이는 국회의원에게 회기 중 불체포 특권을 보장한 헌법을 위반하는 초법적인 행위였다. 헌법은 국회의원에게 "현행범을 제(除)한 외에는 회기 중 그 원(院)의 동의 없이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아니"(헌법 제49조)하는 불체포 특권을 보장하였다. 국회가 여러 가지 권한을 가지고 정부를 견제 또는 감시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정부와 충돌하는 일이 있으므로, 의원에게 불체포 특권을 주어 정부가 의원의 신체를 구속하여 국회의 기능을 저하 또는 정지시키는 것과 같은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회는 이승만 정부의 불법 행위에 맞서 부산지구 계엄령 해제를 결의하였으며(1952년 5월 28일), 다음 날 민주국민당의 지도자 김성수 부통령이 헌법과 실정법을 유린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규탄하는 강경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나는 이때까지도 대한민국의 최고 집정자가 그래도 완전히 사직을 파멸하려는 반역 행동에까지 나오리라고는 차마 예기치 못하였습니다. 그는 돌연…부산에 불법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제공산당과 관련이 있다는 허무맹랑한 누명을 씌워 50여 명의 국회의원을 체포·감금하는 폭거를 감행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국헌을 전복하고 주권을 찬탈하는 반란적 쿠데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서중석, 2007, 109-110쪽에서 재인용)
이어 김성수는 '국헌을 전복하고 주권을 찬탈하는 쿠데타'를 일으킨 이승만 대통령에 항의하여 부통령직을 사퇴하였다. 국민방위군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퇴한 초대 부통령 이시영에 이어 부통령이 된 지 1년 만이었다.
이와 같은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정·부통령 직선제, 양원제, 국회의 국무위원 불신임제 등을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이 제출되었다. 내용은 정부가 제출한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 양원제에다 야당이 제안한 국무총리의 추천에 의한 국무위원 임면, 국무위원에 대한 국회 불신임결의권 등을 덧붙인, 두 개의 개헌안을 절충한 것이었다. 정부안과 국회안을 절충했다고 하여 발췌개헌이라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상 이승만의 대통령 재선을 위하여 실시되는 개헌이었다.
국회의원들이 경찰에 의해 며칠씩 연금되는 테러 속에서, 국회는 재적의원 186명 가운데 166명이 참석하여 기립 표결로 찬성 163표,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1952년 7월 4일). 그러나 발췌개헌은 ①일차 부결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다시 부의하였다는 점에서 일사부재의(一事不再議)의 원칙에 위배되고 ②국회 공고(헌법 개정안을 30일 이상 공고하지 않은 것은 헌법 제98조 위반)와 독회 절차(헌법 개정도 입법권의 하나의 작용이므로 그 의결의 순서는 보통 법률과 같이 삼독회(三讀會)를 거처야 한다)를 거치지 않아 헌법을 위반하였으며 ③경찰·군대와 테러단이 국회를 겹겹이 포위한 상태에서 자유로운 토론을 할 수 없었으며 ④폭력적인 수단으로 인해 의사결정이 강제되었다는 점에서 위헌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이승만은 새로운 헌법에 의하여 실시된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1952년 8월 5일). 발췌개헌안 통과로 이어진 부산정치파동은 이승만 장기 독재의 시발점이자 정치 폭력을 동원한 최초의 헌법 개정이라는 점에서 의회민주주의 역사에 크나큰 오점으로 남아 있다.
▲ 2012년 7월 19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제47주기 추모식. ⓒ연합뉴스 |
2) 사사오입개헌(1954년 11월 27일)
발췌개헌을 통하여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바꿈으로써 이승만의 중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중임하기 위하여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철폐하도록 헌법을 또다시 개정하려 하였다. 제헌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하되,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도록 하였다(제55조). 헌법이 재선만을 허용한 것은 무제한 연선(連選)을 인정한다면 1인 장기 집권에 따른 독재를 초래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헌법 정신을 무시하고, 이승만은 영구 집권의 길을 트기 위해 개인의 사당(私黨)으로 전락한 자유당을 앞세워 또다시 개헌 작업에 돌입했다.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을 감행한 것이다. 이에 대해 교과서는 "이승만의 권위주의적 정치는 1954년 대통령의 연임 제한 규정을 철폐하는 개헌안을 국회에서 무리하게 통과시킴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사사오입 개헌)."(163쪽)라고 간단히 언급하였다.
그러나 제2차 헌법 개정 역시 제1차 헌법 개정인 발췌개헌과 마찬가지로 자유민주주를 유린하는 위헌적 개헌(사이비 합법성)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다음 근거에서 법리(法理)에 부합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첫째, 의결 정족수가 미달인데 가결하였다. 의결 정족수가 숫자상 135.333……이므로 이것은 하나를 올려 136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인데, 사사오입의 억지 논리를 전개해 의결 정족수가 135라고 해석하여 부결된 개정안을 가결로 한 것은 법리상 어긋난다. 이 때문에 '사사오입 개헌'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안게 되었다. 둘째, 부결 선언 사항을 가결로 번복하였다. 개헌안의 표결 결과에 대한 의장 또는 사회자의 의사 표시가 취소 또는 번복되는 것은 상당히 타당성 있는 근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인데, 사사오입 개헌에서는 그와 같은 타당한 근거 없이 행하여져 법 이론상 맞지 않는다. 셋째,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중임 제한을 철폐한 것은 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
위헌적인 사사오입 개헌으로 출마가 가능하여진 이승만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장기 집권의 소원을 성취하였다(1956년 5월 15일). 이 개헌은 우리나라 정치사에 또 하나의 오점을 남겼다. 헌법 개정이 집권자의 재집권이나 정권연장의 수단으로 전락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뒷날 박정희가 3선개헌을 하고 유신헌법을 제정하는 등의 나쁜 선례가 되었다. 부산정치파동에 이은 발췌개헌, 그리고 사사오입 개헌 등으로 잇달아 헌법이 유린되는 것을 두고, 영국 언론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바라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까지 하였다.
교과서는 사사오입 개헌의 문제점은 언급하지 않은 채, "1956년에 시행된…선거에서도 이승만은 대통령에 무난히 당선되었"(163쪽)다고 하여, 사사오입 개헌 이후에도 이승만이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것처럼 서술하였다.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으로 영구 집권의 길은 텄으나, 위헌적인 개헌으로 정통성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승만 정권의 공신력은 형편없이 추락하였으며, 민심은 극도로 이반되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1956년 5월 15일에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였다.
5.15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폭력과 불법의 전시장이었다. 엄청난 부정 선거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총투표수의 80퍼센트 이상을 획득할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겨우 52퍼센트(504만6437표) 선에 그쳤으며, 조봉암은 216만3808표, 신익희 추모표는 185만 표였다. 이는 4년 전의 득표율보다 무려 22퍼센트나 떨어진 수치로 기권·무효표까지 합치면 다수의 국민이 이승만을 거부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봉암은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진 선거라고 표현했다. 부통령으로는 장면이 이기붕을 누르고 당선되어, 이승만·자유당은 이 선거에서 실질적으로 패배한 셈이었다(서중석, 2007, 167-168쪽).
위기에 몰린 이승만 정권이 타개책으로 고안해 낸 방안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맹목적인 반공주의자들과 친일파를 끌어들여 반대 세력을 빨갱이로 몰아세우고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일이었다. 장경근, 한희석, 이재학, 이익흥, 인태식 등을 각료나 국회의원, 자유당 간부로 발탁했는데, 하나같이 일제강점기에 극렬 친일 활동을 한 인물들이었다. 5.15선거에서 나타난 민심에 대한 이승만의 분명한 대답은 해방 직전 박천경찰서장이었던 이익흥을 내무부 장관에, 전쟁 전후에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였고 거창양민학살사건을 은폐하려다가 징역형을 받은 전남경찰국장 김종원을 치안국장에 임명하고, 강원도 지사를 경기도 지사에, 강원도 경찰국장을 서울시경국장에 임명하여 영전시킨 데서 확연히 드러났다(서중석, 1999상, 165쪽).
이승만 정권이 위기 타개책으로 선택한 다른 하나는 각종 우상화 작업을 통해 정당성과 정통성을 조작하는 일이었다. 이승만 우상화 작업은 그의 나이 80이 되는 1955년 이후로 극성을 부렸다. 이승만을 민족의 영웅으로, 국가의 아버지인 국부로 만드는 상징 조작을 주도한 것은 자유당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민족의 영산(靈山) 남산의 옛 조선신궁 부지에 거대한 이승만 동상을 세운 것이었다(1956년 8월 15일).
이 대통령 80회 탄신 경축 중앙위원장인 이기붕은 제막식 식사에서 "자주독립의 권화(權化)이며 반공의 상징인 이 대통령 동상 앞에서 우리는 옷깃을 여미고 그 뜻을 받들기를 맹세하자"고 하였으며, 조각가 윤효중은 "현금 이 시대 우리 민족 가운데에 있어서 민족해방과 국권 광복의 성업(聖業)을 지목하고 거기에 즉한 가장 먼저 필두에 거론할 수 있는 인물을 들추려고 하면 이승만 박사를 제쳐놓지는 못할 것이다.(…) 현하에 우리 민족의 선두에서, 아니 세계 반공 진영의 선두에서 가장 철저히 또 꾸준하게 투쟁해 오는 분도 이승만 박사 같은 이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부인 못할 사실이다."라고 하여, 존경의 마음이 동상 제작에 이르는 동기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에 앞서 종로 탑골공원에도 거대한 동상을 세우고 거창한 제막식을 했다(1956년 3월 31일). 3.1운동 발상지인 탑골공원에 이승만의 동상을 세운 이유는 동상을 통해 이승만의 해외 독립운동을 역사적 사실로서 기록하고자 한 때문이었다(조은정, 2010, 234-241쪽).
훗날 자신 또한 헌법을 유린하는 데 앞장선 박정희는 자유당 치하에서 헌법이 짓밟히고 민주주의가 말살되는 데 대해 다음과 같이 비난하였다.
"대한민국이 수립되어 국민의 기본권으로서 헌법이 규정되었지만, 그것은 한갓 문서상의 추상적 규정이었을 뿐이었다. 정부가 그것의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러한 자유권을 스스로 짓밟기가 일쑤였다. 이리하여 정부의 유린에 시달리게 된 자유는 '정부의 강압에서 벗어나려는 자유', '정부의 탄압에서 벗어나려는 민권'의 형태로 싸웠던 것이 자유당 치하였다." (박정희, <우리 민족의 나갈 길>, 동아출판사, 1962, 40-41쪽)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국헌을 준수해야 할 본분을 망각한 채, 헌법을 유린하고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짓밟은 독재자였다는 게 박정희의 평가였다.
친일파를 기반으로 권좌에 오른 이승만이 몰락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 또한 친일파 때문이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 당일 마산에서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민중 시위가 일어났는데, 경찰의 발포로 8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날 마산시청 앞에서 시위대에 발포 명령을 내린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는 일제시대에 고문과 강압 수사로 악명이 높았던 마산서의 고등계 형사 아라이(新井)였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 구금하고 악랄하게 고문하던 아라이는 반민특위의 기소로 재판정에 섰으나 반민특위 해산으로 풀려나 경찰에 복직했다. 박종표는 마산 발포 사건의 발포 명령자일 뿐 아니라, 최루탄이 눈에 박혀 사망한 김주열(金朱烈, 1943-1960)의 시신을 돌에 매달아 마산 앞바다에 수장시킨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학생 시위가 서울, 부산 등지로 퍼져나가는 가운데, 살해된 김주열의 시체 인양을 계기로 마산에서 두 번째 민중 시위가 일어났다.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마산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자, 이승만은 흔히 써오던 책략대로 시위의 배후에 공산 세력이 개입한 혐의가 있다고 조작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고려대 학생들이 시위를 한 데 이어 마침내 4월 19일에 2만 명 이상의 서울 지역 대학생들과 시민이 일제히 일어나 정부 기관지인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 경찰관서 등에 불을 지르고 부정 선거를 규탄했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 186명이 목숨을 잃었다. 시위가 서울로 확산되고 다수의 사상자까지 발생하자 당황한 이승만은 계엄령을 펴는 한편, 각료들을 경질하면서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을 사퇴시키고 자신은 자유당 총재 자리를 내놓는 등 일련의 눈가림으로 사태를 수습하고 정권을 유지하려고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대학교수단의 시위에 이어 다시 민중 시위가 일어나자 마침내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12년간 유지하던 권좌에서 쫓겨났다(1960년 4월 26일).
4.19혁명은 국민의 힘으로 독재 정권을 물리친 자유민주주의 혁명이다. 4.19민주혁명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쫓겨난 독재자 이승만을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라고 미화하는 교과서 서술은 이승만 반공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궤변일 따름이다.
2. 반공주의
인간의 존엄성 존중을 바탕으로 하는 기본적 인권의 보장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반면 이승만 대통령은 집권 기간 내내 위헌적인 권력 행사를 통해 생명권을 포함하여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유린하였다. 이승만 정권 시기 인권 탄압은 국가기구 및 그와 공식·비공식으로 관련된 준관변단체에 의해 공공연한 테러와 고문으로 이루어졌다. 반공주의가 그 정당성의 근거였다. 이승만 정권이 반공주의에 의거하여 인권 탄압을 자행한 근저에는 친일 세력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반공을 앞세운 헌병사령부와 국군특무대 그리고 경찰은 친일 세력의 온상지였다. 이들은 과거의 친일 경력을 감추고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해 반공의 수호자로 자처하며 이승만의 정적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는 한국 사회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였다.
이승만 정권의 반공 정책에 대해, 교과서는 "비타협적 반공주의는 신생 대한민국을 정치적으로 통합하고 동질적 국민의식을 배양하는 데 기여하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반공을 국시로 내걸고 진보세력이나 비판세력을 반국가세력, 반정부분자로 몰아 탄압·처형하는 분위기에서 사회 통합이 이루어지고 동질적 국민 의식이 배양될 리 만무하였다.
이승만의 반공 정책에 대해, 조봉암은 "우리 대한민국의 국시로 반공정책을 세운 것을 기화로 해서 자기 정당 이외에 다른 정당이나 자기당파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즉 자기를 반대하는 분자에 대해서는 모두 가르쳐서 공산당이라 빨갱이라 하는 것으로서 능사를 삼고 그렇게 하는 것으로써 자기의 반대파를 제압하는 기본 정책으로 하고 있다고 하는 것도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비판하였으며, 이어 "공산주의라는 공자도 모르고 또 혹은 정반대로 공산당에 반대하는 사람들까지도 자기네의 반대파인 경우에는 공산당으로 몰아서, 얼마나 많은 공산주의자 아닌 공산주의자를 만들고 또 혹은 공산당 아닌 공산당이 생겼으며, 또 그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이 민심으로 하여금 대한민국 정부를 이반케 하며 대량적으로 공산당을 제조하고 있는가 하는 것도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이승만 반공 정책의 문제점에 대해, 교과서는 "반공의 이름으로 반대파가 탄압되거나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인권이 부정되는 부작용을 피할 수 없었"으나 "이러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공산주의 국제 세력의 공세로부터 대한민국을 방어하고, 대한민국의 기틀을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경제 체제로 올바로 잡는 데 동시대 어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커다란 공훈을 세웠다"(158쪽)라고 옹호하였다. 국민의 기본적 인권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인격의 주체로서 자유로운 발전을 누릴 인격권과 생명권을 박탈한 반공 정책의 치명적인 과오를 단순히 '부작용' 정도로 치부한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극단적인 반공 정책에 의해 집단 학살을 당하고 생명권을 박탈당한 사례는 무수히 많지만, 대표적인 사례로 제주 4.3사건과 진보당 조봉암 사건을 언급한다. 두 사건 모두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를 통해, 반공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반인륜적인 범죄 행위의 실상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1) 제주 4·3사건
제주 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제주4·3특별법 제2조) 제주 4·3사건은 제주도 역사가 시작된 이래 전무후무한 희생을 몰고 왔으며, 반세기 이상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아물지 않는 깊은 상처를 남겨놓았다. 4·3사건은 누구도 말해선 안 되는 사건이었다. 오랜 기간 제주도민들은 4·3사건을 입에 담지도 못했다. 유족들은 억울함을 호소하기는커녕 부모가 토벌대에게 총살당했다는 이유 하나로 어려서부터 '폭도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연좌제의 사슬에 묶여 앞길이 막혔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하에서 '제주4·3특별법'이 제정·공포되면서 비로소 정부 차원의 진상 조사가 착수되었다(2000년 1월 12일). 이어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이하 4·3진상보고서)'가 최종 확정되었으며(2003년 10월 15일), 정부차원의 사과와 희생자 지원 건의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제주도를 방문하여 제주도민과 유족에게 정부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를 표명하였다(2003년 10월 31일)
이처럼 이미 2003년에 정부가 4·3사건에 대해 진상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국가 폭력에 대해 공식 사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5년 뒤인 2008년에 발간된 뉴라이트 교과서는 여전히 가해자의 입장에서 '색깔론'을 고수하고 있다. 교과서는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 정치 세력은 대한민국의 성립에 저항하였다. 남로당은 정부 수립 이전인 1948년 4월 3일에 제주도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제주4·3사건)."(144쪽)라고 서술하여 이른바 '남로당 주도설'에 입각해 제주4·3사건은 남로당의 사주를 받은 '공산폭도들의 무장반란'이라는 종래 관변 측의 입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제주 4·3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진상조사위원회가 작성한 4·3진상보고서에 잘 드러나 있다. 4·3진상보고서는 사건 발생 반세기 만에 정부가 공식 인정한 '4·3 종합보고서'라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또한 이 보고서는 이념 중심이 아닌 주민 희생 및 인권 침해에 초점을 맞춰 작성된 최초의 인권 보고서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4·3진상보고서는 1948년 제주도에서, '제노사이드(genocide, 주민 집단 학살)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국제협약'과 같은 국제법이 요구하는 문명 사회의 기본 원칙이 무시됐고, 국가 공권력이 법을 어기면서 민간인을 살상하는 등 중대한 인권 유린과 과오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집단 살상에 관한 책임은 당시 군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는 미군에 있다고 하였으며, 제주 4·3사건을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으로 규정했다.
4·3진상보고서는 4·3사건의 전체 희생자를 2만5000명에서 3만 명으로 추산했다. 당시 제주도민의 약 10분의 1이 희생된 것이다.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도 한국전쟁기에 학살당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이렇게 민간인이 대량으로 학살당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량 학살(mass slaugter)의 시작은 1948년 11월 17일 발령한 계엄령이었는데, 이는 일제의 계엄령에 따라 발령된 법적 근거도 없는 계엄령이었다. 11월 중순 이후 이듬해 3월까지 대규모의 무제한적인 '초토화 작전'이 감행되면서,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애는 3무(無)작전에 따른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다. 정부는 무장대와 주민을 분리시키고, 무장대의 근거지를 빼앗아 효과적인 진압을 하기 위해 마을 전체를 초토화하고, '집단 부락'과 전략촌을 건설하여 주민들을 집단 이주시키는 소개(疏開) 전략을 채택하였다.
일부 마을의 경우 소개령(疏開令)이 전달되지 않은 채 작전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토벌대는 중산간(中山間) 마을 주민들이 무장대에게 식량과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 갑자기 들이닥쳐 무차별 총살하고 마을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초토화 작전의 학살극은 소개령에 따라 해변마을로 내려온 주민들에 대해서도 자행되었다. 토벌대는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며 학살했고, 무장대의 습격이 있었던 마을은 무장대와 '한통속' 취급을 받아 보복 학살로 초토화되었다.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이 같은 민간인 대량 학살은 '전과'로 둔갑되어 상부에 보고되기 일쑤였다.
초토화 작전은 일제가 중국 및 조선의 항일게릴라를 토벌할 때 사용했던 전략으로,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에 익숙한 친일 계통의 군인과 경찰들이 민간인 집단 학살에 앞장섰다. 제주도 주둔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후임으로 딘 군정장관이 특별히 발탁한 박진경 중령은 일본군 소위 출신으로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 명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박진경이 부하 대원에게 암살된 뒤 그의 후임 격으로 연대장 발령을 받고 강성 토벌을 한 최경록과, 부연대장으로 있다가 얼마 후 연대장이 되는 송요찬은 지원병으로 일본군에 들어가 준위로 근무하였다. 제주감찰청장으로 대학살기에 경찰총수였던 홍순봉은 일제 경찰로 만주에서 활동하였고, 악명 높은 특별수사대장이었던 최난수는 일본 고등계 형사 출신이었다. 초토화 작전 주역의 한 사람이었던 2연대장 함병선도 만주군 출신이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었을 때 사령관인 유재흥 대령도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었다(서중석, 1999하, 650쪽).
초토화 작전은 문명 세계에서 엄격히 금지되어 있고 그것을 명령한 사령관은 전범으로 재판을 받게 되어 있다. 제노사이드는 1945년 8월 8일 뉘른베르크 국제재판소 헌장, 1946년 2월과 12월 유엔총회 결의, 1948년 제노사이드 관련 협약, 1968년 11월 유엔총회 결의 등에서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고 범행일시에 관계없이 소추가 가능한 비인도적 범죄 등으로 규정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극우 반공 체제와 극우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강력한 기제로 작용하였다(서중석, 1999하, 703쪽).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해병대 사령부는 대대적인 예비검속을 실시하였다. 예비검속이란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관행으로,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요시찰 인사들을 구금했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 석방하는 제도를 말한다. 제주 4·3사건 관련 연루자 가운데 이미 훈방이나 석방된 사람들이 예비검속으로 집단 학살되었다. 죄가 있어서 재판을 받고 처형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아무 법적 절차도 없이 끌고 가서 경찰서에 가두거나 군에 넘긴 다음 총살하였다. 그러나 이때 제주도에서 예비검속 대상자로 분류되어 학살된 전체 희생자 숫자는 아직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또, 제주 4·3사건에 연루되어 대전형무소 등 육지에서 복역하던 수감자들도 한국전쟁 발발 직후 처형되었지만 희생자 명단이나 숫자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잔여 유격대의 소규모 활동이 계속되자 토벌 작전이 지속되었으며, 1953년 잔여 유격대원 80명이 사살되면서 만 5년의 4·3진압작전은 끝이 났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주도에서는 앞 다투어 군대에 자원하는 입대 선풍이 일었다. 입대 선풍에는 공포의 땅에서 탈출하려는 의도 이외에도 '색깔론'에서 벗어나기 위한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많은 증언자들은 "어느 날 갑자기 집합해 이유도 모른 채 총살당하는 제주보다는 비록 총알이 빗발친다 해도 자신의 의지대로 그 총알을 피할 수 있는 전쟁터가 훨씬 더 안전하다"고 말했다. 레드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2) 진보당 조봉암 사건
진보당 조봉암 사건이란, "이승만 정권의 공식 노선과 반대되는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조봉암이 1956년 5월 15일 대통령 선거에서 200여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조봉암을 제거하고 진보당의 1958년 민의원 총선 진출을 막으려는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의도가 작용하여, 서울시경이 조봉암 등 간부들을 국가 변란 혐의로 체포하여 조사하였고 수사권이 없는 특무대까지 수사에 나서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기소하여 재판을 통해 처형에 이르게 한 사건을 말한다."(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진보당 조봉암 사건', 2007, 1142쪽)
▲ 공판정에 앉아 있는 조봉암과 '진보당 사건' 관련 피고인들. ⓒ연합뉴스 |
조봉암이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되자, 다음날 국무회의에서 이승만대통령은 "조봉암은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이다. 이런 사정은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외부에 발표하지 말아야 할 것이야."라고 발언하였다(1958년 1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조봉암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직후, 이승만대통령은 "(징역 5년을 선고한 1심 판결은) 말도 안 되며 그때에 판사를 처단하려 하였으며, 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1심 판결을 문제 삼았다.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하자(1959년 2월 27일), 조봉암이 대법원 판결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이를 기각하고(1959년 7월 30일), 재심 기각 결정 다음 날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하였다(1959년 7월 31일).
재판부가 문제 삼은 진보당의 강령 정책은, 노동자와 농민 등 광범한 근로대중에 사회적 기반을 두는 사회적 민주주의, 자유와 계획을 조화시키는 자유제 계획경제, 그리고 평화통일론 등이었다.
원심 판결의 이유에 의하면, 조봉암은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는 북한 괴뢰 집단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첫째, '우리는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광범한 근로대중(피해 대중)을 대표로 하는 주체적, 선진적 정치적 집결체이며, 변혁적, 주체적 세력의 적극적 실천에 의하여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착취 없는 복지사회를 건설하여야 한다'는 취지의 혁신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으며, 둘째,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폐기 지양하고, 주요 산업과 대기업의 국유 내지 국영을 위시로 급속한 경제 건설, 사회적 생산력의 제고 및 사회적 생산물의 공정 분배를 완수하기 위하여 계획과 통제의 제 원칙을 실천하여야 한다'는 취지의 수탈 없는 경제 체제를 확립하려 하였으며, 셋째, '우리는 남북한에서 평화통일을 저해하는 요소를 견제하고 진보당 세력의 주도권 장악 하에 피 흘리지 않는 평화적 방식으로 조국의 통일을 실현한다'는 취지의 평화통일을 실현하려 하였으며, 이들 모두 죄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원심 판결에는 증거에 의하지 아니하고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증거재판주의에 위반하였고 또한 구 대한민국 헌법에 규정된 민주주의와 경제 질서 및 구 국가보안법 제1조에 규정된 결사의 의미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었다(대법원 2011. 1.20. 선고 2008재도11).
진보당의 사회민주적 경제 정책은 사회적 민주주의의 방식에 의하여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부작용이나 모순점을 완화·수정하려는 데 있는 것이지,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 체제의 골간을 전면 부인하는 취지가 아니므로, 제헌헌법의 각 전문 및 경제 조항 등에서 규정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민주적 기본 질서 및 경제 질서에 위배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진보당의 평화통일론도, 남한의 소위 무력통일론은 이미 불가능하고 또 불필요하다 보고 민주주의적 진보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통일 정책을 천명한 것으로, 북한의 위장 평화통일론에 부수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평화통일론은 오히려 헌법 전문에서 밝힌 대한민국은 "항구적인 국제 평화의 유지에 노력"한다는 평화주의 정신에 합치하는 것이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통일운동의 성장에 힘입어 진보당 조봉암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려는 움직임이 대두하였다. 진보당 조봉암 사건을 재조사한 진화위는 "이 사건은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1956년 5.15 대통령 선거에서 200여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조봉암을 제거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의도가 작용하여 (…)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기소하여 재판을 통해 처형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인정되는 비인도적, 반인권적 정치 유린이자 정치 탄압 사건"이라고 결론 내렸다(진화위, 1143쪽).
대법원은 재심 판결문에서 "진보당의 경제 정책은 사회적 민주주의의 방식에 의하여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부작용이나 모순점을 완화·수정하려는 데 있는 것이지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 체제의 골간을 전면 부인하는 취지가 아님이 분명하고, 진보당의 정치 형태 역시 주권재민과 대의제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의 보장 등을 목표로 하는 것이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내용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하였으며, 평화통일론에 대해서도 "북한이 대한민국을 변란할 목적으로 선전·선동하고 있는 위장 평화통일론에 부수하는 것이라고 인정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이를 인정할 다른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는 이 사건에서, 그 평화통일론이 이 사건 재심 대상 판결 당시 우리 사회의 주도적인 통일론이었던 북진통일론에 배치된다 하더라도 그러한 사정을 들어 곧바로 진보당의 통일 정책이 헌법에 위배된다거나 또는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주창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대법원 2011. 1.20. 선고 2008재도11 판결).
성립 당초부터 역사적 정당성과 지지 기반이 취약했던 이승만 정권은 헌법 개정을 둘러싼 정치적 폭행 이외에도 위기를 맞을 때마다 반공주의를 내세워 국회프락치사건(1949년), 국제공산당사건(1952년), 인도 뉴델리 밀회 사건(1954년) 등을 터뜨려 고비를 넘기면서 권력을 유지했는데, 평화통일론을 주창한 조봉암을 '사법 살인' 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3. 북진통일론
이승만은 정부 수립 초기까지는 '평화적 통일'에 대한 언급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단독 정부 수립의 과정에서 민족적 비난을 무마하는 수사적 의미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1948년 12월부터 여러 번 아주 공공연하게 '북진만이 통일의 길'이라며 북으로 진격하여 무력으로 북한을 통일해야 한다는 무력 북진통일론을 표방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이승만 정권은 전쟁만 일어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며 북진통일을 호언장담했다. 북진통일론에 대한 교과서 서술은 다음과 같다.
"정부가 수립되자 그의 단정론은 곧바로 북진통일론으로 바뀌었다. 결국 이승만은 선 건국, 후 통일의 2단계로 국민국가의 건설을 구상하였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정전을 추구한 미국의 정책과 충돌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승만 이외의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 이승만과 경쟁하였던 야당 지도자들은 이승만의 반공주의와 북진통일론처럼 단순 명쾌한 논리로 국민을 통합하고 동원할 능력을 결여하였다."(158쪽)
이승만이 반공주의와 북진통일론을 바탕으로 '국민들을 동원하고 통합'하는 지도력을 발휘하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북진통일론은 정적을 탄압하고 반공 독재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을 뿐, 민족적 과제인 통일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걸림돌이 되었다. 이승만은 북진통일론을 내세워 '국부(國父)'적 위상을 수립해 나아가고 이를 바탕으로 국회와 대중을 장악해 나갔으나 1950년대 중후반 이후 북진통일론은 다음 이유로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북진통일론은 민족을 적으로 간주하고, 전쟁을 통해 민족의 일부를 피정복민으로 삼겠다는 반민족적인 이념이었다. 북진통일론은 남북 문제를 민족공동체의 입장이 아니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입장에서 파악하는 냉전 이념이었다. 강대국의 패권주의적 세계 질서에 의해 냉전, 분단, 전쟁, 적대 체제가 강요되면서, 한반도에 민족 분단이 정착되었다. 식민지 지배와 국토 분단에 이어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겪은 한민족이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뿌리내린 적대의식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한반도 분단을 민족적 문제로 파악하기보다는, 자본·공산진영의 대립 즉 냉전의 문제로 파악하고, 자본주의 진영이 공산주의 진영을 무력으로 타도하는 멸공통일만이 유일하고도 현실적인 통일론이라고 주장하였다. 대 공산권 전쟁론인 북진통일론은 극단적인 냉전 의식의 발로였으며, 진영 논리에 집착하는 반민족적인 이념이었다.
둘째, 북진통일론은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하는 반민주적인 이념이었다. 민주주의 승리에 의한 정치적·평화적 통일을 주창한 조봉암은 통일이 민족적 과제인 만큼 통일을 이루되, 민족 전체의 이익이 되고 행복이 된다는 원칙 위에 서야 될 것이고, 민주주의의 승리와 민주 진영의 승리라는 원칙이 서야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민주주의의 승리 없이는 민족의 이익이나 행복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반면 반공주의의 기조 아래 공산주의와 평화공존을 거부하는 북진통일론은, 민주주의를 옳게 실천하는 민주 진영의 승리에 의한 통일이 아니라, 분단을 고착시키고 백색 독재와 극우 반동 체제를 강화시키는 기제로서 작동하고 있었다(서중석, 1999상, 75쪽).
셋째, 북진통일론은 헌법의 평화 정신에 반하는 반평화적인 이념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으면서 각국들은 예외 없이 평화주의와 국제 질서 존중주의를 핵심내용으로 하는 평화주의 헌법을 제정하였다. 제헌헌법 역시 전문에서 "항구적인 국제 평화의 유지에 노력"한다고 하여 국제 평화주의를 표방하였으며, "대한민국은 모든 침략적인 전쟁을 부인한다"(제6조)고 하여 침략전쟁을 부인하였다. 헌법에 따르면 남북한의 통일은 무력이나 강압에 의한 통일이 아닌 평화주의에 기초한 평화통일이 되어야 하므로, 군사적으로 북한을 통일해야 한다는 북진통일론은 평화주의를 천명한 헌법 정신에 반하는 것이다.
넷째, 북진통일론은 평화적 국제 질서의 수립을 바라는 국제 사회의 염원을 저버리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이 휴전협정으로 종결된 이후로 국제 정세는 정치적·평화적인 해결의 길로 매진하고 있었다. 유엔은 4-5차례 거듭해서 한국을 평화적으로 통일시켜야 되겠다는 결의를 하였다. 제8차 유엔총회에서는 ①한국에 있어서 체결된 휴전협정과 전투의 종식으로 해(該) 지역에 있어서 국제적인 평화와 안전에 전면적인 회복을 향하여 중대한 조치가 취하여졌다는 사실을 명기하며, ②국제연합 목적이 평화적인 방법에 의해서 대의정치 하에 통일독립민주한국을 구현하고 해(該) 지역에 있어서 국제적 평화와 완전을 전면적으로 회복할 수 있음을 재확인하며, ③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기 위한 결의를 했다(1953년 8월 28일). 제9차 유엔총회에서 "한국통일은 가급적 조속히 그리고 평화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결의안을 부가하였고(1954년 12월 1일), 또 제10차 유엔총회에 있어서도 역시 유엔 감시 하에 남북통일 선거에 의한 통일안을 재결의했으며(1955년 12월 9일), 제11차 유엔총회에서는 전기 결의안을 또 한 번 재확인하였다(1956년 1월). 이와 같이 세계 각국은 한국의 통일 문제에 대해서 다투어 정치적·평화적 해결 방도를 강조하고 있었다.
다섯째, 북진통일론은 실현 불가능한 비현실적인 이념이었다. 한국전쟁은 한반도가 분단국가 어느 한쪽의 체제에 의해 군사적·무력적으로 통일될 수 없음을 증명해주었다. 게다가 유엔의 평화통일론과 배치되는 북진통일론은, 유엔 감시 하에서 대한민국이 수립되었고 유엔의 승인을 얻어 합법적인 정부가 된 대한민국으로서는 채택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이상 전쟁만이 유일한 한국 통일의 기회라는 무력 북진통일론은 현실 국제 사회에서 고립을 자초하는 비현실적인 주장으로 결과적으로 통일을 포기하는 주장이나 다름없었다. 북진통일론은 통일을 방해하는 반통일 이념이었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무력 북진통일론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평화통일론을 주창한 이가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1899∼1959)이었다. 경기도 강화에서 빈농의 아들로 출생한 죽산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여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1년간 투옥되면서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해외에 망명하여 민족해방투쟁을 벌이다 상하이에서 체포된 다음 국내로 압송되어 신의주 감옥에서 7년 동안 수형 생활을 하였다. 죽산은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4년에 예비검속으로 또다시 투옥되어 용산헌병대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제헌의회의 국회의원, 제2대 국회의원과 국회 부의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52년과 1956년 제2,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정치가였다. 또한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농지개혁의 기틀을 마련하여 우리나라 경제 체제의 기반을 다진 행정가이기도 했다.
죽산은 1954년 3월 정치 활동에 대한 자신의 기본 노선을 밝힌 '우리의 당면 과업'에서 "민주주의적 남북통일의 완성은 우리 민주 진영의 지상지고의 이념이며 과업인 동시에 바꿀 수 없는 철칙"이라며 "민주 정신이 실천에 옮겨져야만 민주 승리를 토대로 한 남북통일을 가기(可期)할 수 있으며 공고한 자유 독립을 영구히 누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여, 민주주의의 승리에 의한 평화통일을 주장하였다.
조봉암이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 강령 정책으로 내건 "노동자·농민을 중심으로 진보적 근로인텔리, 중소상공업자, 양심적 종교인 등 광범한 근로 대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회민주주의 경제 정책과 "평화적 통일에의 길은 오직 하나 남북한에서 평화통일을 저해하고 있는 요소를 견제하고 민주주의적 진보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 뿐"이라는 민주 세력 주도의 평화통일론은 대중의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이에 대해 교과서는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의 당수 조봉암(曺奉岩)이 출마하여 30%의 지지를 얻었다. 그가 높은 지지를 얻게 된 것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후보 신익희(申翼熙)가 선거 전에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여(163쪽), 조봉암에 대한 높은 지지는 신익희 추모 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평화통일론을 비롯한 진보당의 정강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왜곡한 궁색한 설명이다.
대통령 선거 유세가 한창 진행 중이던 5월 5일 신익희 후보가 호남으로 유세 가던 중 열차 안에서 돌연히 서거하자, 민주당은 유권자들이 신익희 후보를 추모하는 추모 표를 던질 것을 바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무효 처리가 뻔한데도 야당 성향의 표가 조봉암한테 쏠릴 것을 막기 위해 전무후무한 선거전을 편 것이다. 그 결과 전체 유권자 900여만 명 가운데 신익희 추모표가 무려 185만여 표나 나왔다. 죽산을 지지한 216만여 표는 조봉암과 진보당의 강령 및 통일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죽산은 무력통일은 이미 불가능하고 또 불필요하다며, 민주주의적 진보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평화통일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이승만 정권은 국시인 북진통일론에 반한다는 이유를 들어 진보당 등록을 취소하였다(1958년 2월 25일). 오재경 공보실장은, 진보당이 대한민국의 국법과 유엔의 결의에 위반되는 통일 방안을 내걸었다고 주장하고, 진보당의 통일 방안은 적성 국가를 주로 하여 구성되는 감시단의 감시 하에 치러지는 남북총선거라고 하였다.
그러나 진보당의 평화통일 주장이 유엔의 결의에 합치되는 것이었고, 오히려 북진통일론이 유엔의 결의에 배치되는 통일론이었다. 미국 국무부 동북아 담당 관리의 주장처럼, "만일 한국 정부가 재판 중 평화통일 지지가 반역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 범법 행위에 대해 유엔과 미국이 지지하는 것이 되고, 더 나아가 유엔총회에서 한국 문제에 관한 미국의 위치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위태롭게"하는 것이었다(진실화해위원회, 진보당 조봉암 사건, 1089쪽).
조봉암이 처형된 것은 평화통일론을 내세워 이승만의 극우 반공 체제에 맞섰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서는 "1958년 조봉암은 북한으로부터 자금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158쪽)라고 하여, 죽산을 간첩 혐의로 몰아 사형에 처한 이승만 정권의 '사법 살인'을 정당화하는 서술을 하였다. 그러나 최근 열린 재심 판결에서 대법원은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이 (…) 헌법에 위배된다거나 또는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주창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하고, 조봉암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다(2011년 1월 20일).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 4월혁명과 함께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반면,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은 이후 대한민국 통일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적극 추종하던 야당 세력은 1957년 무렵부터 단독 북진에 대해서는 비현실적이라는 견해를 피력하면서 이승만 정권과 차별성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진보당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에 이어, 민주당마저 진정한 민주정치를 실시하고 국민 생활을 윤택케 하며 기만적 민주정치나 부패를 일소하고 물심양면으로 국민의 민주적 역량을 배양 강화하여 통일의 실력을 축적해야 한다는 화전양양(和戰兩樣)의 통일론을 내세우자, 북진통일론의 위력은 급격히 감퇴하였다(홍석률, 1994, 174쪽). 민주당은 3차 전당대회에서 '유엔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 방안을 채택하였는데(1957년 10월 18일), 이는 1970년대 초까지 대한민국 정부가 주장하는 통일 방안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1972년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3원칙을 천명한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은 통일의 원칙으로,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사상과 이념 및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고 하여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공식 천명하였다. 이후 남북한의 통일은 평화주의에 기초한 통일이어야 한다는 평화통일의 원칙이 확고히 자리 잡았다.
평화통일의 책무를 민족의 지상과제로서 헌법상 의무화한 것은 7.4남북공동선언 직후에 마련된 유신헌법이다. 유신헌법이 평화통일 조항을 신설하여, 남북한의 통일은 평화주의에 기초한 통일이어야 한다는 평화통일의 원칙이 대한민국 통일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헌법 전문에 "조국의…평화적 통일의 사명"이 새롭게 규정되었으며,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제4조)라고 하였으며,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제66조 제3항)라고 규정하였다.
평화통일의 흐름은 이후 1980년대로 오면서 그 전반기에는 전두환 정권의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으로, 그 후반기에는 노태우 정권의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어 1991년에 남북한은 유엔에 동시에 가입하여(1991년 9월) 국제 사회에서 각각 하나의 주권국가로 승인 받았으며,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 상호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점을 국내외에 천명했다(1991년 12월). 그리고 2000년 6.15공동선언을 통해, 남북의 정상들은 국가연합 내지 낮은 단계의 연방이라는 중간 과정을 거쳐서 통일로 간다는 점에 합의했다.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과 공존과 불가침이 시대적인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과서는 그 이념적 뿌리가 되는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반면 1960년 4.19혁명과 더불어 폐기된 이승만의 무력 북진통일론에 대해서는 "단순 명쾌한 논리로 국민을 통합하고 동원"(158쪽)하였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뉴라이트의 수구냉전적인 역사의식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맺음말
미국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은 독립전쟁과 건국 초기 8년 동안 아메리카합중국의 초석을 다져 놓음으로써 'Father of His Country'(국부)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는 두 번째 임기 종료를 앞두고 측근은 물론 독립전쟁의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군부로부터 3선 출마를 권유받았다. 하지만 그는 권력 연장을 부추기는 사람들을 단호히 배격하면서 임기가 끝나자마자 포토맥 강 하류의 고향 농장 '마운트버넌'으로 돌아갔다. 1799년 12월 14일 오후 10시, 워싱턴은 고향집에서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다. 이 소식이 이튿날 전국에 알려지자 온 국민이 슬픔에 잠겼으며, 하원은 존 마셜의 제의에 따라 "워싱턴은 전쟁에서도 제1인자였고, 평화에서도 제1인자였으며, 동포들의 마음에서도 제1인자"라는 결의안을 채택함으로써 진정한 영웅을 기렸다(김삼웅, 2012, 310쪽).
대한민국의 뉴라이트 역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한반도의 남쪽을 공산 위협으로부터 지켜내고 자유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국부'로 추앙한다. 그러나 민족해방운동 노선에서 독립전쟁론을 배척하고 외교독립론을 주장한 이승만은 전쟁에서 1인자가 될 수 없다. 또한 박정희가 "해방 16년에 남한에서는 이승만 노인의 눈 어두운 독재와 부패한 자유당 관권 중심의 '해방 귀족'들이 도량(跳梁)하여 민족의 장래는 어두워만 갔다.… 마침내는 4·19의 반독재 학생혁명을 유발하고 말았다."(박정희, <우리 민족의 나갈 길>, 동아출판사, 1962, 125-126쪽)라고 혹평한 것처럼, 이승만은 권력에 눈이 먼 독재자였기에, 평화에서 1인자가 더욱 될 수 없는 일이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 선거에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이승만 하야와 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며 총궐기하여 혁명적 투쟁으로 발전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퇴 성명서를 발표하고 경무대를 나와 이화장으로 가는 날 아침, 시인 김수영은 혁명의 감동을 읊조렸다.
우선 그 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 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이제야말로 아무 두려움 없이
그 놈의 사진을 태워도 좋다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인
지긋지긋한 그 놈의 미소하는 사진을
(……)
선량한 백성들이 하늘같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우러러보던 그 사진은
사실은 억압과 폭정의 방패였느니
썩은 놈의 사진이었느니
아아 살인자의 사진이었느니
(……)
(1960년 4월 26일 이른 아침,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시인이 '살인자'라고 읊조린 이가 동포들의 마음에서 1인자가 될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다.
참고한 글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1994
국순옥,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무엇인가」 『민주법학』 8, 민주주의법학연구회, 1994
홍석률,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과 냉전외교정책」 『한국사연구』 85, 1994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상)』 역사비평사, 1999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하)』 역사비평사, 1999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조은정, 「우상화에 동원된 대통령 이승만의 기념조형물」, 『내일을 여는 역사』 2010년 봄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자유민주주의의 전개와 성격』, 도서출판 오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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