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미국과 소련이 체결한 '중거리 핵미사일 폐기 조약(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 INF treaty)'에는 숨은 공로자가 있었다. 바로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였다.
당시 유럽 국가들은 INF 조약 체결을 강하게 요구했었다. 소련이 유럽을 겨냥해 SS-20 핵미사일 배치하고 미국이 퍼싱-2 핵미사일 배치로 맞불을 놓자 유럽 전역에선 반핵 시위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에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미소 양국에 중거리 핵미사일의 동시 철수와 폐기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카소네도 이러한 흐름에 합류했다. 그는 1986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SS-20 등 소련의 핵미사일로부터 일본도 위협을 당할 수 있다며 INF 조약 체결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고 요청했다. 이처럼 신냉전의 정점에서 체결돼 냉전 종식의 문을 여는데 큰 기여를 한 INF 조약은 미소 양국의 결단뿐만 아니라 나토 회원국들 및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도 주효했었다.
그로부터 31년이 지난 2018년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는 INF 조약 탈퇴를 강하게 시사했다. 러시아가 이 조약을 위반하고 있고 중국이 포함되지 않고 있다는 이유를 들고선 말이다. 그러자 유럽 국가들은 1980년대 '유럽 미사일 위기'의 망령이 되살아날 가능성을 우려하면서 미국을 만류하려고 하고 있다. (☞관련 기사 보기)
아베 정권, INF 조약 파기에 동의?
그런데 일본의 아베 신조 정권은 미국의 INF 조약 탈퇴 움직임에 동의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지난달 모스크바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일본이 이미 동의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일본 정부가 INF 조약 파기에 대해 명확한 입장은 아직 밝히지 않고 있지만,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움직임은 겉과 속이 다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우익은 유일한 '피폭 국가'임을 강조하면서 가해자로서의 이미지를 지우고 피해자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고 해왔다.
이뿐만이 아니다. 1994년 북미 간의 제네바 합의에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핵무기의 사용 및 사용 위협을 하지 않겠다는 '소극적 안전보장'에 명시되자, 일본은 미국 정부에 북한에 대한 핵공격 옵션을 유지해야 한다고 로비를 벌인 바 있다. 실제로 미국은 제네바 합의 이후에도 미국 본토에서 북한을 상정한 모의 핵공격 훈련을 실시했다는 사실이 비밀문서를 통해 확인되기도 했었다.
아베 정권에서 외무성 차관으로 승진한 아키바 타케오는 외무성 심의관 시절이었던 2009년에 오키나와에 미국 핵무기를 재배치하는 문제에 대해 "설득력이 있다"고 발언해 오키나와 주민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또한 아베 정권은 오바마 행정부를 상대로 '이중 용도', 즉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를 선택적으로 탑재할 수 있는 항공기를 아시아에 배치해달라고 로비를 벌였다. 올해에도 트럼프 행정부가 전술 핵무기를 재생산·재배치하는 내용이 포함된 핵 태세검토(NPR) 보고서를 내놓자 적극적으로 환영한다는 입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일본의 양심은?
이처럼 '두 얼굴'의 일본의 선택이 미칠 영향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만약 아베 정권이 트럼프 행정부의 INF 조약 탈퇴 움직임에 청신호를 보내면, 미국은 이를 향후에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을 오키나와 등 일본에 전진 배치하는 것에 대해 일본도 포괄적인 양해를 한 것으로 간주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이미 격화되고 있는 아시아 군비경쟁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악화될 수 있다. 한반도 비핵화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도 주일미군 기지를 겨냥한 미사일 전력을 증강시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일본의 양심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유일한 피폭 국가로서 핵무기 없는 세계를 만드는 데에 기여국이 될 것인가, 아니면 냉전의 망령을 또다시 불러내는 데에 동조국이 될 것인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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