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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선언 길찾기, 1955년 아데나워를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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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선언 길찾기, 1955년 아데나워를 기억하라

[현안진단] 가시권에 든 종전선언, 쟁점과 해법

종전선언, 북·미 협상의 중간 착륙지점

북한의 비핵화와 평화 문제를 둘러싼 북·미 협상이 곡절을 겪고는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핵심에 다가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핵화 초기 조치(Front Loading), 신고(Decleration)와 시간표(Timetable) 등 쟁점마다 삐걱거렸지만 쟁점을 옮겨가면서 협상은 이어지고 있다. 조마조마한 밀고 당기기 속에서도 타협이 진행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타협의 접점에는 앞으로 명칭이야 어떻게 붙이든지 종전선언이 있다.

명칭 때문에 오도될 수도 있으나, 종전선언은 이제 전쟁을 종료시킨다는 과거적 의미보다는 북·미간 새로운 관계 설정을 위해 출발한다는 미래적 의미가 훨씬 강하다. 이는 협상이 본격화되면서 앞으로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종전선언은 핵무장을 완성했다는 북한에게 비핵화 명분을 주면서 제재완화와 체제보장을 원하는 북한에게 상응조치에 대한 신뢰를 높이면서 비핵화의 역주행을 자제케 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종전선언은 장차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문제나 유엔사 문제 등과 연결되는 평화협정 논의로도 이어질 수 있는 점에서 북한에게는 솔깃한 제안이다.

그러나 같은 이유에서, 일부에서는 북한의 비핵화 조치가 선행되지 않는 종전선언은 시기상조라는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도 여전히 높다. 그간 종전선언과 비핵화 조치의 선후문제, 종전선언에 중국을 포함할지 여부, 평화협정과는 어떻게 연관 지을지에 대한 논쟁과 논란이 치열하였다.

지금은 이러한 쟁점들에 대한 이견이 어느 정도 좁혀지고 있다. 종전선언의 성격이 정치적 선언이고 이로 인해 동북아 안보지형이 달라지지도 않으며,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없이 평화협정이나 북·미 수교는 없다는 것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제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합의의 접점에 종전선언이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 지난 7일 북한에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오른쪽) 국무장관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 북미 간 현안을 논의했다. ⓒ폼페이오 트위터

종전선언 발상의 배경과 논의 경과

종전선언을 북핵문제와 관련지어 처음 화두에 올린 사람은 부시 대통령이다. 2006년 11월 그는 노무현 대통령과 하노이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는데, 여기서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 포기 대가로 공식적으로 종전을 선언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 때는 북한이 첫 핵실험(2006.10)을 강행한 직후였다.

부시 대통령은 종전선언과 평화조약을 명백히 구분하지 않았다. 북한 핵문제를 보다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평화문제를 북한의 핵포기 대가로 논의할 용의가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자 노무현 정부는 종전선언을 평화협정과 분리하여 비핵화 완료 전에라도 비핵화 과정을 추동하는 협상 카드로 쓰겠다는 구상을 수립했다.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과 핵문제 해결을 위해서 한반도에서 3자 또는 4자 종전선언을 추진한다고 합의했다. 영변 핵시설의 가동중단과 상당한 정도의 불능화 조치를 취했지만, 마지막 단계인 핵폐기에서 주저하던 북한에게 체제안전을 정치적으로 보장하여 비핵화를 촉진할 수 있다는 판단이 담긴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10.4선언'을 주도한 노무현 정부의 임기가 끝나고 대북 강경입장을 가진 이명박 정부의 등장으로 남북대화와 북미대화가 장기간 공전하면서 종전선언을 구체적으로 논의할 기회가 없어졌고, 내외여론의 기억에서도 사라졌다.

그것을 10년 만에 문재인 대통령이 다시 꺼내 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4월 판문점 정상회담에서 연내 종전선언 추진에 합의했다. 5월 22일 워싱턴에서 가진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도 종전선언에 동의하였고, 곧이어 6월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판문점선언을 확인하며 여기에 합세했다.

협상을 하면서 종전선언이 판도라의 상자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종전선언이 북한의 비핵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거쳐야 할 통과지점으로 굳어졌다

종전선언 쟁점의 해소와 아데나워 방식의 채용

종전선언과 관련하여 그동안 대두된 쟁점을 보면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비핵화 조치와의 선후 문제다. 종전선언을 완전한 비핵화와 연계되어 있는 평화협정과 분리하면 사실 선후문제는 그다지 중요하다고 보이지 않는다. 다만 비핵화 과정의 어디서 종전선언을 하느냐는 어려운 문제지만 타협 정신을 발휘한다면 해결이 가능하다.

평화연구원은 196호 현안진단을 통해 북한이 미국의 핵무기 일부의 조기폐기(Front Loading) 요구를 받아들이고, 미국도 종전선언을 수용할 것을 제안했고, 비핵화 협상도 그런 방향에서 타결될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둘째, 중국의 참여 문제인데, 이는 지난 9월 12일 시진핑 주석이 당면한 한반도문제의 당사자가 남·북·미 3자임을 인정하면서 쉽게 풀릴 수 있게 되었다. 평양 공동선언에서 사실상 남북이 종전을 선언했으므로, 이제 북·미간에 종전을 선언하면 종전선언의 핵심은 완성되는 셈이다.

셋째, 평화협정 과정과의 연계 문제다. 전쟁을 종료하고 평화를 회복하려면 전쟁 배상, 전범자 처벌, 점령지 반환과 경계선 등의 조건이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소·일 공동선언과 한·중 수교공동선언처럼 영토문제나 종전·평화협정과 같은 어려운 문제를 미루고 관계 정상화를 먼저 하기도 한다.

서독의 아데나워 수상은 할슈타인 원칙을 내세워 동독과 수교한 나라와는 국교를 정상화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1955년 9월 동독과 수교한 소련과 국교를 정상화했고, 당시까지 해결되지 않았던 양국 국경 문제는 추후 평화협정 때까지 미루었다. 같은 날, 일본과 소련의 런던 평화협상은 결렬되었는데 소련이 영토라고 주장한 쿠릴열도(일본명 북방도서) 때문이었다.

일본도 결국에는 1956년 아데나워 방식을 채용한 소·일 공동선언을 통해 영토문제(점령지 반환)를 후일로 미루고 소련과 종전을 선언하고 수교하였다. 하지만 영토문제로 인해 아직 평화조약을 체결하지는 않았다.

북·미간의 종전선언도 아데나워 방식의 원용이 가능하다. 한반도의 평화와 전쟁재발 방지를 위해 해결되기 어렵고 우려가 따르는 많은 부분은 평화협정 체결 시로 미루고 비핵화와 북·미 관계개선 지향에만 초점을 맞춘 내용이면 충분하다. 결국 현 상황에서 종전선언의 핵심 포인트는 70년 가까이 휴지상태에 있어왔던 전쟁을 깔끔하게 끝낸다는 의미보다는, 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반도에 평화를 확고히 구축하는 계기를 마련한다는데 의의가 있다.

앞으로 남·북·미 3자가 동의한 종전선언이 채택된다면 그것은 단순한 상징적 선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촉진하게 될 것이고 북·미관계의 실질적인 개선을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구상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한반도의 냉전구조가 역사 속으로 묻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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