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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희생양 만들기'는 재난 예방의 걸림돌

[안종주의 안전사회] 고양 저유소 화재, '고질병'이 도졌다

휴일 고양 시민은 물론 서울시민, 아니 전 국민을 깜짝 놀라게 하는 저유소 화재 사건이 터졌다. 7일 경기도 고양시에서 발생한 유류저장고 화재사고는 어마어마한 양의 기름을 저장하고 있는 곳에서 일어난 화재여서 14개나 되는 기름 탱크 모두가 폭발하는 대재앙으로 혹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밤새도록 했다.

기름 탱크 하나만 완전히 태우고 17시간 만에 불이 꺼진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타버린 기름 값만 40여억 원에 이르는 상당한 재산 피해가 나기는 했지만 인명 피해가 전혀 없었던 것도 그나마 다행이다.

화재 사건 발생과 피해 규모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한 외국인 노동자가 저유소 인근 공사장에서 날린 풍등이 화재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경찰 조사 결과 이 노동자는 300여 미터 떨어진 공사장에서 날린 풍등이 휘발유 저장탱크 10여 미터 지점에 떨어져 잔디에 불이 붙었고 이 불이 휘발유 저장탱크 안으로 들어가 폭발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화재 진압 골든타임에 직원들은 무엇을 했는가?

이렇게 중요한 시설이 풍등 하나가 잔디밭에 떨어진 것 때문에 대형 화재로 이어졌다면 일반시민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잔디밭에서 기름 탱크 화재로 이어지기까지 18분의 시간이 있었다. 재난 방지의 골든타임이었다.

그 시간 동안 고양저유소 직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것일까? 잔디밭 화재가 기름 탱크 안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방재 장치가 허술했다는 것일까? 많은 폐쇄회로티브이로 직원들이 저유시설을 상시적으로 감시하고 있었을 터인데 왜 폭발을 막지 못했을까? 이와 유사한 상황에 대비한 대응매뉴얼은 있었던 것일까? 유사 사고에 대비한 교육과 훈련은 상시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일까?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이루어졌더라면 대형화재를 막을 수 있었을 터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그래서 더욱 이번 화재에 대해 시민은 물론 전문가들도 놀라워하는 까닭이다.

화재의 시작과 기름 탱크 폭발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대한 정밀 감식과 조사가 앞으로 이루어질 것이지만 풍등과 풍등을 날린 외국인 노동자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사소한 발화에 구멍이 뚫린 근본 원인을 짚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전국 곳곳에 있는 기름 저유소와 저장소, 비축기지 등 화재가 생겼을 때 대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시설의 안전을 더욱 다지는데 밑거름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는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 사회의 고질병 : 애먼 희생양 만들기

하지만 경찰의 대응은 풍등을 날린 외국인 노동자에 엄중한 책임을 묻으려는 것으로 즉각 대응했다. 일종의 희생양 찾기이다. 풍등을 날린 외국인노동자가 인근에 저유소가 있어서 풍등이 그쪽으로 날아가 잔디밭을 태울 경우 심각한 재난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호기심으로 풍등을 날렸을 가능성이 높은데도 중대실화(과실) 혐의로 구속하려 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풍등 하나에 이런 사고가 났다면, 테러 때는?

유류저장고와 같이 화재사고를 철저히 대비해야 하는 시설이 어떻게 풍등 하나로 큰 폭발사고에 이르게 되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은데도 경찰은 이런 부분에 대한 수사 집중보다는 우연히 날아간 풍등과 이것을 날린 한 이주건설노동자에게 모든 문제를 덧 씌우려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을 도와줄 만한 사회적 배경이 별로 없는 약자에게 모든 책임을 돌린 후 시간이 지나면 적당히 마무리해버리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행히 그는 화재를 키운 저유소 직원들에 대해서는 본격 수사하지 않고 모든 것을 외국인 노동자에게 덮어씌우려 한다는 시민들의 거센 비판에 48시간 만에 풀려났다. 만약 풍등을 날린 사람이 유명연예인이었거나 국회의원, 장차관 등 고위직 인사 또는 그들의 자녀였더라면 이렇게까지 인신을 구속하려 했을까?

청와대 게시판과 인터넷, SNS 등에는 수사당국을 비난 또는 비판하는 글이 마구 올라오고 있다. 인권단체와 시민단체들도 일제히 비판하는 성명서를 내거나 주장을 펼치고 있다. 풍등을 날려 입건된 외국인노동자를 돕고 있는 단체인 '아시아의 친구들'은 성명에서 "하급직원이나 힘없는 사람에게 과도한 책임을 묻고 권력자나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은 면죄부를 주는 식의 수사와 재판은 지양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부당한 낙인찍기가 반복되지 않도록 시민사회와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우리 사회에서는 그동안 수많은 재난이나 중대사고 때 희생양 만들기를 해왔다. 이런 썩어빠진 전통은 정말 끈질기게 이어져왔다. 때론 정치권이 이 전통에 은밀하게 들어왔다. 세월호 참사 때에는 세모그룹의 유병언 회장이, 삼품백화점 붕괴 참사 때는 이 백화점 회장이 희생양 노릇을 해야만 했다. 2015년 메르스 대유행 때는 질병관리본부의 역학조사과장이 희생양 만들기 놀음에 따라 희생됐다.

때론 언론이 희생양 만들기 전파 통로, 시민이 막아야

언론도 희생양 만들기 놀음에 장단을 맞추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결국 제도의 실패, 시장의 실패, 관리(관료)의 실패를 덮는 일등공신 노릇을 한다. 언론과 사법당국 등의 희생양 만들기는 분별력이 떨어지는 시민들의 희생양 비난하기로 이어진다. 모든 분노의 화살은 이들에게 쏟아진다. 그리고 진짜 중요한 것에 대한 조사나 처벌, 그리고 개선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희생양(犧牲羊) 또는 속죄양(贖罪羊, scapegoat)은 속죄의 염소, 제물의 동물이란 뜻으로 사회·문화·심리적 희생자를 의미한다.

고대의 이스라엘인들은 속죄일에 염소를 속죄의 제물로 사용하였다. 제물인 숫염소를 잡아 그 피를 속죄판 위와 앞에 뿌린다. 그 다음 염소의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인들의 모든 죄를 고백해 염소 머리에 씌운다. 그리고 염소를 광야로 내보낸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 모든 죄가 불모지로 날아간다고 여겼다. 인간의 어리석은 생각 때문에 애먼 염소, 즉 희생양만 계속 죽임을 당해온 것이다.

희생양은 진짜 잘못을 저지른 대상을 잊히게 만들어

희생양이 지닌 가장 큰 문제는 무언가가 희생됨으로 진짜 잘못을 저지른 대상을 잊히게 만든다는 것이다. 작게는 가족 안에서부터 크게는 대중에게서까지 이를 발견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는 실업, 경제불황, 범죄 등의 사회문제에 따른 대중의 불만·공포·반감·증오를 엉뚱한 대상으로 향하게 한다. 이러한 심리적 메커니즘은 역사적으로 대중 지배의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 인종차별이나 소수집단 차별이 대표적이다. 희생양 만들기의 역사적 사례로는 중세 마녀사냥,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따위가 있다.

희생양 만들기는 재난과 사건사고 예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중대 사건사고 발생 때마다 희생양을 만들어왔지만 엄청난 충격과 손실을 준 재난이나 사건사고는 그 뒤 끊이질 않고 일어났다. 희생양 만들기는 또 다른 희생양을 만들 뿐이다. 이런 악순환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이루어져온 것이 우리 사회의 민낯이었다.

'희생양 찾기로는 교훈도 재발방지도 이룰 수 없다.'는 '아시아의 친구들'의 성명서 제목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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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주 박사는 <한겨레> 보건복지 전문기자를 지냈으며,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안종주의 위험 사회' '안종주의 건강 사회' '안종주의 위험과 소통' 연재 칼럼을 써왔다. 석면,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 등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보건 및 환경 보건 위험에 관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석면, 침묵의 살인자> <위험 증폭 사회> 등 다수가 있으며,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해 <코로나 전쟁, 인간과 인간의 싸움> <코로나19와 감염병 보도 비평>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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