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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와 포스트 민주주의

[시민정치시평] 포스트 민주주의와 참여정치

대선이 4개월도 채 남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 전망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 외에는 본선 경쟁의 후보가 가시화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거대 야당인 민주통합당이 국민참여경선제를 도입하여 다섯 후보가 나름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음에도 아직 어게인 2002를 실현시킬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이는 무엇보다 이러한 안개정국의 화룡점정이 될 안철수 변수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안철수 현상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듯하다. 첫째,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경제민주화나 복지국가론의 수용, 당명 개정 등으로 꽃단장을 하더라도, 그녀의 퍼스낼리티와 지지세력을 통해 투영된 정치의 비전은 현 집권세력의 연장에 불과하며, 이는 민주주의의 파국과 한국사회의 미래적 전망을 밝게 하지 못한다는 의견이 우리사회에 강고하게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최근의 공천헌금 파동은 미래권력이 보여줄 전주곡에 불과하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민주통합당은 박근혜에 준하는 대중적 지지를 확보할 수 있는 후보 혹은 국민들에게 설득력 있는 대안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개인 안철수에 비해 대안으로 인지되지 못하고 있다. 난립한 후보의 도토리 키 재기 식 경선은 슬로건만 난무하고 집권대안 세력으로서의 이미지를 각인시켜주는데 실패하였다.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여기에는 현대판 소피스트들에 비견되는 스핀닥터들(정치평론가, 여론전문가, 교수 등 정치PR전문가)이 정치여론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저술출판과 TV출연으로 미디어정치에서 가시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안철수는 오히려 그러한 점에서 현대미디어 정치의 흐름을 잘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안철수에 대한 지지는 서유럽 국가에 비해 정당정치의 기반이 훨씬 약한 우리나라에서 보다 급진적으로 진행된 포스트 민주주의로의 변화 속에서 표출된 대중적 반응이라는 점이다. 이는 첫 번째 요인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중요한데, 왜냐하면 포스트 민주주의적 현상은 탈정치화, 경제적 효율성에 대한 높은 기대, 정치적 의사결정권과 책임에 대한 위임 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기성 정치에 신물이 난 대중은 참여를 통해 정치권력을 재창조하기 보다는, 안정적으로 국가를 관리하면서 경제적 성과를 내주는 대리인에게 투표를 통해 5년 동안 자신을 관리해주기를 위임하고자 하는 것이다. 구체적 인물과 조건은 다르지만, 엄밀히 말해서 5년 전 이명박 정부를 출범시켰을 상황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도덕적 가치가 그때보다 좀 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포스트 민주주의개념을 창안해낸 콜린 크라우치는 정치적 엘리트들이 국정수행과정에서 국민의 소리를 경청하였던 민주주의 시대와는 달리,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에서 그러한 목소리는 약해지고, 대신 거대 기업과 정치 계급의 영향력이 강고해지면서, 시민대중은 조작가능하고, 수동적이며, 기껏해야 부분적인 정치 참여자의 지위로 떨어졌다고 분석한다. 그는 동시에 포스트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불가피한 엔트로피로 인해 계속 상승한다고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크라우치는 우선, 정치 이슈의 높은 복합성(즉, 전문성), 글로벌 자본주의의 발전과 민주주의발전의 불일치, 산업노동자계급의 몰락과 분절화되고 조직화되기 힘든 서비스 프롤레타리아트의 등장을 주요 이유로 들면서, 포스트 민주주의로의 변화의 핵심은 결국 기업의 정치권력이 증대하고, 이들의 시장지위를 강화시켜주는 권력의 판매자로서 정치가 및 정치정당의 역할이 변형되었음을 강조한다. 한국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21세기 한국의 사회경제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FTA를 통한)통상국가론은 수출의존형 국가의 국익론으로 변형되어 촛불이 꺼진 지금 FTA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선택 없는 대안으로 인지되고, 미약하게나마 언론의 관심을 받은 한진중공업, 쌍용차 등에서 폭압적으로 진행된 구조조정 외에도 대한민국에서는 수많은 젊은이들과 중장년층이 서비스 산업에서 일용직을 전전하지 않으면 생존의 나락에서 떨어져나갈 위험에 놓여 있다. 이들에게 정치는 사치스러운 행위가 될 수도 있다.

반면, 삼성공화국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재벌권력은 1997년 금융위기 이후 꾸준히 강화되었고, 현정부 아래서만 발생한 영일대군, 방통대군을 비롯한 대통령 측근의 일련의 기업유착형 부정부패는 기업집단이 정치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을 현미경처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국민들은 민주정부 10년도 기업과 정치권력의 유착과 부패로부터 결코 자유롭지는 않았음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정치와 기성정당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그 결과는 정치적 무관심, 낮은 투표율과 정치참여, 민주적 운영보다는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맹목적 동경으로 표출되었다. 언젠가부터 한국사회에서는 비민주적 전문가/자문가 집단이 중앙 및 지방정부의 정치적 PR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이들이 정치 마케팅을 좌지우지하기에 이르렀다. 각종 방송매체에 등장하는 스핀닥터들은 정치 어젠다를 구성하고, 심지어 각종 정치적 사건 및 스캔들과 주요 사회경제적 이슈를 관리하는 역할도 자임한다. 증세와 기업인 비리척결의 문제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국제경쟁 및 신용악화에 대한 경고, 정치인 비리의 양비론 등은 시민들에게 익숙한 레토릭이다.

포스트 민주주의 현상은 사회적 이슈의 정치화, 효율성 위주의 정치에 대한 통제, 노동조직과 시민사회 단체에 대한 신뢰처럼 87년 체제에서 노동ㆍ사회운동이 추구한 참여적 정치혁명이 거둔 일정한 성과와는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그러나 우리는 포스트 민주주의로의 변화를 단지 참여적 정치혁명의 대립물로 볼 필요는 없다. 탈정치화와 권력의 위임화 현상 속에도 다수의 시민은 정치, 행정, 경제 등과 같은 사회 시스템의 불합리성, 조직화된 이익집단, 미디어에 의해 포장된 포퓰리즘(일례로 개발국가론의 환상)으로부터 개인과 공동체를 방어하려는 열망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시민은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과거보다는 훨씬 높은 품격과 정당성, 정치적 의사결정의 분배를 요구하고 있다. 인물중심의 대선은 여전히 정치의 효율성과 결과중심(output)의 정당성에 대한 기대를 반영하고 있으나, 경제적 측면에서는 단기적으로 비효율적이라도 대안을 염두에 둔 입력(input)중심의 정당성에 대한 요구가 우리사회 속에서 일정하게 싹트고 있다. 비록 수동적이나 각종 이익집단과 정당의 결탁에 대한 시민의 감시는 여전히 매섭고, 자율적 주체의 모습은 과거보다 약해졌을지라도 공공성의 영역에 대한 시민의 기대와 저항의 조직화는 언론에 투영된 모습보다 굳건하다. 촛불시위나 희망버스에서 보여주었듯, 정의와 평등,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의 기본적 열망은 소비사회의 조건 속에서도 끈질기게 표출되고 있다. 따라서 생태친화적이고, 평화적인 공동체의 삶은 단순히 시민사회의 구성적 조각모음(patchwork)이 아니라, 대안적 삶의 프로그램으로서 정치적으로 조직화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열망은 포스트 민주주의의 조건 속에서 다시 참여정치의 공간을 확보함으로써 실현이 가능하다. 시민사회운동은 그러한 참여정치의 활성화에 마중물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사회의 정치는 인물과 슬로건 중심의 정치가 가져올 환상을 깨고, 국가권력의 획득과 무관하게 민주주의를 지속가능한 열린 프로젝트로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대선이 사회운동의 역동성으로부터 정당정치의 정상화를 만들어내는, 한국정치의 역동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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