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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론, 통일론, 연합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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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론, 통일론, 연합론

[프레시안 창간 17주년 심포지엄] 최원식 교수의 발제에 대하여

1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프레시안> 창간 17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최원식 인하대학교 명예교수가 '동아시아 평화 공동체'라는 주제로 발제를 했다.

최 교수는 남과 북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상태"인 '남북 연합론'을 제시했다. '남북 연합'이란 '일국가 이체제'도 아닌, '이국가 체제'도 아닌 상태다.

최 교수는 "남북 연합론과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새로 상상하는 것 또한 함께 간다"고 말했다. 동아시아 공동체는 구상하기 위해서 최 교수는 "한반도, 동아시아의 눈으로 세계를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최 교수의 발제와 관련해 김기협 역사학자가 여러 토론 거리를 던져줬다.


1. ‘동아시아’는 어디인가?

최 교수는 동남아시아를 배제한, 동북아시아만을 염두에 둔 ‘동아시아’의 설정에 우려를 표합니다. “우리 안에 내장된 동북아시아 중심주의”가 “패권적 동아시아주의로 경사될 위험”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패권주의에 대한 경계심에는 공감하지만, 굳이 ‘동아시아’의 관념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인간의 정체성에는 동심원과 같은 여러 겹의 정체성이 겹쳐집니다. 개체로서의 “나”를 중심으로 가족. 지역사회, 국가. 민족, 문명권, 인류의 일원으로서 정체성이 포개져 있지요. 이 다중성의 인식이 패권주의의 극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까운 사람은 가깝게 인식하고 먼 사람은 멀게 인식하는 것이, 모든 사람이 똑같이 가깝다고 우기는 것보다 원만한 사회관계를 위해 바람직한 자세일 것입니다.

한중일 3국은 유교-한자 문명전통을 공유하는 각별히 가까운 사이입니다. 이슬람교 힌두교 전통이 우세한 동남아시아 지역과는 꽤 거리가 있지요. 베트남도 유교-한자 문명권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베트남 전통의 전부도 아니고 그 존재가 동남아시아 문명권의 성격에 큰 몫을 맡는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근대사의 서세동점 상황 속에서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는 크게 다른 경험을 쌓아 왔기 때문에 지금 서 있는 위치와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ASEAN이 실험해 온 국제관계의 원리 중에는 배울 만한 것이 많습니다. 다문화사회를 오랫동안 운영하는 가운데 빚어진 원리일 것입니다. 그 좋은 것을 열심히 배우며 +@의 손님 노릇을 잘 하면 됐지, 한 식구가 되어야겠다고 들러붙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유럽연합의 원리에서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는 것처럼 아세안에서도 배울 것이 있으면 잘 배우되, 비교적 가까운 친척인 만큼 공유할 것이 꽤 많으리라는 기대감 정도를 가지면 되지 않을까요?

2. 양국론, 통일론, 연합론

남북관계의 큰 변화를 앞두고 그 좋은 성과를 바라보기 위해 남-남 갈등의 극복이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양국론-통일론-연합론의 분기도 남-남 갈등에서 비롯하는 것이지요.

남-남 갈등의 원인을 이해관계의 차이와 정서의 차이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이해관계라면 분단체제 하의 기득권층이 분단 상태에 집착하는 문제이므로 척결의 대상임이 분명합니다. 반면 정서의 차이는 자연스러운 인정의 발현이므로 존중해 마땅합니다. 그래서 반동적 기득권층이 정서의 차이를 과장해서 자기네 주장을 분식하는 데 이용하는 일이 많습니다.

정서의 차이는 무엇보다 세월에서 오는 것입니다. 70년 전의 분단은 뼈를 부러트리고 생살을 찢는 폭력이었지요. 무조건 합치는 것만이 회복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70년 동안 아물 만큼 아물어, ‘정상국가’가 못 되는 ‘장애국가’로서라도 그럭저럭 살아가게 되었지요. 70년 전을 많이, 깊이 기억하는 세대와 적게 기억하는 세대 사이에 정서의 차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정서의 차이는 앞으로 실천과 경험을 통해 많이 해소될 것입니다. 평창에서도 젊은 세대가 새로운 경험을 통해 새로운 감흥을 일으키는 장면이 많았습니다.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에 대한 반응의 변화가 단적인 예이지요. 진행되는 상황 전개에 따라 많은 새로운 경험이 닥칠 것이고 그에 따라 정서의 차이가 많이 줄어들 것을 기대합니다.

통일론과 양국론은 극단적이고 확정적인 입장인 반면 연합론은 중도적이고 가변적인 입장입니다. 확정적 결론을 서두르기보다 연합론을 통해 다음 세대가 이제부터 새로운 경험을 더 쌓은 후 다음 단계에서 선택할 여지를 많이 남겨주는 것이 지금 단계에서 우리에게 타당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3. 원교근공과 근교원공

최 교수는 “근교원공이든 원교근공이든 이들은 다 패도시대의 부정적 유산”이라며 ‘근교원교’를 제창합니다. 지금 세상이 ‘패도시대’를 이미 벗어나 있으니 그런 유산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닌 것 같고, 그를 벗어나기 위해 유산을 던져버리자는 뜻 같습니다.

유산의 파기가 시대 극복을 위해 효과적인 길이 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러나 파기하겠다는 유산이 극복할 시대의 본질을 담은 것인지 잘 살피지 않으면 더 큰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겠습니다. ‘원교근공’이 패도시대의 특징임은 분명하지만, 과연 ‘근교원공’도 그런 것일까요?

범수가 ‘원교근공’을 들고 나오기 전에 ‘근교원공’이란 이름의 정책이 존재한 것이 아닙니다. ‘원교근공’에 대비해서 종래의 정책 기조에 이름을 붙인 것뿐이죠. 아마 최 교수가 제시하는 ‘유원능이’의 원리가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었겠지요. 이 원리를 뒤집기 위해 ‘원교근공’이 나온 것이고요. 내가 ‘근교원공’을 이야기하는 것은 ‘원교근공’에 대비시켜 알아듣기 쉽게 한 것일 뿐, ‘유원능이’가 더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원능이’는 ‘원교근교’와 다른 것입니다. 가까운 자와 먼 자를 대하는 태도에 차이를 두는 것이죠. 이 차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유기론적 세계관입니다. 근대세계를 휩쓴 원자론적-기계론적 세계관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상정함으로써 ‘패도시대’를 가져왔습니다. ‘원교근교’를 주장하는 사해동포주의(cosmopolitanism)는 패권주의에 대한 즉물적 반발일 뿐이지 유기론적 세계관에 접근하는 길이 못 되기 때문에 패도시대의 극복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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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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