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대법관 전원이 여성이라면?"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대법관 전원이 여성이라면?"

[시민정치시평] 대법원 구성의 다양성은 왜 중요한가?

4명의 대법관 후보들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끝났다.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의혹, 저축은행 비리혐의자와의 관계 등으로 인해 어느 때 보다도 소란스러웠던 청문회였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몇 년마다 한 번씩 선거를 통해 선출하고, 그때마다 온 국민들의 관심이 선거에 집중된다. 그러나 국가권력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는 대법원을 어떻게 구성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 않다. 관심을 가진다 하더라도 대통령이 임명하는 대법원장이나, 대법원장이 추천권한을 가지고 있는 대법관의 임명과정에 일반 국민들이 관여할 방법도 없다. 일반 국민들로서는 대법관이 누가 되든 일상적인 삶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대법원 구성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법원 구성의 다양성이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는 대법원이 국가권력의 한 축인 사법부의 최고기관이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을 입법. 행정. 사법으로 나누어 국회, 정부, 법원에 분담시키고 서로 견제.감시하게 함으로써 국가권력의 자의적인 행사를 방지하고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것이 권력분립의 원리이다. 사법부는 국가권력 중에서 법을 해석하고 판단하고 적용하고 집행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사법부의 기능은 본질적으로 법이 무엇인가를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수의 요구에 반드시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다수의 요구에 따라 판결을 하게 되면 소수자의 권리보호에 치명적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많은 사람들이 혐의를 의심할 경우, 다수의 요구에 따라 재판을 한다면 법관은 증거가 없어도 이 사람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여야 한다. 이렇게 되면 무죄추정의 원칙은 설 자리가 없게 된다. 만약 선거를 통해 선출된 법관으로 사법부를 구성한다면,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서 판결을 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게 된다. 따라서 선거를 통해 사법부를 구성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 영화 <부러진 화살>의 한 장면. ⓒ부러진화살
정치적으로 다수의 요구에 반드시 부응할 필요가 없는 사법부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수의 권리를 보호하기에 가장 적합한 권력이다. 사법부의 독립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도, 사법부의 독립이 보장되어야만 법관이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할 수 있고, 이러한 재판을 통해 소수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법부의 최고기관인 대법원을 구성함에 있어서는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의 경험을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들로 일정비율을 채우는 것이 권력분립의 본래 취지에도 맞는다.

그러나 현재 대법원은 매우 동질적인 법률가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에 추천된 대법관 후보 4명도 모두 남성이고 50대 이상이며, 판.검사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보수언론에서조차 이번 대법관 추천이 다양성을 갖추지 못하였다는 비판을 할 정도이다. 이러한 대법관들로 구성된 대법원의 판결이 과연 우리 사회의 소수자, 사회적 약자들의 경험과 이해를 반영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람의 상상력은 그 사람이 속한 시대, 사회적인 상황, 개인적인 경험,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의 가치관을 벗어나기 어렵다. 소수자로서의 경험을 전혀 하지 못한 사람에게, 소수자로서 차별받는 것이 어떠할지 상상해 보라고 주문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경험과 배경, 가치관 등을 반영할 수 있는 대법관들로 대법원을 구성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서열이나 기수 중심의 대법관 인선 방식을 뛰어넘어 여성, 진보적 성향의 법관, 노동법 전문가 등 사회의 다양성을 반영할 수 있는 인물들로 대법원을 구성했던 2005년 이후 판결을 분석해 보면, 그 이전 시기의 대법원에 비해 더 많은 전원합의체 판결과 더 많은 소수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특히 사회적 약자, 소수자 인권과 관련된 사건에서 대법관들 사이에 의견을 달리하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났다고 한다. 이는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가 이루어낸 작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나온 판결 중에는 젠더과 관련된 몇 개의 의미 있는 판결들도 눈에 뜨인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이다. 성전환 수술을 하여 외모도 여성이고 본인 스스로도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성폭행을 당했다. 형법에서는 강간죄의 객체를 여성으로 한정하고 있기 때문에, 피해자의 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과거 유사한 사건에서 성염색체를 기준으로 볼 때 피해자는 여성이 아닌 남성이고, 따라서 강간죄가 성립할 수 없다는 판례가 있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러한 판례를 변경하여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사회적인 요소 등을 고려하여 볼 때 피해자는 여성으로 보아야 한다는 판결을 선고했다. 사회적 소수자인 성전환자의 고유한 성정체성을 인정한 것이다.

피해자가 물리적으로 반항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 주변 상황, 피해자의 심리.정신적인 상태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항거불능'의 상태에 있었는지 판단해야 한다며 정신지체 피해여성에 대한 강간죄 성립을 인정한 판결도 있었다. 피해자가 죽을 힘을 다해 물리적으로 반항할 것을 요구하던 과거의 대법원 판결과는 다른 입장을 취한 것이다. 이외에도 여성도 종중의 구성원으로서 종중재산의 분할을 받을 수 있다는 판결이나 장남이 우선적으로 제사를 승계해야 한다는 종래의 관습이 양성평등에 반한다는 판결 등 여성의 삶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의미 있는 판결들이 많았다.

이러한 판결들은 대법원 구성의 변화가 세상의 변화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대법원의 판결은 하급심의 판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뛰어 넘어서, 사람들의 의식에도 일상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대법원의 구성에 있어 국민들의 다양한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대법원을 퇴임한 전수안 대법관은 판사들의 한 연구모임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성으로 태어난 것도 재판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하면서 '남성 법관들로만 구성된 법원에서 여성 법관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체험해 오는 동안 자연스럽게 비슷한 처지의 사회 내 소수자 계층, 소외된 주변 계층의 처지에 눈 돌리게 되었고, 우리 사회의 통념적 사고와는 다른 관점,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 보는 것에 익숙해지게 되었다'는 소회를 밝혔다고 한다. 대법원의 구성에 있어 성별 균형을 고려하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성별 균형만으로 대법원 구성의 다양성이라는 과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차별의 경험, 소수자로서의 경험을 가진 여성법관들이 대법원의 구성원으로 참여함으로써 사법부의 변화에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언젠가 여러분이 전체 법관의 다수가 되고 남성법관이 소수가 되더라도, 여성대법관만으로 대법원을 구성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는 전수안 대법관의 경고를 깊이 새겨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