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이후 미국의 대북정책, 특히 핵 문제 대처와 관련해 반드시 주목해야 할 패턴이 있다. 미국이 중국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낄 때, 어김없이 북핵 문제를 과장하고 강경하게 대응해왔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 이에 대한 실증적 해설은 <핵과 인간> 참조)
대표적으로 세 가지 사례만 들어보자. 먼저 199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당시 미국은 세계적인 탈냉전 분위기에 따라 주한미군도 대대적으로 감축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펜타곤은 중국의 부상에 대비해 대규모의 주한미군 주둔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북한의 핵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중단키로 했던 '팀 스피릿' 훈련 재개를 밀어붙였다.
이러한 강경책의 이면에는 21세기도 "미국의 세기"로 만들기 위해서는 경쟁자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는 중국을 군사적으로 견제·봉쇄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이 강하게 깔려있었다.
둘째는 2000년대 초반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명명하고는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해 미사일 방어체제(MD) 및 한미동맹 재조정과 미일 동맹 일체화를 추진했다. 그리고 이를 위한 가장 큰 구실로 '북한위협론'을 들고 나왔다. 호시탐탐 "제네바 합의를 깨부술 해머"를 찾던 부시 행정부는 실체가 불분명한 고농축 우라늄 의혹을 이유로 제네바 합의를 파기해버렸다.
셋째는 오바마 행정부 때 일이다. 미국이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에 허덕이고 금융위기의 늪에 빠진 사이에 중국은 급격히 부상했다. 그러자 오바마 행정부는 2009년 말부터 대북정책과 관련해서는 '전략적 인내'로 후퇴했고 중국을 겨냥해서는 '아시아 재균형 전략'을 추구했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 고도화로 응수하자 사드 배치와 더불어 한미일 삼각동맹도 본격 추진했었다.
소련의 몰락과 중국의 부상이 교차하면서 단일 패권을 공고히 하고자 했던 미국은 중국에 대한 경계심을 꾸준히 가져왔다. 하지만 대놓고 중국봉쇄론을 말하는 것은 꺼렸다. 양국의 이해관계가 밀접히 연관된 상황에서 중국을 적대국으로 취급하는 것은 미국에도 상당한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북한위협론을 '꽃놀이패'로 이용했었다.
그런데 2017년 하반기 이후 이러한 20여 년간의 패턴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먼저 '말이 씨가 된다'고 북한은 실제로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 구비의 문턱까지 도달했다. 이로 인해 미국은 더 이상 북한에 대한 '전략적 인내'를 지속하기가 어려워졌다.
또한 미국은 2017년 12월에 발표한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국제질서의 현상변경을 추구하는 수정주의 국가들"로 못 박았다. 냉전 종식 이후 이 표현이 미국의 국가 문서에 등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미국의 관성에 비춰볼 때, 대북 협상과 대중 봉쇄는 어울리는 짝이 아니었다. 하지만 북한의 핵탄두 장착 ICBM 보유 저지는 당면 과제였고, 중국 견제는 전략적 과제였다.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의 핵탄두 ICBM 제한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자 중국 견제 및 봉쇄 쪽으로 빠르게 방향을 전환했다.
이게 우연의 일치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북미 정상회담 이후 미국의 대북정책이 일방적이고 강경하게 변하고 있는 것과 미국이 중국을 상대로 무역전쟁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시기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 주석을 대하는 태도도 180도 달라졌다. 그는 북미정상회담 성사를 두고 "내 친구 시 주석의 큰 도움을 잊지 말라"며 "그가 없었다면 (북미관계는) 더욱 길고도 험난한 길이 되었을 것"이라고 중국의 역할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북한이 미국에 불만을 표하거나 북미협상에서 트럼프 자신이 만족할 만한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그 책임을 중국에 전가하는 화법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8월 24일 폼페이오 방북 취소의 이유로 중국과의 무역 전쟁을 예로 들 정도로 말이다.
이러한 상황 전개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최근 미국이 북한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 배경에는 미국이 '중국몽'을 꺾기 위한 전략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은 미중 무역전쟁과 한반도 문제는 별개라는 입장을 분명히 해왔지만, 미국은 이 두 가지를 연계시키면서 북한과 중국을 동시에 압박하고 있다. 이를 통해 트럼프는 비핵화가 지지부진한 책임을 중국에게 전가하면서 '중국에 강력하게 대처하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적반하장에 가까운 것이다.
기실 미국이 진정으로 비핵화를 원한다면, 그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북미 공동성명에 나와 있는 것처럼, 양국이 합의한 사항을 "철저하고 신속하게 이행"하면 된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미국의 관성과 강하게 충돌하게 된다.
"새로운 북미관계의 수립"과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 그리고 "완전한 비핵화"는 미국이 수십년간 꽃놀이패처럼 이용해온 '북한위협론'의 소멸을 의미한다. 이는 곧 사드를 비롯한 전략자산은 물론이고 주한미군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도 의문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미국의 관성적이고 전략적인 우려는 미국이 종전선언을 꺼리는 이유를 너무나도 잘 설명해준다. 종전선언은 비핵화를 추동하게 되고 이렇게 진전된 비핵화는 평화협정을 수면 위로 올려놓게 될 것이다. 이는 곧 정전체제를 이유로 미국이 오랫동안 누려왔던 군사전략적 기득권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미국은 '중국몽'을 수정주의로 간주하면서 중국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무역전쟁은 단순히 양국 사이의 무역 불균형을 시정하는 차원을 넘어 중국의 부상을 아예 억제하겠다는 뉘앙스마저 풍기고 있다. 미국은 인도-태평양 구상에도 박차를 가하면서 대만과의 관계도 강화하고 있다. 국방비도 사상 최대 규모로 끌어올리면서 중국에 '우리와 군비경쟁에 붙어보려면 불어봐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강수는 중국의 대미 전략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시진핑 정권은 '신형대국관계'를 주창하면서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지지 말자는 메시지를 미국에 보낸 바 있다. 미중 간 충돌은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니고 양국이 경쟁을 하면서도 협력을 강화해 공동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강공 드라이브를 걸수록 중국의 전략도 달라질 것이다. 중국 내에서 '결국 미국은 우리의 적이다'라는 인식이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중 관계의 적대적 원심력이 강해질수록 남북한은 우호적 구심력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이렇게 해야 북미 관계와 미중 관계 악화가 한반도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다. 지금은 남북한 모두 미국을 바라보면서 후퇴할 때가 아니라 9월 남북 정상회담을 포함한 합의 사항의 이행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야 할 때이다. 이게 판문점 선언의 진수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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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
wooksik@gmail.com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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