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취소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우리는 한반도 비핵화 측면에서 충분한 진전을 이루고 있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무역에 관한 훨씬 더 강경한 입장 때문에 중국이 예전만큼 비핵화 과정을 돕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그러면서 "폼페이오 장관은 가까운 미래에 북한에 가기를 고대하고 있다. 아마도 중국과의 무역 관계가 해결된 뒤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김정은 위원장에게 따뜻한 안부를 전하고 싶다. 곧 그를 만나기를 고대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트럼프의 갑작스럽고도 변덕스러운 결정과 관련해 폼페이오의 '빈손 방북'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압도적으로 많다. 특히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해 가시적인 진전을 거두지 못할 가능성을 경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외교에는 공짜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폼페이오가 빈손으로 가면 빈손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즉 비핵화의 진전 여부는 북미 공동성명의 합의 내용 가운데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및 "평화체제 구축"과 관련해 미국이 어떤 성의를 보일 것인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는 대북 제재는 비핵화할 때까지 유지하겠다고 하고 종전선언도 꺼리고 있다. 사실상 미국이 '선(先) 비핵화' 요구로 회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태도는 북미 정상회담 전후와 비교할 때 분명 달라진 것이다. 먼저 트럼프는 북미정상회담 이전에 대북 제재와 관련해 "비핵화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그러나 최근 폼페이오 등 고위급 관료들은 대북 제재는 북미 공동성명과 별개라며 비핵화가 "이뤄질 때까지", "혹은 완료될 때까지" 유지할 것이라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비핵화 합의와 완료는 엄연히 다르다는 점에서 미국이 대북 제재 완화 및 해제의 기준을 높인 것이라는 분석을 가능케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종전과 관련해서도 트럼프는 "축복"이라고도 했었고, "70년 가까이 이어져 온 한국전쟁을 끝내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7월 이후부터는 종전선언에 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거나 시기상조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미국의 진정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표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급한 용무는 봤으니
그렇다면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태도가 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한반도 비핵화가 생각처럼 간단치 않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현실 인식'이 있을 수도 있고, 흥행 요소가 많이 떨어졌다는 트럼프의 '흥미 반감'이 원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이유들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세 가지 차원에서 분석해볼 수 있다. 미중관계 요인은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하고 먼저 미국의 대북 인식의 측면을 살펴보자.
하나는 미국이 '급한 불'은 껐다고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급한 불은 북한의 핵탄두 장착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보유를 의미한다. 지난해 1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신년사에서 "ICBM 시험발사 준비 사업이 마감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밝혔고,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있었던 트럼프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트위터를 날렸다.
하지만 김정은은 핵탄두 ICBM 과시를 향해 폭주를 거듭했고 지난해 11월 29일에는 사거리 1만km가 넘는 '화성-15형'을 발사하기도 했다. 그러자 미국 정부기관들은 북한의 ICBM 보유가 "수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런데 올해 8월 들어 미국의 평가는 달라졌다. 폴 셀바 합참차장은 8월 10일에 "북한은 I(CBM의 신뢰도를 높이는 데 필요한 마지막 두 가지 기술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게 우리의 평가"라고 말했다. "북한이 신뢰할 만한 재진입체를 시연하는 것을 보지 못했고, 폭발시키고 싶을 때 실제로 폭발하는 시스템을 가능하게 하는 신뢰할 만한 장전, 격발, 신관 시스템에 대한 시연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북한의 ICBM의 성능이 그리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며 북한이 실제로 발사해도 "우리는 그 미사일을 격추하지 않는 결정을 할 수도 있다"고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이처럼 미국의 북한 위협에 대한 판단이 수개월 사이에 뒤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은 "북한의 미사일 실험 중단이 ICBM 완성을 막은 것으로 보인다"는 셀바의 진단에서 찾을 수 있다.
ICBM 개발 초기 단계에 있었던 북한은 그 신뢰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수차례에 걸쳐 추가적인 시험발사가 필요했었다. 하지만 북한은 올해 들어 "새로운 전략 노선"을 채택키로 하면서 ICBM 시험발사를 중단키로 했다.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와 더불어 서해위성발사장에 있던 미사일 엔진시험장도 해체했다. 북한의 이러한 선택에는 새로운 북미관계에 대한 기대감도 반영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국은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급한 용무는 봤다고 여긴 탓인지, 북한을 대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태도가 북미정상회담 이전으로 되돌아갈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 측 태도 변화의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라면 앞으로의 상황은 대단히 복잡해지고 또한 어려워질 수 있다.
또 하나는 트럼프가 김정은의 약점을 잡았다고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약점이란 트럼프가 김정은이 경제발전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를 압박 수단으로 동원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전후해 자취를 감추었던 "최대의 압박" 발언이 최근 부쩍 늘어나고 미국이 대북 제재의 고삐를 또다시 당기고 있는 것도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이처럼 미국이 "최대의 압박" 모드로 되돌아간 데에는 '이제야말로 대북 제재가 통할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북한은 4월 20일 노동당 결정서를 통해 경제발전에 올인하겠다고 다짐했다. 트럼프와 폼페이오도 김정은과의 만남을 통해 북한 정권이 경제발전과 인민생활 향상에 얼마나 큰 열정과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했다. 또한 북한의 시장화가 크게 진전된 반면에 작년의 북한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3.5%로 뒷걸음쳤다(한국은행의 추정치)는 보도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볼 때, 미국이 북한에 '핵을 포기할래, 경제난을 감수할래'라는 식의 양자택일을 강요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도 얼핏 보면 무리가 아닐 수 있다. 실제로 대북 제재가 유지되는 상황에선 북한의 경제발전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할아버지나 아버지보다 경제발전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김정은도 큰 부담을 느낄 수 있다.
김정은, 트럼프에 대한 신뢰 접을까?
향후 한반도 정세의 관건 가운데 하나는 폼페이오 방북 취소를 비롯한 미국식 일방주의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다. 얼마 전까지 북한은 미국에 불만을 쏟아내면서도 트럼프를 향해선 '당신만은 믿는다'는 식의 메시지를 줄곧 보냈었다. 그런데 폼페이오 방북을 취소한 당사자가 바로 트럼프이다. 무엇보다도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덕담(?)을 보내면서도 정책적으로는 북한을 더더욱 압박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언행불일치인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려되는 것은 북한이 미국에 대한 신뢰를 접고 또 다시 북한식의 최대의 압박으로 회귀할 가능성이다. 북한은 미국이 북미 정상회담과 공동성명에 동의한 배경에는 북한이 미국도 무시하지 못하는 "전략 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핵탄두 장착 ICBM은 그 유력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북한이 핵탄두 ICBM의 능력을 제한하는 조치들을 취하자 미국은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마도 북한은 미국이 진정 새로운 북미관계를 수립하고 한반도 평화체제와 비핵화를 이루려고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또다시 품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대미 전략을 둘러싸고 고심하고 있을 것이다. 고심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다만 '미국이 대화를 중단하고 대북 적대시 정책으로 되돌아갔다'며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 발사 유예 선언을 번복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러한 퇴행적인 선택은 미국의 '최대의 압박'에 힘을 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정상회담을 포함한 남북한의 합의 사항을 착실히 이행하면서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 의지를 더더욱 다져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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