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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단의 거목은 그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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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단의 거목은 그러지 못했다

[민교협의 시선] 미투운동(MeToo)이 가야할 길

지난 1월 28일 8여 년 전 자신이 법무부 간부로부터 당한 성추행을 폭로한 서지현 검사의 행위는 한국 사회에도 미투 운동을 촉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2017년 <뉴욕타임스>가 헐리우드의 유명한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이 30여 년 동안 저지른 성추행을 보도하면서 이 기사에 대해 SNS 상에 'MeToo'라는 해시태그가 붙으면서 "나도 당했어"라는 반응으로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이 겪었던 피해를 고백하는 운동이 시작되었고, 금년 들어서는 한 여성 검사의 폭로로 한국 사회에서도 그것이 확산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미투’(MeToo)에 대해 ‘위드유’(WithYou)로 응답하는 것은 성폭력이 우리 일상에서 먼, 은밀한 곳에서 극소수의 파렴치한 인간들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각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집권당의 차기 대선 후보로 급부상하고 있었던 진보 정치인 안희정의 여비서 김지은 씨의 폭로, 한국문단의 거목인 고은 시인에 대한 후배 시인 최영미 씨의 고발의 경우처럼 권력을 가진 유명인들에게서만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성희롱이나 가벼운 성추행은 더더욱 우리 가까이에 있다. 미투 운동은 성폭력이 성적 매력이 강조되는 연예계나 혹은 남성 권력이 강한 위계 조직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정치계, 문화계, 언론계는 물론 교육계까지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고 우리의 일상 속에 퍼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통계를 살펴보면,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가의 성폭력의 발생률도 심각하다. 한 국회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국내 대학에서 적발된 성폭력 사건은 320건으로 조사됐다. 이 가운데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난 성폭력은 214건, 교수가 가해자인 경우는 72건, 교직원(24건), 강사(9건), 조교(1건) 순이었다. 2013년 35건이었던 성폭력 사건은 이후 매년 증가해왔으며 지난해엔 107건으로 늘어났다. 대학 내에 성폭력 예방 시스템을 마련하려는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학에서 성폭력 사건은 늘어가고 있으며 성희롱 사건도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한 여성 검사의 성추행 폭로로 시작된 미투운동의 바람은 금년 봄 학기 개강과 함께 대학가에도 어김없이 불어 닥쳤다. 이화여대 예술대학과 음악대학을 비롯하여 한국예술종합학교, 한양대학교 등등 이름을 거론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대학에서 피해 학생들이 전현직 교수들의 폭력을 고발하는 행위들이 봇물처럼 터졌다. 물론 선후배들 사이에 발생하는 피해도 많았다. 이것을 지켜보며 필자에게 드는 중요한 질문은 두 가지이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겪은 성범죄의 피해를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침묵하고 살아 왔을까? 대학 안에서 폭로되는 갖가지 형태의 성폭력에 대해 교수들은 진정으로 ‘위드유’로 응답하고 있는 것일까?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하지 않다. 피해를 겪은 학생들이 그것을 부당한 폭력으로 인지하기까지 계몽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발설’하는데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가 진정성을 믿고 공감해주지 않으면 폭력의 피해자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는 공감을 얻기는 고사하고 별 것 아닌 일로 공동체의 분위기를 깨는 이상한 사람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이른바, 2차 피해 때문이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교수들과 학생들 간의 인식의 격차에서 찾아야 한다. 젠더 의식 면에서 앞서가는 학생들에 비해 교수들의 의식은 한참 뒤져있는 것이 아닐까? 교수들 사이에도 성별이나 세대에 따라 젠더 감수성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교수들 중 상당수가 가벼운 성추행이나 성희롱을 흔히 범할 수 있는 인간적인 실수로 가볍게 여기는 데 비해, 학생들은 엄중하게 다루어야 할 폭력으로 인식한다.

대학 내에서 발생한 교수 학생간의 성폭력 사건, 특히 그것이 가벼운 사건일수록 교수들 상당수가 가해자의 편에서 상황을 이해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학생들의 피해에 공감하고 공적으로 지지를 표하는 행위조차도 교수 사회의 분열을 초래하고 교수의 권위의 실추에 조력하는 사람으로 여겨질까 조심스러운 것이 대학의 지배적인 분위기이다. 학생들의 격렬한 반응이나 성폭력 근절 TF까지 구성하여 불관용원칙을 천명하고 있는 교육부의 반응에 비해 정작 대학 당국의 대응이 둔하고 느린 것도 성폭력과 성차별에 대한 교수 사회의 무딘 감수성과 관용적인 태도 때문인지도 모른다. 몇몇 대학에서는 가해자로 지목된 교수들에게 진상조사와 징계조치를 취하는 대신에 사직 처리를 하여 사건을 무마하기도 했다. 반면에, 대학 당국의 대응과 대조적으로 피해자와 연대하는 집단행동은 피해의 폭로를 차갑게 보는 일부 시선에 맞서 더욱 격렬해지고 전투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미투운동의 본질은 법적으로 처벌이 어려운 갖가지 형태의 일상 속의 성폭력과 성차별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을 요구하는 문화혁명이다. 이미 50대 후반에 들어선 최영미씨가 고은의 성추행 사실을 '고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유명 일간지에 폭로한 것은 결코 88세의 고령의 나이가 된 문단의 선배를 처벌하자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성희롱이나 성추행이 입담군, 재담가의 농담이나 천재적인 문인들의 가벼운 외도로 치부되어왔던 문단의 고질적인 성차별문화를 바꾸어 보고자 하는 열망이 최영미 시인에게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자신이 당연시하였고 그래서 기억조차 흐릿할지도 모를 행위가 이제 변화된 더 나은 세상에서 돌이켜 보니 힘없는 약자들에게는 길고 긴 시간동안 그들을 짓누른 족쇄이자 폭력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리고 진심으로 사죄할 용기를 보여주었다면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시보다도 더 깊이 감동했을지도 모른다. 사죄할 용기는 고발할 용기보다 더 크기에. 그러나 문단의 거목은 그러지 못했다.

오랜 침묵을 깨고 피해자가 자신이 당했던 폭력과 차별, 그 뿌리 깊은 성차별적인 문화를 고발하는 행위는 가해자에게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하더라도 고발자(피해자로 부르든, 생존자로 부르든) 자신에게 큰 의미를 갖는다. 그것을 통해 자신이 해방될 수 있고 나아가서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들을 지지하고 함께 해야 하는 이유, 즉, '위드유'를 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투 운동은 비록 가해자로 지목되지 않았을지라도 교육의 담당자인 교수들에게 피해에 대해 공감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성찰 할 것을 요구한다. 얼마 전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 학내 젠더 이슈를 공론화 하는 자리의 청중석에서 한 남성 교수의 고백적인 토론은 여러 청중들의 마음을 울렸다. 여학생 제자들에게 친밀감을 표현하기 위해 했던 말들이 이제 생각해보니 성희롱일 수 있었겠다. 되돌아보니 그저 묵묵히 듣기만 했던 제자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혔을 수도 있었겠다는 어느 교수의 고백은 많은 이들에게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해주었다. 다수가 자신을 성찰 할 수 있을 때, 폭력의 피해에 공감할 수 있고 피해자를 지지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힘이 가해자의 진정어린 사죄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대학에서 권력의 자원을 쥐고 있는 교수들 사이에서 피해자에 대한 ‘위드유’가 진정으로 이루어졌다면, 가해자들의 진심어린 사죄를 촉발할 수 있었을 것이고, 법적인 싸움 이전에 진심어린 사과가 앞섰다면 대학 내 미투 운동은 지금처럼 전투적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가해자에게 '진정한 사죄'를 이끌어내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수많은 피해자들은 안희정과 고은의 경우처럼 법적으로 무죄가 내려지더라도 수사와 재판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통해 억울함을 풀고자 했으며 그 과정에서 2차, 3차 피해를 겪어야 했다.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기 전에 한 안희정의 한 마디도 되새겨 볼만하다. “나의 행위가 김지은 씨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었다면 진심으로 사죄를 드린다.”는 가해자의 말은 법원 판결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성차별과 폭력이 만연한 조직 속에서 공범자일지도 모를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되돌아보게 해준 한마디임에 틀림없다.

성폭력과 성차별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대학 당국의 인식의 변화와 올바른 대처 방안을 마련하고 성차별적 대학문화를 바꿀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서는 미투 운동은 한바탕 쓸고 지나갈 쓰나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고등교육은 전문 지식의 습득뿐 만 아니라 민주적 소양 가르칠 마지막 교육 기회의 장이기도 하다. 교육현장에서의 차별과 폭력의 용인은 다른 영역에서보다 그 폐해가 크다. 폭력에 대한 관용과 그에 대한 침묵을 통해 폭력을 배우기 때문이다. 대학의 미투 운동은 일상화된 성차별의 구조적 문제를 바꾸고 대학이, 나아가서는 우리 사회가 성장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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