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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위기는 유로존의 결함 때문이다"

[시민정치시평] 진퇴양난에 빠진 유로존

유럽의 재정위기는 2009년 말 그리스의 사회당 신정부가 이전 정권이 통계 조작으로 재정적자를 숨겨온 것을 밝히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10년 4월 그리스는 유럽연합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되면서 '유로존의 혜택만을 누리고 책임을 다 하지 않는' 게으른 베짱이의 나라가 되어 국제사회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도 그리스는 과도한 복지 지출로 재정을 파탄 낸 포퓰리즘의 반면교사가 되었다.

그런데 적지 않은 경제학자들에게는 '마침내 올 것이 온 것'이었다. 이들은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 체결 시부터 1999년 유로존의 출범 때까지 화폐통합안을 끈질기게 문제 삼아왔다.

유럽연합집행위원회 의장이었던 이탈리아의 로마노 프로디는 2001년 행한 연설에서 "유로존은 다른 정책적 도구가 필요하지만, 지금은 그것의 마련이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 언젠가는 유로존은 위기에 빠져들 것"이라며 유로존의 결함을 인정했다. 2004년경부터 유로존이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는 징후들이 포착되기 시작했으며, 그 때 이미 유로존 붕괴 시나리오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일주권의 유럽연방 건설이라는 대의와 열정 속에 경고의 목소리는 묻혀버렸다.

독일 통일이 유로존 출범의 직접적 계기

유로존은 유럽합중국을 건설하려는 유럽연방주의 운동의 맥락에서 탄생했다. 하나의 유럽에 대한 이상은 16세기 르네상스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재의 유럽통합운동은 제2차 대전 중 전쟁의 원인을 민족국가의 존재에서 찾은 레지스탕스 운동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전후 유럽 정계로 진출하여 유럽통합을 주도했다.

유럽단일통화에 대한 구상은 1970년에 처음 제시되었지만, 유로존 출범의 직접적인 계기는 독일의 통일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독일에게 통일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독일통일은 유럽의 이웃나라들에게 또다시 전쟁을 연상시키는 위협으로 인식되었고, 특히 프랑스의 반대는 완강했다. 당시 서독의 콜 총리는 프랑스를 설득하기 위해 통독에 대한 승인에 대한 반대급부로 마르크화의 포기와 유럽 차원의 화폐통합안을 미테랑 대통령에게 제안했다. 미테랑 정부는 독일을 유럽단일통화지역에 묶어두면 유럽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도발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 제안을 수용했다. 유로존은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목표 하에서 냉전 이후 유럽의 국제질서를 재편하는 한편, 유럽합중국으로 한 발 더 나아가려는 유럽 정치엘리트들의 야심찬 정치적 결단의 산물이다. 그런데 유로존은 강력한 정치적 추진력에 의해 서둘러 출범하게 되면서 현 위기를 배태할 제도적 결함을 안게 되었다.

단일통화의 이론적 기초인 최적통화이론의 비현실성

여러 나라가 하나의 화폐를 사용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한 논의는 1961년 먼델(R. Mundell)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그는 ①재화 가격과 임금이 경직성이 없고, ② 노동의 이동이 신속히 이뤄진다면 단일통화지역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두 조건이 충족된다면 경제권 내의 물가와 임금 수준이 단일한 수준으로 수렴하게 되고 경기 주기가 같아지면서 완전히 단일한 경제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조건이 충족되는 경우는 매우 제한적이다. 현실 경제에서는 실업률이 높아져도 명목임금은 쉽게 하락하지 않으며, 상품 가격도 상품의 수급 상황을 즉각적으로 반영하지 않는 경우는 흔하다. 식당 메뉴판에 적힌 가격은 시장상황이 변했다고 해서 즉시 바뀌지 않으며, 가격은 기업의 전략적 선택에 의해 결정되기도 한다. 또한 노동자들은 사회•문화적 차이로 인해 외국으로의 이주를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먼델은 자신이 제시한 조건들이 비현실적이라는 점 때문에 이미 원래의 주장을 수정했다. 그는 '단일 통화는 환율변동의 충격을 흡수함으로써 나라별로 상이한 경제변수들을 수렴시키기 때문에 유로존은 최적통화지역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단일통화를 경제변수를 수렴하도록 하는 도구로서 재규정하면서 유로존 구상을 계속해서 지지했다.

유로존 출범 후 회원국 간 경쟁력 격차 심화

1999년에 탄생한 유로존은 2007년까지 외견상 성공한 듯했다. 환율의 불확실성이 사라지고 거래비용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회원국 간의 대외경쟁력 격차가 확대되면서 북유럽과 남유럽 간의 경상수지 불균형이 구조화되고 있었다.

유로존의 지지자들은 먼델의 주장대로 회원국들의 주요 경제변수가 수렴하여 회원국의 경제상황이 유사해질 것으로 기대했다. 자본 시장에서는 수렴현상이 뚜렷이 나타났다. 유로존이 출범한 뒤 아일랜드와 남유럽국가들(이하 GIIPS로 지칭)은 북유럽의 선진경제 수준으로 수렴할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가 형성되어 경제신뢰도가 크게 높아져 독일과 유사한 낮은 금리로 자본을 조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품시장과 노동시장에서는 여전히 국경의 장벽은 높았다. 시장은 통합되지 않아 가격과 임금은 수렴하지 않았으며, 특히 물가상승률은 각국의 경기주기의 영향을 받아 차별화되었다.

GIIPS 국가들은 차입비용이 낮아지자 외국자금을 활용하여 성장정책을 추진했고 경기가 활황을 띠면서 북유럽에 비해 물가수준이 높아졌다. 단일통화 도입으로 명목 환율은 사라졌지만 물가수준의 차이로 인해 회원국 간 실질 환율은 괴리되어 각국의 가격경쟁력에 영향을 미쳤다. 남유럽은 높은 물가상승률 때문에 수출상품의 가격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다. 1999년 실질실효환율을 100 (숫자가 높아질수록 경쟁력 약화를 의미)으로 했을 때 2008년 독일의 실질실효환율은 93.6, 프랑스는 97.0, 스페인은 109.2이었다.

임금수준도 괴리되었다. 임금은 노동시장의 수급 뿐만 아니라 노동정책, 조세제도 등 정책적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 독일은 통독에 따른 경쟁력 약화를 만회하기 위해 1999년부터 노동시장개혁을 단행하여, 노동조합으로부터 완만한 임금인상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2007년에는 간접세인 부가가치세를 인상하고 기업의 사회보장부담금을 줄였다. 이에 따라 독일의 단위노동비용은 유로존 10년 동안 오히려 낮아졌다. 반면에 GIIPS 국가들은 고성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임금수준은 높아졌다.

유로존 내 경상수지 불균형의 구조화로 GIIPS 국가의 파산 초래

이로 인해 남유럽과 북유럽 사이에 경상수지 불균형이 구조화되었다. 독일은 GDP 대비 경상수지 비중이 1999년 -1.3%에서 2008년 6.7%로 증가한 반면, 스페인은 같은 기간 동안 -2.9%에서 -9.7%까지 하락했다. 한편, GIIPS 국가로 낮은 금리로 많은 자본이 유입되었지만 GIIPS국가의 산업경쟁력이 취약했기 때문에 투자는 국제경쟁에 덜 노출된 부당산 및 서비스 분야에 집중되었다. 결국 유로존 10년은 회원국 간에 산업생산성의 격차가 확대되고 경상수지 불균형이 구조화되는 기간이었다.

한 나라가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상태에 있으면 부채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먼저 민간채무가 증가하고 부채가 유지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면 가계와 기업은 파산하기 시작한다. 이로 말미암아 부실채권은 누적되면 은행권이 위기에 빠진다.

GIIPS 국가의 경상수지 적자는 대규모 자본 유입에 의해 상당기간 상쇄되었다. 그리스의 경우 자본수지 적자가 1995년 GDP 대비 5%에 불과했으나 2007년에는 100%에 달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가려져 있던 문제점 일거에 드러나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는 가려져 있던 유로존의 문제점이 일거에 드러나도록 했다. 금융위기로 신용경색이 일어나자 해외투자자본이 본국으로 회귀했고 GIIPS 국가들은 해외차입의 길이 막혔다. 이를 계기로 건설부문의 거품이 붕괴하자 성장률은 마이너스로 돌아서고 세수는 급격히 줄었으며, 파산한 금융권을 구제하는 과정에서 재정은 고갈되고 국채 이자율은 치솟고 국가부채의 비중은 순식간에 위험 수위를 넘었다. 경제가 부채위기에 직면할 경우 가장 효과적인 대응책은 자국통화를 평가절하하여 수출시장을 개척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로존은 평가절하 정책의 사용을 불가능하게 하는 족쇄가 되어 있었고, 유럽의 위기는 시작되었다.

어떤 해결책이 있는가?

그리스 위기는 유로존의 결함이 가장 약한 고리를 끊고 표면화된 것이다. 따라서 유럽의 재정위기의 해법은 회원국 간 대외경쟁력 격차와 이로 인한 경상수지 불균형에서 비롯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 위기는 유로존의 결함이 가장 약한 고리를 끊고 표면화된 것이다. ⓒAP=연합
현재 유럽연합이 추진하는 긴축정책과 구제금융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긴축정책은 경제침체를 낳아 재정적자를 오히려 심화시킬 수 있으며 구제금융은 재정취약국의 파산을 지연시킬 수는 있지만 제도적 결함을 치유하는 방안은 아니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해법 중에서 이론적으로 타당한 것은 유로존 차원의 재정통합이다. 전체 경제권 차원의 자율적인 재정기구가 구성되어 있다면 지역 간 재정이전을 통해 지역경제가 평가절하라는 수단을 상실한 부문을 보상해 줄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연방제국가들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중앙의 재정지출이 전체 예산의 50%를 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유로존 GDP의 1%에 불과한 유로재정을 8~10%로 늘여야 한다.

재정통합은 조세, 재정운영 등에 대한 합의가 필요한 까닭에 구성원들의 강한 정치적 연대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유럽 정치사회에서 가장 강한 연대감을 발휘되는 단위는 개별 주권국가이다. 따라서 유로연합 차원의 재정통합은 개별 민족국가가 유럽연합으로 주권을 양도하는 민족국가의 틀을 뛰어넘는 시도다.

그러나 주권은 정치인의 합의나 법률적 규정으로 양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주권과 정치적 정체성은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서독이 재정통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민족국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서독 주민들이 동독 주민들을 위해 세금을 내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만 핀란드 국민들이 그리스 국민들을 위해 세금을 내기를 기대하기 힘들다.

재정통합은 근대 민주주의의 원칙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재정통합은 각국 행정부의 예산 편성권과 집행권을 일정부분을 유럽연합 집행부로 이관하고, 각국 의회가 예산 심의권의 상당부분을 유럽의회로 이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유럽연합과 유럽의회는 헌법 기관이 아니다. 2005년 유럽헌법은 부결되었다. 따라서 재정통합은 주권재민의 원칙을 위배된다. 유럽연방주의 운동은 늘 비민주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현재의 정치 현실에서 재정통합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진퇴양난에 처한 유로존

재정통합이 불가능하다면 유로존 위기의 현실적인 해법은 회원국들이 자국의 독립적인 통화정책과 산업정책을 펼 수 있도록 자국 화폐를 부활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그 과정이 국가 간 긴밀한 정책적 유대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새롭게 부활한 각국 화폐들의 급격한 환율 변동에 따라 강제적인 부의 이전이 이뤄지는 상상하기 힘든 혼란의 과정이 될 수 있다.

유로존은 진퇴양난에 처해 있다. 재정통합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나아가기에는 헤치고 나가야 할 정치적 역사적 장벽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회원국 화폐를 다시 부활하는 것으로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길을 떠나왔다.

유럽의 지도자들이 조만간 근본적 해법을 내놓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위기는 빠른 속도로 전개되고 있다. 유로존의 파국은 피하기 힘들 것 같다. 그리고 유럽의 파국은 세계경제의 위기를 의미한다.

우리 사회도 세계경제 위기의 도래를 가설적인 상황이 아닌 임박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한국 경제는 대외의존도가 높은데다 금융시장이 크게 개방되어 있어 현 상태에서 세계위기를 대하게 된다면 경제는 성장 동력을 상실하고 금융시장의 급변동으로 경제 불안이 심화될 것이다.

우선적인 대비책은 수출부문이 침체를 겪을 것에 대비하여 국내투자를 늘임으로써 내수기반을 서둘러 확충하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 정부의 재정상황은 양호한 상태이기 때문에 내수 기반의 확충을 위해 재정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자본유출입에 대한 규제체제를 재정비하여 과도한 자본유입을 막고 유사시 자본이동의 변동이 확대될 수 있는 여지를 사전에 제한하는 것도 필수적인 조치의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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