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바이오 산업의 규제 완화를 정부에 요구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만난 자리에서다. 김 부총리는 6일 경기도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에서 비공개 면담을 마친 뒤 "영업비밀 상 자세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바이오 산업에 있어서 몇 가지 규제에 대해 말이 있었다"라고 밝혔다. 이어 김 부총리는 "어떤 것은 전향적으로 해결하겠다고 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좀 더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날 면담에서 정부 측은 김 부총리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중소벤처기업부 차관과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 등이, 삼성 측은 이 부회장을 비롯해 윤부근 삼성전자 부회장, 김기남·김현석·고동진 삼성전자 대표이사, 노희찬·진교영 삼성전자 사장, 고한승 삼성바이오에피스 대표이사 등이 각각 참석했다.
면담에선 반도체공장 신설에 따른 추가 전력공급 방안 등 다양한 의제가 논의됐다. 그러나 고한승 삼성바이오에피스 대표이사가 제기한 바이오 산업 관련 규제 완화 요구가 면담 이후에도 논란이 됐다. 생명윤리 및 의료 공공성 등을 둘러싼 논쟁이 예상된다.
재계가 바이오(생명공학) 및 보건 의료 산업 관련 규제 완화를 요구한 역사는 뿌리가 깊다.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같은 시도가 있었고, 번번이 시민사회와 의료계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명박 정부 초기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에서 자주 나왔던 구호인 "의료 민영화(영리화) 반대"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규제는 쳐부술 원수, 암 덩어리"라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발언도 원격의료 등에 대한 규제를 향한 것이었다. 당시에도 박근혜 정부는 강한 비판을 받았었다.
문 대통령-이재용 만남 이후 의료기기 규제 완화 발표…'문재인 케어'와 상충
문재인 대통령과 이 부회장이 지난달 9일 인도에서 만난 지 열흘 뒤인 지난달 19일, 문 대통령이 직접 분당 서울대학교 병원을 방문해 의료기기 분야 규제를 파격적으로 풀겠다고 약속하면서, 현 정부에서도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연구 결과 축적이 어려운 혁신·첨단 의료기술은 문헌 근거가 다소 부족하더라도 허용"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시장 활성화를 위해 안전성 검증을 완화한다는 취지로 받아들여져서, 논란이 일었다.
그 다음날인 지난달 20일,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원격의료 물결 안 타면 한국 의료는 '톱' 유지가 어렵다"라며, 같은 흐름을 이어갔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서는 절대 안 된다"라는 단서가 붙었지만, 정부 측 입장은 드러난 셈이었다. 이는 '문재인 케어'의 취지와도 상충한다. 건강보험 재정이 제한된 조건에서, 건강보험을 적용하기가 애매한 의료 기술 이용을 활성화한다는 방향과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는 양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내 최고 기업 총수와 경제부처 수장이 만나 바이오 산업 규제 완화를 약속했다. 바이오 및 보건의료 분야 규제에 관한 한, 현 정부는 지난 정부와 큰 차이가 없게 됐다.
전방위 규제 완화 흐름
이 같은 규제 완화 흐름은 바이오 및 보건의료 분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현 정부의 사회경제 정책 방향 전환과 맞물려 있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 대표는 지난달 26일 "깜짝 놀랄 만한 규제혁신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역시 "보건·의료 분야를 포함한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통과를 조속히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수도권을 제외한 전국 14개 지방자치단체에서 전략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특별법으로 해당 지역에 규제를 대폭 풀어주자는, 이른바 '규제 프리존 법'에 대해서도 정부 안에서 찬성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등이 이런 목소리를 낸다. '규제 프리존 법'은 박근혜 정부가 발의했다. 지난 대선 당시엔 홍준표, 안철수 후보 등이 찬성했고, 문재인 후보는 반대했었다. 하지만 이런 입장이 뒤집어지고 있다.
의료비 더 쓰는 성장, 의미 있나?
보건의료 및 시민사회 단체들은 당황한 기색이 뚜렷하다. 김창엽 시민건강연구소 소장(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는 언론 기고 및 페이스북 포스팅 등을 통해 문재인 정부의 방향 전환을 강하게 비판했다.
크게 세 가지 측면이다. 첫째, 의료기기 등에 대한 규제 완화는 경제성장에 기여하기 어렵다. 애초 이 분야 시장 자체가 작기 때문이다.
둘째, 설령 시장이 커진다 한들, 실익이 없다. 이 분야 시장 확대는 국민이 의료비를 전보다 더 쓴다는 뜻인데, 그에 비례해서 국민 건강이 증진된다고 볼 근거가 없다. 낭비를 통한 성장 도모다.
셋째는 가치 지향 문제다. 비용 대비 효과를 뜻하는 '효율성', 진단이나 치료를 얼마나 잘할 수 있는지를 가리키는 '효과성' 등은 '안전성'보다 하위 범주여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일부 의료기기에 한해 시장에 먼저 진입하고 나중에 평가한다는 '포괄적 네거티브 규제'를 도입한다고 한다. 이는 안전성 검증을 뒤로 미루는 발상이다. 한국이 첨단 의료기기 시장의 시험대(테스트 베드)가 되는 대가로 얻는 성장이라면, 역시 위험하다.
건강과 생명 아닌 특정 기업 위한 혁신, 그나마 시장 규모도 작아
시민건강연구소가 <프레시안>에 연재하는 '서리풀 논평' 역시 이 문제를 연속적으로 다룬다. '서리풀 논평'은 "바이오와 4차 산업혁명, 희망인가 거품인가?" 기획 첫 번째 글인 "바이오 거품, 무엇을 위한 혁신인가?"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의료기기, 바이오, 보건의료 서비스가 혁신을 주장하지만, 건강과 생명이라는 기준으로 이들 대부분이 혁신적이지 않다. (…) 경제가 혁신을 독점하는 현상이 오늘 우리가 보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아닌가. 혁신의, 아니 모든 것의 '경제화(economization)'"
의료기기, 바이오, 보건의료 서비스 분야에서 논의되는 혁신은, 건강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보다 특정 기업의 수익 증대에 그칠 뿐이라는 설명이다. 게다가 그 수익 규모 역시 한국의 새로운 먹을거리가 되기엔 턱없이 미미하다. 한때 바이오시밀러 산업은 세계 시장 규모가 약 4조5000억 원대다. 한국의 한 해 자동차 수출이 약 70조 원 규모다.
장하준 "의료산업 1000배 키워도 반도체와 자동차 수준 안 돼. 중요한 건 제조업"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 역시 같은 지적을 했다. 최근 방한한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의료산업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중요하지 않은 산업"이라며 "세계에서 의료로 무역 흑자를 제일 많이 내는 체코조차 의료 부문 국제수지 흑자가 GDP 대비 0.15%가 안 된다. 한국은 0.003% 정도"라고 말했다.
장 교수는 "그런데 우리나라가 반도체와 자동차에서 거두는 무역흑자가 약 5%인데 의료분야를 지금보다 1000배 이상 키워도 반도체와 자동차 수준이 안 된다. 반도체와 자동차, 부품소재산업 등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 교수는 "가령 반도체 만드는 기계는 독일과 일본에서 수입하는데 그걸 국산화할 노력을 해야지 성형관광 얘기나 하고 있으면 억장이 무너진다"며 "차라리 우리나라 의사 숫자가 OECD 꼴찌인 인구 1000명당 2.2명(2015년 기준)이니까 의료접근권 강화에 더 신경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규제란 기본적으로 기업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을 조화시키기 위해 존재한다"면서 그는 "때로는 규제가 새로운 산업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면서 "북유럽은 강력한 환경규제를 실시한 덕분에 대체에너지 산업이 발달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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