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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의 지긋지긋한 노조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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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의 지긋지긋한 노조 혐오

[기고] 순치된 시민, 노동조합의 몰락, 일본의 우경화

올해 1월 4만5000여 명이었던 JR동일본 노동조합 조합원 수가 7월엔 약 1만5000명으로 줄었다. 불과 몇 달 만에 전체 조합원의 70%가 빠져나갔다. <중앙일보> 7월 31일 자 '파업하자는 노조 지긋지긋'이라는 제목의 도쿄 특파원 발 기사로 이 소식을 알렸다. <한국경제>는 8월 1일 자 '노조에 넌덜머리 난다'는 사설까지 동원해 일본 소식을 전하면서 한국 노동조합의 미래가 되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일본 최대 철도 기업 JR동일본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우리는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태평양 전쟁에 패배한 일본은 미 군정 통치 아래 사회 개혁의 길로 나아갔다. 부당한 권력에 대한 거부권은 근대 시민사회가 획득한 소중한 민주주의의 자산이다. 군국주의 지배하에 일왕에 대한 맹목적 충성이 가져온 동아시아의 비극은 일본 사회가 건강한 시민사회로 거듭날 때 극복될 수 있었다.

▲ 도쿄역에서 출발을 기다리는 고속열차 신칸센. ⓒ박흥수

일본 노동운동의 핵심 사업장 '국철'

전후 단 한 개도 없었던 노동조합이 생겨나고 1950년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이 결성되면서 일본 사회의 민주화 운동이 가속화 된다. 총평은 공산당의 노조지배 반대와 폭력혁명 방침 배제, 노동조합주의, 국제자유노련 가입을 지향하는 등 우경적인 방침을 내걸었지만, 일본 노동운동을 대표하면서 사회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전후 일본의 개혁이 진전되지 못했던 것은 냉전의 시작과 한국전쟁으로 비롯된 미국 대일본정책 변화도 한몫했다. 공산주의 세력 확산을 막는다는 명목 아래 전후 잠깐 보장됐던 민주적 권리들이 금지됐다. 그러나 군국주의의 참화를 극복하고자 하는 사회운동은 들불처럼 일어났다.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진보운동은 이른바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라고 불리는 학생운동과 '춘투'로 대표되는 노동운동의 두 축이었다. 전공투는 동북아 냉전의 한 축을 형성하는 미일상호안전보장조약을 반대하는 안보투쟁에 선도적으로 나서 일본 평화운동의 중심이 되기도 했으나, 69년 도쿄대 야스다 강당 점거 사건을 정으로 서서히 몰락했다.

일본은 고도성장으로 내달려 경제대국으로 일어섰다.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노동조합 조직률도 증가했다. 1970년대 10여 년 이상 연평균 10%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한 일본 경제는 국제수지 흑자 확대와 급격한 물가상승이라는 짐도 떠안았다. 당연히 인플레의 억제와 생활임금 보장이라는 시민사회와 노동자들의 요구가 뒤따랐다. 이는 매년 3월 무렵 임금인상과 단체협약 개선안을 사용자에게 요구하면서 일제히 투쟁에 나선 '춘투'라고 불리는 연례행사를 만들었다.

이 같은 일본 노동운동의 핵심 사업장이 바로 일본 국철이었다. 전국에 깔린 철도 노선을 따라 조직된 40만에 가까운 노동조합원이 갖는 위력은 상당했다. 또한 일본 국철은 총평의 핵심 조직이면서 총평이 지원하는 야당인 사회당의 중요한 지지 지원 세력이었다. 국철 노조 출신 사회당 의원도 많이 배출되었다. 일본 국철 기관사들과 정비원들로 조직된 동력차노조는 1981년 한국의 야당 정치인 김대중의 사형판결에 항의, 전 열차를 1분간 세우고 이어서 30분 파업까지 돌입했던 역사를 갖고 있다.

국철 분할 민영화로 흩어진 노동자들

고도성장을 내달리던 일본 경제의 위기는 정치지형의 변화를 가져왔다. 1980년 6월 중·참의원 선거에서 백중세를 이루던 야당이 몰락하고 자민당이 압승을 거뒀다. 세계 경제가 신자유주의라는 톨게이트를 통과하던 시점이었다. 자민당은 여세를 몰아 대대적 민영화 공세를 시작했다. 키를 잡은 나카소네 총리 행정개혁의 핵심은 국철 분할 민영화였다. 국철을 7개의 회사로 쪼개 민영화시키겠다는 정책은 과감하게 진행됐다. 일본 노동운동의 핵심 조직을 와해시키는 것이자 야당인 사회당의 지지 세력을 없애 자민당 장기집권의 길을 여는 일거양득의 과업이었다.

언론이 앞장섰다. 일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까마귀를 빗대 "까마귀 울지 않는 날은 있어도 국철 비난 기사 없는 날은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일본 국철은 집단 왕따를 당했다. 1975년 파업에 대한 2000억 원에 이르는 정부의 손해배상 청구는 국철노조 발을 묶었다. 1975년 공공부문 노조가 연대파업에 나선 것에 대한 배상 청구였지만 국철노조에만 소송이 걸렸다. 결국 일본 국철은 1987년 민영화되었다. 일본 노동운동 침체와 사회당 쇠락의 결과는 극우 자민당 장기집권 시대의 개막이었다.

JR동일본은 분할 민영화된 국철의 관동지방 철도망을 운영하는 회사다. 7450킬로미터의 영업 킬로미터를 관장하며 4만8000여 명의 직원을 가진 JR 중 가장 큰 회사이다. 때문에 노조원 수도 가장 많다. 그러나 JR동일본 노조가 <중앙>이나 <한국경제>가 주장하듯 '파업불사 강경투쟁' 일변도의 조합은 아니다.

1987년 국철 민영화 과정에서 국철 노조 조합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전체 국철 노동자의 70%를 조합원으로 품었던 노조는 민영화 전해인 1986년 8월부터 꾸준히 탈퇴가 진행되어 민영화 후 23%까지 떨어졌다. 불과 7개월 사이에 14만4000명의 조합원이 4만4000명으로 줄었다. 무너지는 조직에서 당연히 발생하는 상호불신과 대립은 노조를 더 약화시켰다. 이런 과정에서 희망퇴직, 해고 등으로 7만7000여 명이 철도를 떠났고 남은 조합원들은 분할된 회사로 흩어졌다.

새로 출범한 JR지역 회사들은 강온양면 정책으로 노조를 압박하며 길들이려 했다. 사회적으로는 진보 세력의 쇠퇴 속에 일본 사회 우경화 드라이브가 가속화되고 있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JR동일본 노조는 안전한 철도, 기업별 한계를 극복하는 노조, 평화헌법 수호 등 평화추구 노선으로 노조로서의 사회적 역할에 힘을 기울여왔다.

다른 이는 탈퇴했는데 너는 왜 노조에 남아 있느냐

JR동일본 노조 조합원 탈퇴는 2018년 2월부터 시작됐다. 노사 단체 교섭에서 '일률정액인상'요구를 놓고 노사가 대립했다. '일률정액인상'은 직급과 관계없이 임금인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노조의 요구였다. 그동안 상위직급은 임금 인상 시 더 높은 비율로 임금이 인상돼 '상후하박'식 임금구조가 자리 잡았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노조는 직급에 상관없이 정액 인상함으로써 갈수록 벌어지는 직급 간 임금격차를 해소하려 했다.

그러나 사측은 요지부동이었고 노조는 파업권을 발동할 수 있다며 압박을 가했다. 노조는 이어 각 지방조직에 파업준비 지침을 내렸다. 회사는 고위직 조합원들부터 노조 탈퇴 압박을 했고 과장급 노조원들의 탈퇴가 시작됐다. 우파 신문 <산케이>가 2월 12일 자 1면 기사로 JR동일본 노조에 대한 비난 기사를 실었다. 2월 16일에는 노조의 투쟁 지침 1호에 맞서 사장 명의 노조 비난 메시지가 조합원들에게 배달됐다. 노조는 절차에 따라 후생노동대신(노동부장관)에 비협력투쟁(준법투쟁)을 시도하겠다고 통보했다. 정부와 국회도 움직였다. 2월 24일, 국회 질의에 정부는 "JR동일본 노조에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파가 침투해 있다"는 답변서를 제출했다. 전형적인 색깔 공세였다.

언론과 회사, 정부와 국회의 압박이 시작되자 JR동일본 노조 조합원은 큰 위축을 받았다. 회사는 조합원 탈퇴 움직임이 보이자 더 적극적인 조합 탈퇴 공작을 벌였다. 관리직들이 조합원 명부를 들고 노조원들을 1대 1로 만나 '아무개 조합원은 탈퇴했는데, 너는 왜 아직 남아 있느냐'는 식으로 압박했다. 기술 분야와 역무 분야 등 노조 조직력이 약한 곳부터 시작된 회사의 공작에 탈퇴자가 급증했다.

위기감을 느낀 아키타, 센다이, 모리오카 노조 지방본부는 중앙본부에 온건한 투쟁 방침으로의 변화를 요청했다. 수도권의 오미야 지방본부가 이 흐름에 합류하고 요코하마 지방본부는 대의원들의 서명을 받아 중앙본부에 노선 전환을 위한 임시 대의원대회 개최를 요구했다. 반면 중앙본부는 하치오지, 도쿄, 미토 지방본부를 순회하며 기존 방침대로 투쟁할 것을 조직하는 등 노선갈등이 일어났다.

노조는 회사에 노사 평화를 깨는 '인권무시 탈퇴강요'에 항의했지만, 회사의 노조 압박은 더욱 노골적으로 이루어졌다. 승무원 휴게실을 통유리로 만들고 내부 칸막이를 없애 조역(관리자)이 감시하게 만드는 곳도 이미 오래전에 생겼다. 통유리 휴게실에는 결국 아무도 가지 않게 되었다. 조합원은 회사와 정부, 여론의 압박 속에 노조를 떠났다.

사회적 분위기가 주는 압박에 고통스러워한 노동자들

그런데 이렇게 노조를 탈퇴한 조합원들이 2016년 말 실시된 파업찬반투표에서는 82.3%라는 압도적 수치로 노조를 지지했었다. 80%가 넘는 파업찬성률을 보여줬던 노조가 정작 쟁의 조짐이 보이자 모래성처럼 무너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일부 노조 조합원에 대한 인터뷰 결과 파업찬성은 노조 지도부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함이었지 실제 파업 참여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다. 파업 논의가 시작되고 그 가능성이 보이자 적지 않은 조합원들이 파업하면 승객들에게 피해를 끼치게 될 것을 걱정했다.

일본에서는 '메이와쿠 문화' 혹은 '메이와쿠 가케루나(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정신'이 지배하는 사회다. 일본 사회를 생각할 때 쉽게 떠오르는 예의 바른 일본, 친절한 일본, 겸손한 일본 같은 것들이 바로 이 메이와쿠 문화의 산물이다. 메이와쿠 문화의 어두운 면도 있다. 튀지 않아야 한다. 개인보다 조직을 우선시한다. 이것이 조금 과하다 보면 선과 악에 대한 판단 없이 전체 의견에 복종한다.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 태평양 전쟁에 나섰던 역사적 배경이다. 파업으로 생기는 불편함이 법률로 보장된 파업권보다 훨씬 중요하다.

조합원들은 노조에 대한 불만보다 사회적 분위기가 주는 압박에 고통스러워했다. 일부 조합원들은 자신이 사회에 불편을 초래하게 만드는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호소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탈퇴서를 내기도 했다.

JR동일본 노조는 지난 33년간 단 한 번도 파업을 벌인 적이 없다. 싸워본 적 없는 길든 맹수에게 최고의 만찬은 사육사가 던져주는 죽은 닭이다. JR동일본 노조는 청년 조합원들을 조직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수 년간 이루어 놓은 성과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이제 JR동일본 노조의 과제는 노동조합을 복원하는 일이 되었다.

JR동일본 노조는 30년 동안 파업이 없었던 노조, 노사 평화 공동선언을 수십 년간 유지해온 노조였다. 이에 대고 "매일 강경투쟁으로 지긋지긋하다거나 넌덜머리 난 조합원의 배신"이라고 펜을 휘두르는 것은 노조 혐오를 기본으로 삼고 있는 일부 한국 언론의 자가당착적 해석이다.

이들 언론들의 바람대로 일본 노동조합이 몰락하고 정부나 기업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노동자들만 있는 사회는 바람직 한 사회일까? 전쟁 불사를 외치고 동북아 군비경쟁을 촉발하는 아베 총리와 자민당 정권이 폭주를 해대도 제동을 걸 세력이 없다는 것은 일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도 비극적인 일이다.

사회는 좌우의 날개가 제대로 펼쳐질 때 균형이 잡힌다고 한다. JR동일본 노조가 일본의 양심세력으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현재의 위기를 잘 극복해내길 바란다.

감바래!! JR동일본 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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