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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의 562일 만의 석방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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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기춘의 562일 만의 석방에 부쳐

[기고] 이 남자의 사는 법

그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머리 좋다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고, 나라에서 제일 좋다는 대학에 들어갔으며, 나라에서 가장 어렵다는 시험에 어렵지 않게 합격했다.

그러나 이상한 교육시스템이 작동하는 그 나라에서 말하는 "공부 잘한다, 수재다, 영특하다, 비상한 머리다" 하는 말은 "지적이다"라는 것과는 그 의미가 한참 동떨어진 듯 했다. 기껏해야 성능 좋은 기계라는 정도, 그 정도의 평가가 떠오를 뿐이었다. 그러니까 한번 읽은 것이 여간해서는 기억에서 잘 사라지지 않는, 스캐너와 비슷한 그런 것이었다는 뜻이리라.

그에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자신이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는 것을 늘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인정을 유독 권력이나 재력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받으려 했다는 것이, 그의 인생이 치욕으로 끝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물론 스스로도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런 것을 미리 읽을 수 있는 지성이 없었고, 다만 한번 본 것을 오래 기억하는 기능 밖에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그 나라의 교육시스템이 기억력을 그렇게 높은 자질로 평가하지 않는 정상적인 시스템이었다면, 그도 나름대로 평범한 인생을 살다가, 그럭저럭 행복하게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 놈의 교육시스템 때문에! 그는 그런 욕을 할 자격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똑같은 교육시스템 아래에서 자랐어도 그처럼 살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배워주지 않아도 사회에 나가서 제대로 배울 기회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겸손이라는 말의 의미만 이해하려고 했어도, 공감이라는 말만 이해했어도, 더불어 산다라는 말의 의미만 이해했어도, 인간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만 해 봤어도, 유한한 인생이라는 말을 곰곰히 생각만 해 봤어도, 행복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가져 보기만 했어도…그의 인생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마침내는 스스로도 온갖 불명예와 저주와 눈물과 후회로 얼룩져 불행하게 끝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출세의 끈을 잡기 위해 권력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재빠르게 파악하고, 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마치 그것이 그가 살던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고,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젊은 나이에 출세에 눈이 멀어 얼떨결에 저지른 일이었지만, 다시 돌이킬 수는 없었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왔다.

암기력이 좋다는 것은 여러모로 쓸모가 있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얕은 지식의 조각들을 남들보다 먼저 얼기설기 엮기에는 무조건 외웠던 지식의 조각들이 퍽이나 요긴했다. 그것들이 어떤 유기적인 관계로 사람들의 생활과 나라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지 판단하는 것은 그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얄팍한 지식에 대한 주위의 감탄어린 칭송에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기도 했다.

그가 어렵다던 시험에 합격한 후 관직에 나갔을 때, 그의 똘똘함은 금세 윗사람들 눈에 들었고, 그는 평생 권력을 휘두르고 싶었던 사무라이 출신의 권력자를 위해 그의 재능을 팔기로 한다. 아첨하기 좋아하고, 출세하고 싶어 안달인 사람들을 체육관에 모아놓고 대통령을 뽑는 제도를 국민들이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서 그는 이 줄에 서기를 참 잘했다고 안도했다. 이런 꼼수가 통하다니! 이게 가능하다니! 그는 이제 마법의 열쇠를 얻은 듯한 희열을 맛보았다. 민중은 바보다. 민중은 개돼지다.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다. 이 마법의 열쇠만 있으면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일 것이었다. 이것은 교과서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었다. 이건 얄팍한 수에 넘어간 국민들이 그에게 직접 가르쳐준 것이다. 국민이 가르쳐 주었다. 씁쓸하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의 비밀을 엿보았다고 믿었던 그에게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아니 필요하면 할 일을 만들면 그만이었다. 권력자가 싫어할 것들을 제거하는 일은 동시에 자신의 앞날이 보장되는 일이었다. 그는 능력이 닿는 한, 없는 일도 만들어서 권력자의 눈에 들기에 정신없이 바빴다. 세상의 인심은 흉흉해져 갔다. 자고 일어났더니 누가 간첩이었고, 오랜만에 소식을 접해보니 누가 살인의 누명을 썼으며, 아침 저녁으로 펼쳐보는 일간지에는 또 어느 누가 사회를 전복시키려는 불온세력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었다. 이 마법의 열쇠로는 열지 못할 문이 없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그러니까 그가 음흉한 권력자의 의중을 미리 읽고 어떤 일을 벌이기만 하면 만사형통이었고, 그럴수록 그의 벼슬도 점점 높아져만 갔다.

그런데 화무십일홍인가. 영원할 것 같았던 독재자가 자신이 가장 가깝게 여겼던 심복의 손에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이런 것을 두고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고 했던가. 그동안 저질렀던 허다한 조작사건들이 비수가 되어 그의 등을 찌를 것을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했다. 후회막급이었지만, 용서를 빌기에 그가 한 악행들은 차마 인간이 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지나친 일들이었다. 돌아온 제 정신으로 판단해보니 이제 꼼짝없이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듯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더니, 시국이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자신에게도 솟아날 구멍이 생길 것 같았다. 욕심이었다. 그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은 바로 인간의 탐욕이었다. 모두들 자기가 대통령이 되려는 욕심에 차려진 밥상도 걷어차 버렸다. 결과는 또 다시 군부의 쿠데타였다. 그렇다면 그에게도 살 길이 생긴 것이다.

어느 정도 경력과 관록이 생긴 그에게 새로운 독재자 치하의 세상은 여전히 탄탄대로였다. 관운은 별탈 없이 트이기만 했다. 그가 혈기왕성했던 시절에 익혔던 여러가지 술수들은 아직도 쓸만한 무기였다. 세상이 여전히 어둡고, 혼탁했기 때문이었다. 어두운 시절을 여러번 살아 남았던 그와 비슷한 무리들끼리 힘을 합쳐,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기만 하면 되었다. 마법의 열쇠가 여전히 작동하다니, 그는 그런 세상이 참으로 새삼스럽게 느껴졌고, 우습게도 허탈하기까지 했다. 나이 탓인가.

그동안 위기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간 힘을 비축해 놓았던 견고한 기득권 세력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인권 변호사 출신이 대통령이 되어 목을 조여 왔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상당히 신사적인 사람이었다. 이 정글 같은 곳에서 페어플레이를 할 생각을 하다니, 그는 참으로 순진무구한 사람이 아니던가. 변호사 출신의 그 대통령이 생각하는 세상은 명백하게 그가 원하는 세상과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생각이라니, 너의 행복은 나의 불행인데 생각할 게 뭐가 있겠는가. 억지를 부려서 그를 대통령직에서 끌어 내리려고 애썼지만, 이전처럼 이런 일들이 쉽게 되지 않았다. 마법의 열쇠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일까.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했다. 위험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세상은 결국 두가지 가치로 갈렸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나름의 윤리에 따라 사는 것이 가치있다고 여기는 사람과,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까지도 이용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으로. 그가 미워한 대통령은 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고,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걱정과는 달리 세상은 여전히 순조롭게 돌아갔다. 그 즈음에 느끼던 것이었지만, 그는 세상이 좀 우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성찰을 가끔씩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새는 그가 그런 한가한 생각에 빠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왕년에 모셨던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됐다. 보스 기질을 가졌던 어느 정치인이 그녀를 팔푼이도 아닌 칠푼이라고 했다지만, 어쩌랴 그 칠푼이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을 쥐고 흔드는 대통령이 되었는데. 마법의 열쇠는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출세의 디딤돌이 되었던 유신헌법이 만들어졌던 때로부터 대충 꼽아보아도 그는 40년 이상을 권력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려왔다. 뒤돌아보니 그야말로 광영의 세월이었다. 민초들의 삶이 어쩌니 저쩌니 그런 말들은 다 패배자들의 넋두리에 불과한 것이다. 세상은 능력있는 자만이,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곳이다. 세상은 원래 약육강식이 판치는 정글과 같은 곳. 빛나는 승리자인 자신에게 시비 거는 짓은 너무 구질구질 하지 않은가. 요즘 의학의 발달로 노화방지를 위한 줄기세포 시술을 받았더니 다시 회춘하는 것 같다. 얼굴의 주름도 없어지고...세상은 참으로 살 만한 곳이 아니던가.

기어코 사달이 나고 말았다. 그 무식한 인간이 결국 일을 저질렀다. 관직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말년을 즐기고 있을 무렵이었다. 왠지 마음 한켠이 불안했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려고 그랬던 모양이었다. 일을 무마하려고 필사적으로 뛰어 다녔다. 온갖 채널을 동원해 일이 번지는 것을 막아 보았다. 마음이 조급했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면 이번 일도 결국은 유야무야될 문제였다. 그동안 그래 왔으니까. 지난 40년간 그래 왔으니까. 돌이켜보면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졌던가.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결코 해결될 것 같지 않던 수많은 사건들이 그럭저럭 묻혀졌다. 마법의 열쇠는 여전히 작동할 것이었다.

그런데 일이 엉뚱한 곳에서 꼬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배가 난파할 기색을 보이자, 쥐새끼 같은 놈들이 자신을 구해 줄 자료들을 들고 앞다퉈 배에서 뛰어 내리기 시작했다. 서울광장과 광화문광장에는 분노한 시민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눈과 비에도 아랑곳 하지않고,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내지르는 분노에 찬 목소리는 거대한 함성이 되어 푸른기와집의 깊은 규방을 뒤흔들 정도가 되었다.

이제 마음을 정리해야 할 때가 온 모양이었다. 그동안 켜켜이 쌓인 그의 패악들은 감춘다고 감춰질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수많은 미친 짓들을 어떻게 스스로 자백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내가 했던 일들이 그때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이제 마지막에 다다른 지금, 비로소 그때의 일들의 의미가 명확해지고 있었다.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자칭 타칭 수재였던 내가 어쩌면 그렇게도 어리석었던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그는 아무래도 진실을 밝힐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 수많은 악행들을 등에 짊어진 채, 스스로 망각의 어둠 속으로 숨어 버렸다.

이제 국민들은 비로소 하나의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학벌을 앞세우고, 지위와 권력을 앞세우며, 평범한 사람들을 주눅들게 하는 이유가 결국은 아무 실체도 없는 허상들을 통해 진실을 왜곡하고, 상식적인 판단을 방해하고, 정상적인 사고를 잠재워서, 돈을 긁어 모으려는 한갓 분탕질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한 정신나간 대통령을 단죄했던 그 사건은 돈이 더 이상 돈(money)이 아니라, DON이라는 물신이 되어서 우리 모두의 눈을 가려 왔다는 것을 깨닫는 뼈아픈 계기가 되었다. 돈을 많이 가질 수도 있고, 적게 가질 수도 있다. 돈은 편리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주 불편한 그 무엇이 되어 우리의 존재를 억누를 수도 있다. 돈을 통해 선을 실천할 수도 있지만, 돈을 위해 수많은 악이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그 많은 희생을 치르고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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