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의 평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하지만 우리민족끼리의 문제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다보니, 안타깝게도 우리만의 힘으로 한반도의 미래를 좌우할 수 없는 형국이다.
특히 최근에는 중국이 배후에서 북한에 여러 요구와 지시를 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한반도의 평화 분위기가 다소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앞으로 이어질 종전선언 등 중요한 사안에 자신이 꼭 참석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한반도 평화를 둘러싼 움직임이 미중 간의 알력 다툼으로 변질되는 모양새다.
그럼 대체 중국은 왜 한반도의 평화 문제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할까? 한반도가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지정학적 이유와 함께, 예로부터 중국이 한반도를 자신들의 울타리로 생각해왔던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관측된다.
봉건제도와 중국식 천하질서, 그리고 한반도
중국이 한반도를 주변국이자 울타리로 인식한 것은 전통 관념과 제도가 큰 영향을 끼쳤다. 먼저 주나라 때 대대적으로 시행하였던 봉건제도(封建制度)는 약간의 변화를 겪긴 하였지만, 이후의 왕조들에게 계승되어 황족과 개국공신 등에게 봉토(封土)와 함께 일정 정도의 자치를 부여하는 형식으로 존속해갔다.
<춘추좌전(春秋左傳)>에 기록된 봉건제도의 어원은 "봉건친척, 이번병주(封建親戚,以藩屏周)"이다. 즉, 왕이 혼자서 그 넓은 영토를 다스릴 수 없으니, 믿을 수 있는 친척과 공신들을 주나라 주변에 봉건하고, 이들 번국(제후국)으로 주나라를 지키는 병풍으로 삼아 유사시에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봉건제도는 처음에는 중국 국내에만 적용하였으나, 통일제국이 등장한 이후 외국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주변국에까지 확대됐다. 과거 '중국(中國)'이라는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의 '천하질서'에 따르면 중국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황제가 다스리는 '가운데 나라'였고, 주변국은 중국을 종주국으로 받드는 일종의 '제후국'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바다 건너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일본과는 달리,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맞닿아 있는 우리는 중국의 이러한 관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식 천하질서(The Chinese World Order)', '사대자소(事大字小)', '조공책봉관계(朝貢冊封關係)'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던 이러한 중국과 주변국의 관계는 수천 년간 지속되다가 근현대에 들어와서야 무너지게 되었다.
19세기 이전까지의 한중관계는 이러한 시스템으로 진행되었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대(事大)', '조공(朝貢)' 등이 바로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물론 이를 '평등'을 대원칙으로 삼는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많은 문제가 있지만, 이는 과거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전통 외교의 주요 방식이었으며 무조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과거 중국과 한국의 이러한 관계가 절정에 달했던 명(明, 1368~1644)과 조선(1392~1910)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흔히 '사대'라고 하면 큰 나라를 섬기는 비굴한 외교를 떠올려 '사대주의'로 쉽게 오인하지만, 사대주의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한민족의 국민성과 억지로 결부하려고 날조한 용어에 불과하다. 즉, 한민족의 국민성은 자립성이 없어 예로부터 강대국 중국에게 이끌려 왔고, 지금은 일본이 중국보다 더 강하니 일본이 한반도를 통치하는 것이 옳다는 억지 주장으로 볼 수 있다.
동아시아 전통 외교에서는 본래 '사대'와 '자소(字小)'를 대국과 소국이 서로 함께 행해야 했다. '사대자소(事大字小)'는 유가(儒家)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공경하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아끼는 충효 사상이 나라와 나라 사이로 확대·적용된 것이다.
즉, 사람에도 대인과 소인이 있듯이, 나라에도 대국과 소국이 있으며, 대국은 소국의 '사대'라는 공경의 '권리'를 받으면서 소국을 아끼는 '자소(字小, 여기에서 '字'는 '사랑하다'의 의미)'라는 '의무'도 이행해야 했다. 명분을 중시하는 동아시아에서 대국의 천자가 소국을 아껴야 하는 의무를 잘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변혁천명(變革天命)'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명과 조선은 물론 예외도 있지만, 사대와 자소가 나름 잘 지켜졌던 시기였다. 명의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 1360~1424) 이후 명과 조선은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명대 한중관계는 역대 최고로 밀접했다. 여기에 중국의 앞마당이자 울타리 개념이 더해져 명에게 조선은 매우 중요한 나라였다.
실제로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이 망국의 위기에 처하자 명은 막대한 병력과 물자를 지원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임진왜란'이라고 기록하지만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왜에 맞서고 조선을 돕는다'라는 의미로 '항왜원조(抗倭援朝)'라고 쓴다.
명이 조선을 적극적으로 도운 이유는 자소의 의무도 중요했지만, 조선이 함락당하면 이를 전진기지로 삼아 일본이 지속적으로 명을 침략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명은 조선을 돕기 위해 7년에 걸쳐 엄청난 대군과 함께 700여 만 량이라는 거금을 쏟아부었다. 참고로 당시 시세에 따르면 10량이면 3인 가족이 1년 동안 넉넉히 먹을 수 있었다고 하니 가히 천문학적인 금액이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국력을 크게 손실한 명은 얼마 후 멸망했다. 물론 <징비록(懲毖錄)>의 "명군은 참빗"이라는 기록처럼 명군에 의한 피해 역시 적지 않았던 듯하다. 하지만, 명의 참전이 없었다면 조선은 일본에게 완전 점령당하여 명에게 다시 태어나게 해준 은혜, 즉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는 말조차도 못 했을 것이다.
미중관계와 항미원조
과거의 봉건제도, 사대와 자소라는 전통 외교 관념이 사라진 근현대에도 한반도를 바라보는 중국의 인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6·25의 중국 참전이다.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시작하자 남한은 갑작스러운 공세에 대부분 지역을 잃고 낙동강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에 미군과 연합군의 참전, 그리고 이어진 인천상륙작전 등으로 전세는 급반전하여 북한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이때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며 전세는 또 다시 뒤집어졌고, 이후 양측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결국 38선을 경계로 휴전협정을 맺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남한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며 후퇴했다가 평양을 함락하고, 중국군이 참전하기까지 꽤 긴 시간이 흘렀을 것 같지만, 사실 모두 전쟁이 발발한 1950년의 일이었다. 중국은 6·25 발발 이틀 후인 6월 28일, '미 제국주의'의 침략을 강력하게 비난하였으며, 7월 13일에는 '동북변방보위에 관한 결정'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하며 군대를 결집했다.
이후 미군과 연합군이 38선을 넘어 평양을 점령하여 직접 중국에 영향을 끼칠 것이 우려되자, 마오쩌둥(毛澤東)은 입술과 이가 서로 의지한다는 '순치상의(唇齒相依)' 고사성어를 거론하며, 중국 본토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북한에 파병을 주장했다.
결국, 10월 8일 중국은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북한)을 돕고, 국가를 보호하자는 내용의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保家衛國)'라는 기치를 걸며 신속히 중국인민지원군을 편성, 전장에 투입했다. 중국이 6·25를 '항미원조'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며, 실제로는 정규 부대원들이었지만, 어쨌든 '인민지원군(人民志願軍)'은 정식 군대가 아니라 자원에 의한 군대라는 뜻을 표방하고 있다.
중국의 참전은 중국과 미국의 갈등이 그 핵심이다. 6·25 발발 이전 중국은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이 한창이었다.(제2차 국공내전, 1945~1949) 전쟁 초기 국민당은 미국의 지원으로 막강한 화력을 보유하며 공산당을 압도했지만, 극심한 부패로 민심을 잃다가 결국 공산당에게 패배, 대만(臺灣)으로 퇴각했다.
대륙을 점령한 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즉 현재의 중국 수립을 선포했고, 내부 정비를 어느 정도 완료한 후인 1950년 10월 국민당이 점령하고 있는 대만 침공 작전을 예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6·25 발발 이후 미 해군 제7함대가 대만해협에 포진하자 중국의 대만 침공 작전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여기에 한반도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군대가 38선을 넘어 중국과 북한의 국경인 압록강까지 진격하고, 미국이 대만을 이용하려 하자 여기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낀 중국이 참전한 것이다.
실제로 미국이 남한을 도와 북한을 점령한다면, 미국과 우호관계를 맺은 남한에 미군이 대거 주둔할 것이고, 이는 직간접적으로 중국의 적대국인 미국과 국경을 접한다는 최악의 결과를 맞게 된다. 여기에서 또 미군의 대만 지원을 통한 국민당의 중국 대륙 탈환, 북한의 중국 내 망명정부 수립 등 갖가지 문제가 파생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 이에 중국은 자신과 우호관계를 맺은 북한이라는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을 것이다.
중국의 대승적 행동과 진정한 대국으로서의 모습
1953년 7월 27일, 3년이 넘게 진행되었던 전쟁은 연합군 대표와 북한·중국이 휴전 협정에 서명을 하며 끝을 맺었지만, 남북관계는 여전히 반세기가 넘게 긴장관계를 지속해왔다. 다행히 지난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연내 종전 선언에 합의하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아직 낙관적 전망을 하기는 어렵다. 현재 종전 선언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중국의 입장이다. 휴전 협정을 맺을 때에도 중국이 간여했으니, 종전 선언에도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미국을 경계하여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야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안보에 큰 위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여전히 한반도를 자신의 울타리로 여기는 중국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국이 자국의 이익만을 최우선시하여 지나치게 미국과의 이해관계에만 얽매이는 모습 또한 썩 보기 좋지는 않다.
그렇지 않아도 중국은 최근 미국과의 무역마찰에서 큰 곤경에 처해 있는 모습이다. 일각에서는 미중 패권경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보고 있지만, 아직 많은 나라들이 중국이 미국을 대신할 대국이라고 여기지 않는 모양이다.
실제 유럽연합(EU)과 같은 서방세력뿐만 아니라 중국의 주변국 역시 중국에 등을 돌리고 있어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우리는 중국과 다양한 분야에서 돈독한 우호관계를 다져왔지만, 사드 문제에서 드러난 중국의 옹졸한 태도에 크게 실망했다.
만약 중국이 대승적인 행동으로 남북 평화 문제와 더 나아가 세계의 안정에 공헌을 한다면, 진정한 대국으로서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 데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중국이 미국을 대체할만한 대국이라는 믿음을 얻는다면, 연이어 발생할 미국과의 패권경쟁에서 많은 나라들의 도움을 이끌어낼 수도 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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