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3월 재벌 4세로는 처음으로 그룹 회장에 취임해 국내 재벌 4세 경영시대를 연 박정원(56) 두산그룹 회장이 고개를 들지 못할 계열사 비리가 적발돼, 23일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를 받았다.
공정위의 제재를 받은 계열사는 이미 악덕 기업으로 비판을 받아왔던 건설중장비업체 두산인프라코어다. 두산인프라코어는 박용만 회장 시절인 지난 2015년말 '사람이 미래'라는 기업이미지 광고와는 딴판으로, 경영실패 책임을 직원들에게 돌려 신입사원까지 희망퇴직을 시켜려다가 사회적 비판을 받았던 기업이다(☞관련 기사:두산, 경영 실패 책임은 직원이 지는 건가?). 그 여파인지 이듬해 박정원 회장으로 교체가 됐지만, 알고보니 두산인프라코어는 중소기업 기술 탈취라는 또다른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두산인프라코어는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탈취를 엄단하겠다면서 공정위가 지난해 9월 ‘중소기업 기술유용 근절대책’을 발표한 이후 직권조사에 나선 이후 처음으로 적발해 제재를 받은 대기업이 됐다.
5년 납품 업체, 18% 단가 후려치기 거부하자 기술탈취
공정위에 따르면 두산인프라코어는 2015년 말 굴삭기에 장착하는 에어 컴프레셔(압축 공기로 흙·먼지 등을 제거하는 장비)를 공급하는 이노코퍼레이션에 납품 가격을 18%나 낮추라고 요구했다. 이노코퍼레이션이 거절하자 두산인프라코어는 장비에 하자가 있는 것 같다면서 제작 도면을 제출하도록 했다.
실제로 하자는 없었지만, 두산인프라코어는 제작도면 31장을 다른 협력업체에 주면서 같은 제품을 개발하도록 했다. 이 업체가 제품을 만들어내자 두산인프라코어는 2016년 7월부터 기존보다 10%가량 싸게 이 업체로부터 제품을 공급받았고 5년째 납품해오던 이노코퍼레이션과는 거래를 끊었다.
두산인프라코어는 굴삭기 냉각수 저장 탱크를 납품하는 코스모이엔지의 기술 자료도 유용했다. 두산인프라코어는 지난해 7월 코스모이엔지가 납품 가격을 올려 달라고 하자, 냉각수 저장 탱크 제작도면 38장을 다른 5개 회사에 주고 같은 제품을 만들 수 있는지 확인했다. 5개 업체는 거래 조건이 맞지 않아 납품하지는 않았지만 공정위는 거래가 없어도 기술 자료 유용 행위로 판단했다.
이처럼 두산인프라코어는 2015~2017년 30개 하도급 업체로부터 서면 요구 없이 기술 자료가 들어있는 382건의 도면을 받아 하도급법을 어겼다.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하도급 업체에 기술 자료를 요구할 수 있지만 자료의 이름과 범위, 요구 목적, 비밀유지 방법 등 7개 사항을 적어 반드시 서면으로 요청해야 한다.
최무진 공정위 기업거래정책국장은 "기술 유용은 중소기업이 개발한 기술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드는 중대한 위법 행위"라면서 "기술 유용 과징금 상한을 5억 원에서 10억 원으로, 배상 책임 범위는 손해액의 3배에서 10배까지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중소기업 기술 탈취에도 '상생 우수 대기업' 선정
하지만 이 정도로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 탈취 범죄가 근절될지 의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솜방망이 현행법상 두산인프라코어는 하도급법 위반 혐의로 과징금 3억7900만 원을 부과받았을 뿐이다. 임직원에 대한 책임도 엄중히 묻지도 못했다. 그저 부장·차장·과장 직급 담당 직원 5명이 검찰에 고발됐을 뿐이다.
지난 3년간 중소기업 기술탈취 피해액만 1000억 원이 넘어도 대부분의 업체는 대기업의 보복이 두려워 공정위 조사에 진술을 거부할 정도로 공정위의 직권조사가 아니면 적발 자체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두산인프라코어 측은 기술탈취 혐의도 부인하고 있다. 기술자료가 넘어간 건 소홀한 자료 관리 탓이며, 거래 중단은 경영상 판단이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두산인프라코어는 중소기업 기술 탈취 상습범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발표된 2017년도 동반성장지수 평가에서 '우수' 등급을 받을 정도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을 위한 실질적인 제도도 부실하게 운영되고 있다.
현행법과 제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김상조 공정위의 의지에 대해서만큼은 대표적인 시민단체들이 이례적으로 공동 지지 논평을 발표한 것은 주목된다.
24일 참여연대와 민주변호사를위한모임(민변)은 두산인프라코어의 하도급업체 기술자료 유용 행위에 대한 공정위(위원장 김상조)의 엄정한 제재를 긍정 평가하며, 중소기업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고질적인 중대 범죄인 대기업의 기술유용 및 탈취 행위가 근절될 때까지 노력할 것을 촉구했다.
참여연대와 민변은 "공정위는 그동안 조사 인력 부족과 독자적 증거 확보의 어려움을 이유로 대기업의 기술 탈취 행위를 조사하는 데 소극적 행보로 일관해왔다"면서 "이번 사건을 시작으로 시장에 만연한 기술유용·탈취 행위 근절을 위해 더욱 철저한 조사와 대책 마련을 하고, 공정위에 신고된 다른 사례에 대해서도 조속한 처분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벌 저격수'로 불리는 바른미래당 채이배 정책위의장 권한대행도 이날 원내대책회의에서 "현재 두산인프라코어의 사내 이사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맡고 있는 박용만 회장은 최근 총수일가 사익편취, 하도급 불공정행위 규제에 대해 '법과 제도만으로는 안 되고, 기업이 자율적으로 따르는 규범을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면서 "이번 하도급 업체 기술탈취 적발을 계기로 두산그룹이 다른 대기업보다 모범이 되는 자율규범을 만드는지 지켜보도록 하겠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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