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투시대, 꺼지지 않는 젠더 갈등의 원천
유례없는 압축적 근대화로 웬만한 변화에는 동요하지 않을 내성이 생겼을 법도 한데, 2018년 한국 사회는 전환기적 변화에 직면해 또 한 번 크게 출렁였다. 변화는 여러 영역에서 동시에 그리고 중층적으로 진행 중이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요동치고 있는 국제 정치경제 질서나 급속도로 전개되는 디지털 경제화 못지않게 중요한 변화가 젠더 관계에서도 터져 왔다.
특히 올해 초 한 여성검사의 내부고발로 촉발된 미투운동은 공적·사적 영역 모두에 깊이 침윤된 기존의 젠더 의식과 관행을 우리 모두가 돌이켜 들여다보도록 요구하며 사회 저변을 흔들었다. 우리사회에서 미투는 남성 중심의 일상 권력과 질서 그리고 가부장적 문화에 문제를 제기하고 연대를 촉구하는 사회운동으로 전개되고 있다. '나도 겪었다', '네 잘못이 아니다', '너와 함께 하겠다'며 용기 있게 나서고 연대하는 이들의 자발적 움직임에 힘입어 기억 너머 감춰 두었던 두렵고 아팠던 이야기들이 하나둘 힘겹게 그러나 봇물 터지듯 세상으로 나와 뿌리 깊은 젠더 질서에 충격과 균열을 가하고 있다. 깊은 골을 제대로 건드리면 이제 젠더 평등한 사회 기반을 구축해 갈 수도 있겠다는 희망도 함께 자라나고 있다.
그러나 강고하고도 오래 지속된 기존 젠더 질서가 쉽게 바뀔 리 없다. 뜨거운 현장의 운동이 제도 내 긴 법적 공방의 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동력이 점진적으로 소진되거나, 운동에 반응하는 긴박하고도 진지한 대응과 정책의 부재를 예상 못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주목을 요하는 것은 미투 운동에 대한 광범한 지지와 연대의 이면에 수년 전부터 점증해 오던 젠더 갈등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성 혐오로 무장한 백래시가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 영역으로 걸어 나오고 있으며, 최근 인터넷 포털 검색어 1위에 오르기도 한 워마드 등 극단적 페미니즘의 미러링도 그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혹자는 이런 갈등의 양상이 일부 극단적으로 사고하는 소수 젊은이들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고 간단히 치부하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 전반에 젠더 갈등의 골은 꽤 깊고 넓다.
몇 주 전 이 시리즈의 총론에서 유종일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장벽사회'가 기득권층이 구축한 철옹성으로 장벽 밖 아웃사이더들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장벽 안으로 진입할 기회를 얻기 어려운, 불평등이 구조화된 사회라고 정의한 바 있다.(☞ 관련 기사 : 격차 사회? 장벽 사회!)
유종일 교수가 주목한 것이 계층 이동을 가로막는 구조화된 경제체제의 장벽이었다면, 우리사회에는 그보다 더 오랜 기간 더 공고하게 구축된 높은 장벽이 장벽 밖 여성 앞에 건재하다. 그런데 최근 전개되고 있는 갈등의 양상에서도 확인되듯이 여성 앞에 놓인 이 장벽이 누구에게나 보이고 공히 인식되거나 경험되는 것은 아니라는데 젠더 갈등의 핵심이 있다. 미투 역시 구조화된 미시권력 격차로 인한 피해가 다시 해당 여성이 대등한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는 데 장벽으로 작용하는 악순환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 널리 공감되지 못하고 단발적이고 운 나쁜 개개인의 비극적 사건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젠더가 계층화와 교차하며 여성 내부의 이질화가 심화되면서, 그리고 공적 영역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엘리트 여성의 가시성이 증가하면서 여성에게 동등한 입장권을 주지 않는 장벽은 우리사회에서 사라진 것 아니냐는 인식이 늘고 있다.
이 글의 주 관심 대상인 노동시장 영역에서도 그렇다. 여성의 사회적 통합을 가로막는 장벽은 이미 우리사회에서 상당히 허물어지고 노동시장 젠더 격차는 개인의 능력 차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라는 인식이 생각보다 널리 퍼져있다. 특히 2000년대 중반 이래 대학진학률이나 학습역량에서 평균적으로 여성이 남성을 추월하면서, 그리고 남성 성역이라 여겼던 의료 혹은 법률 전문 서비스 등 고소득 전문직 시장에 여성이 대거 진입하기 시작하면서 대학생을 비롯한 청년들 사이 그런 생각이 탄력을 받았다.
불평등이 화두인 시대 청년들에게 불평등 인식은 오히려 공정성 인식으로 치환되는 듯한 인상이다. 살아온 날들의 거의 대부분을 치열하게 반복되는 과잉 경쟁 속에 보내온 청년들에게 경쟁은 곧 삶이다. 이들에게 문제는 과도한 경쟁 그 자체가 아니다. 그 경쟁을 초월해 살 수 있는 금수저가 아닌 이상 경쟁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정상'적인 삶을 포기한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그보다 자신이 들어간 경쟁의 장이 '을'들 간 게임을 공정하게 진행할 수 있는 판인지에 더 촉각을 세운다. 이는 촛불의 도화선이 되었던 정유라에 대한 청년의 시선과 분노에서도 읽을 수 있는 정서다.
그러니 구직을 앞둔 남성들에게 비교적 안정적인, 그래서 인기가 높아 바늘구멍 뚫기의 심정으로 지원하는 공공부문 공채에 여성에게 몇 점 더 가산점을 주자거나 적극적 고용개선 조치를 강화하자는 등의 채용 정책은 가뜩이나 병역의무로 이미 2년여를 손해 본 터에 참을 수 없는 불공정 게임이 된다. 이런 정책을 주장하는 정부 부처 역시 불신의 대상이다. 학교에서 나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두어 온, 심지어 되도록 직접적으로 경쟁하고 싶지 않았던 여성들에게 가산점을 주는 정책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상 최악의 청년 노동시장이 전개되고, 청년 남성에게 저임금 일자리가 크게 확대되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들에게 2018년 현재도 훨씬 더 많은 수의 남성이 더 좋은 일자리를 획득한다는 통계는 잘 전달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곤두선 신경이 미치는 영역이 아니다.
취업 전선에 선 여성들의 입장은 다르다. 이제까지 열심히 쌓아 온 성적과 긴 스펙리스트가 부정당하는 경험을 직간접적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수백 번 거듭하면서 '여성이라 죄송하다'는 자조 섞인 신조어를 만들어내고 공감하고 분노한다. 정말 공정한 경쟁이라면 왜 나는 그 대열에 진입할 기회가 이토록 먼 것인지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던 차에 최근 잇따라 터져 나온 은행 채용 비리 사건은 이들에게 심증과 개연성이 현실임을 확인해 주었다.
최근 특히 청년을 중심으로 한 젠더 갈등은 이들을 과도한 경쟁에 내몬, 승자 독식을 독려하고 용인하는 교육과 노동시장 구조가 만들어낸 전형적인 을과 을 간의 갈등이다. 또 마르지 않은 가부장 의무에 수반된 작은 기득권을 침해하면 곤란하다는 무의식과 이제 성을 이유로 한 차등적 취급은 용인하거나 참지 않겠다는 적극적 의식이 부딪치는 리틀 갑과 을 간의 치열하고도 심각한 경합이다. 과도한 경쟁의 수정, 즉 1등이 아니라도 또 실패해도 여전히 일과 삶의 영역에서 소소하지만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회적 신뢰와 연대의 원리를 제도화함으로써 젠더 장벽을 낮추지 않고는 우리사회가 그 부산물인 젠더 혐오와 갈등을 피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2. 노동시장 격차, 그리고 장벽
노동시장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장벽의 원천은 제도뿐 아니라 젠더 격차 그 자체에서도 비롯된다. 이미 존재하는 심대한 젠더 격차는 그 자체로 장벽이 된다. 격차는 자원이 제한적이고 불안정할 때 기득권을 지키려는 장벽 안의 의지를 강화하고 이는 다시 기존의 다양한 관행과 제도를 결집해 격차를 유지하려는 남성 인사이더들의 의식적·무의식적 행위를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사회에 연대의 원리나 이를 실천하게 하는 제도가 취약할 때 남성 인사이더의 행위가 더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기업 조직 내에서 남성 기득권을 옹호하는데 용이한 노동시장 및 비노동시장 제도가 상호 보완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이 있다면 이 역시 인사이더의 기득권 유지 행위를 돕고 불평등이 장기 지속될 개연성을 높인다(Tilly, 1997).
예컨대 가부장적 문화와 전통적 젠더역할 규범이 강한 사회에서 어느 기업이 경력 단절에 벌을 주고 중단 없는 장기근속에 상을 주는 관행을 유지한다면 출산과 육아가 예정되어 있는 여성은 이 기업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제될 가능성이 높다. 남성 인사이더들이 사회 문화적 규범을 근거로 위와 같은 고용 관행을 강화한다면 – 예컨대 여성을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으로 편향적으로 고용하는 등- 이는 가부장제적 사회에서 도덕적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여성을 배제하지 않지만 여성을 좋은 일자리로부터 배제하는 간접적인 실천이 된다(권현지 외 2015; 권현지·함선유 2015). 따라서 노동시장의 여성 배제, 즉 젠더 장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현재의 노동시장에서 젠더 격차가 얼마나 강하게 유지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고, 격차에 작용하는 조직적·제도적 요인이 무엇인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노동시장의 젠더 격차와 관련해 널리 알려진 몇 가지 정형화된 사실은 대개 세 가지로 압축된다.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여성 고용률과 경력 단절, 낮은 임금, 그리고 낮은 일자리 질이다. 한국 사회는 이 세 가지 모두 젠더 격차가 지나치게 크다. 지난 20년간 세계 각국 노동시장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변화는 여성 고용률의 현저한 증가다.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여성노동력 유인, 여성의 사회경제적 통합을 고취하려는 국가의 각종 노동시장 및 가족 정책, 그리고 여성의 의식변화와 교육 투자 증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이러한 변화에 지체 현상을 보이고 있다. 격차가 적은 선두그룹과 거리가 크게 유지되고 있을 뿐 아니라 1990년대 후반에는 한국에 비해 상태가 좋지 않았던 이탈리아나 일본과 비교할 때 격차를 따라잡는 속도도 느리다.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빠르게 전개된 여성의 고등교육 확대 및 저출산 고령화의 충격도 여성의 노동시장 지위획득으로 제대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
최근 시간제 고용을 통해 여성 고용률을 높이고 경력 단절을 줄이려는 정책 드라이브가 강해지면서 여성 시간제 노동자 비중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시간제 일자리의 질이 크게 낮아 여성의 경제적 지위를 높이는 데 실질적인 유인이 되지 못한다는 비판이 많다. 한편 10인 이상 사업체의 여성 평균임금은 남성 평균의 65% 수준으로 지난 15년간 줄곧 이 수준이 유지되고 있으며, 여성의 임금은 경력 증가에도 크게 상승하지 않는다. 이런 성별 임금격차에는 수직적·수평적 차원의 성별 직종 분리
(occupational sex segregation)가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알려져 있듯이 관리직 이상 직급이나 소득이 높은 직종에 남성 쏠림이 강해서 만들어진 격차라는 의미다.
그러나 기존 연구에 의하면 인적자본의 차이로 인한 소위 생산성 차이나 직종 분리로 인한 직업의 성별 구성적 차이를 모두 고려하고도 설명되지 않는 상당한 성별 임금 격차가 존재하며, 연구자들은 이중 상당 부분을 고용 관행상 차별 효과의 결과로 볼 수 있다는 의견을 제출하고 있다(신광영 2011; 유정미 2017). 이러한 양상은 각국 여성의 지위를 비교하는 국제경제포럼 젠더격차리포트(Gender Gap Report)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2015년의 예를 보면 한국은 145개국 중 115위로 종합격차 지수에서 하위그룹을 형성했다. 경제활동 참가 125위, 고용률 90위, 임금불평등 116위 등 세계 최하위의 실적은 세계 15위권 이내에 진입한 경제 규모의 순위와 크게 대비된다.
노동시장의 젠더격차와 여성의 낮은 시장 지위를 다루어 온 그간의 연구들은 경력 형성기 20~30대 여성들의 노동시장 퇴장의 원인을 육아에서 찾고 그 여파로서의 젠더 격차에 주목해 왔다. 잘 알려진 M자형 경력 단절의 스토리다. 하지만 우리처럼 경력 단절 문제를 오래 노정해 온 일본의 경우 이 골짜기가 지난 10여 년간 크게 완화되었고, 중국이나 대만에서는 아예 육아기 경력 단절 현상이 발견되지 않는다. 고용률, 임금 수준 등에 있어 젠더 격차는 한국에서 가장 높다. 동아시아 주요 산업사회 간의 이러한 차이는 한국의 낮은 여성 지위가 가부장적 가족주의 등 동아시아 문화권 고유의 특성에 기인한다는 해석의 게으름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일가족양립정책에 대한 여성운동의 끊임없는 요구로 지난 1990년대 이래 국가의 육아 지원 정책이 적어도 양적으로는 상당한 진전을 보인 경우다. 그러나 이 제도적 장치가 지난 20년간 여성의 노동시장 지위 개선 혹은 격차 해소로 직접 연계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제 직업 진입이나 유지의 장벽 요인을 가족과 육아 등 젠더 역할에 집중해 찾기보다는 여성 배제적·젠더 불평등한 일터 요인에 대해 보다 면밀하게 들여다볼 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우리사회의 주요 이슈인 노동시장 불평등의 핵심이 기업규모 간 격차에 있다는 점은 전문가 사이에 거의 이견이 없다. 이점을 위의 발견과 연결하면 여성이 겪고 있는 대기업 진입 장벽은 노동시장의 젠더격차를 강화·유지하는 중요한 기제가 된다. 청년의 노동시장 진입단계 성별 임금 격차를 분석한 최근연구(유정미 2017)에 따르면 성적, 어학연수경험, 자격증 개수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높은 수준을 나타내지만, 4년제 대졸 임금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은 남성 대비 여성임금이 79% 수준이며, 이 임금격차에 대한 요인분해 분석 결과는 공과계열을 제외한 일반 인문사회계열의 경우 인적요인보다 수요측면의 차별적 요인이 크게 우세하다고 보고하고 있다. 통계청 고용관련 조사에서 청년층의 이직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는 것도 임금과 좋지 않은 일자리 여건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기업규모 간, 나아가서는 원하청 간 임금 및 일자리 질의 격차 축소가 젠더 간 격차 축소와 긴밀히 연관됨을 알 수 있다.
경제 위기 이후 우리 사회에서 주로 관심을 집중한 노동시장의 격차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즉 고용형태별 격차였다. 이에 양자 간의 격차를 줄이고 정규직으로의 진입장벽을 낮추는데 (예컨대 정규전환 등) 정책이 집중되었다. 비정규정책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인색하지만 담론 효과를 포함해 격차 축소 효과가 없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우리 사회 혹은 정책이 놓친 것은 (대)기업들의 유례없이 활발한 사업의 탈각(disintegration) 에 대한 적절한 규제책이었다. 핵심이 아닌 웬만한 사업과 그에 따른 인력은 하도급, 프랜차이징, 심지어는 개인 사업와의 계약(independent contracting)을 통해 털어버렸고,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가 비용절약이었으므로 털어낸 대기업과 떨려난 혹은 사업수주를 받은 중소기업간 지불능력이나 일자리 질의 격차는 심화되었다(권현지 외 2015). 기업규모 격차가 내재된 젠더 격차를 줄이고 나아가 격차가 붙잡고 있는 대기업의 남성 중심 채용관행을 줄이기 위해서는 젠더평등 정책과 기업규모 간 격차 축소 정책이 효과적으로 병행되어야 한다. 차별적 채용과 임금 차별에 기여하는 각종 관행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규제 및 가이드라인 정책이 필요하다. 또 기업 간 공정거래를 위한 규제를 대폭 강화하고 중소기업의 지불능력 등 실력을 향상할 수 있는 다양한 정책을 고안, 실행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행정력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중소기업의 고용관행 및 노사관계에 대한 실질적인 모니터링 방안이 요구된다.
3. 장벽 허물기
앞에서 주로 기업규모 격차 및 관행과 젠더장벽의 관련성에 대해 서술했지만, 장벽은 물론 규모격차를 낳는 관행에 의해서만 지지되지는 않는다. 저출산을 예로 들자면 청년 여성들이 출산을 하게 하는 직접적인 인센티브에 초점을 맞춘 대개의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정책 관련자들은 이들이 더 이상 결혼과 출산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설계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대학 졸업 후 취업은 이제 여성에게도 거스를 수 없는 규범이고 이들에게 좋은 일자리가 주어지는 한 가족에 대한 책임 때문에 회사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은 적어도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보다 효과적인 출산 정책은 남성과 여성이 보다 안정적으로 직업생활을 영위하고 소득을 안정화하는 것, 그리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 강력히 규제되는 것과 연계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언제 직장을 떠나는지에 대한 보다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영유아를 돌보는 엄마의 역할이 교육과 자녀의 성취를 관리하는 엄마의 역할로 확대·전화되고 있다. 한국의 가족은 엄마가 소득활동을 하면서도 자녀를 밀착해 돌보기를 기대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엄마에 대한 이중적이고도 모순적인 압력이 가장 강한 사회다 (동아시아 사회서베이 2015) 과도하게 경쟁적인 교육시스템에 대한 개편 역시 여성의 직장 유지 장벽을 허무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 역시 직접적인 저출산 정책이나 고용정책이 아니라는 점에서 젠더장벽을 허무는 정책은 통합적으로(holistic) 접근될 필요가 있다.
여성들에게 일자리 장벽으로 작용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차별적 채용 관행이며,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일자리를 유지하고 싶지 않게 하는 기업의 관행이다. 이중 최근 미투국면에서 더 극명히 드러났지만 일터에서 빈번히 벌어지는 성적 괴롭힘을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괴롭힘 역시 중요한 장벽 요인이다. 최근 화제가 된 '직장갑질 119'에 제보된 아마도 중소기업에 종사하고 있을 수많은 을들의 외침을 들어보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온갖 종류의 괴롭힘과 부당과 차별이 일터에 만연하다. 존엄을 저버리게 하는 성적 괴롭힘도 적지 않다. 괴롭힘을 가하는 자는 직장의 상사, 동료를 포함해 관계기업의 갑, 고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뿔뿔이 흩어진 개인은 이런 괴롭힘과 부당에 목소리를 내고 맞서기보다 경우에 따라 임금도 포기한 채 직장을 떠난다. 이런 직장은 고용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다면 숨고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은 곳이다. 구성원에게 건강하고 안전한 직장을 만드는 것은 젠더장벽을 허무는 중요한 모멘텀을 만들 것이다.
앞서 언급한 기존 제도와 구조로부터 수혜를 극대화하려는 장벽 안 인사이더들의 전략도 장벽이 유지되는 중요한 요인이다. 이는 해당 실천을 의식적으로 단절시키는 적극적 반대 행위에 의해서만 제어될 수 있다. 사회전반의 공공이익을 증대시키려는 국가와 자신의 이해를 침해당하는 당사자의 결집된 집합 행동을 통해 가능하다. 국가에 의해서는 성평등의 실질적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추진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정책이 입안될 수 있다. 목표가 너무 멀다면 단기적으로는 적극적인 조치를 단행해 사회적 의식과 경험을 높이는 정책도 필요하다. 후자와 관련해서는 현재 거의 세계 최하위권에 속하는 기업 의사결정 이사회 및 고위임원 중 여성 비중을 획기적으로 높일 필요가 있다. 역시 적극적 조치가 필요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노동조합 조직률도 여성의 경우 5% 여에 불과하다. 여성이 집중된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의 조직률은 더욱 낮다. 대안적으로라도 일터에서 여성의 집합적 목소리가 만들어질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당사자에 의해, 기존의 노동조합에 의해, 그리고 정책입안자에 의해 구상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 권현지, 김영미, 권혜원 '저임금 서비스 노동시장의 젠더 불평등'(<경제와 사회> 107호. 2015)
- 권현지, 함선유 '연공성임금을 매개로 한 조직내 관계적 불평등: 내부자-외부자 격차에 대한 분석'(산업노동연구 23:2. 2016)
- 유정미 '청년세대 노동시장 진입 단계의 성별임금격차 분석'(한국여성학 33:1. 2017)
- 이상직,김이선,권현지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 남녀 대졸자 노동이력으로 본 위기 전후 한국 청년 노동시장의 구조 변화'(<경제와 사회> 118호. 2018)
- Tilly, C. Durable Inequalit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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