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한정판 사려고 줄 선 우리들...소유의 고통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한정판 사려고 줄 선 우리들...소유의 고통

[인문견문록]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한국인 정신건강 빨간불 우울감 경험률 주요국 중 최고'
'출근만 하면 우울 직장우울증 아니세요?'

'한국인 정신건강' 관련을 검색하자 나오는 것이라고는 이런 우울한 뉴스뿐이다. 자본주의적 산업화를 시작한 후 한국인들은 단 한 번도 편히 쉬지 못했다. 경제 성장은 우리 사회에서 물신(物神)이 된 지 오래다. 누구를 위한 성장인지, 무엇을 위한 성장인지를 묻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경제 개발이 시작된 지 수십 년이 흘렀지만, '우리는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자본주의적 경제성장만이 유일한 답이라는 상식에 반기를 든 사람이 에리히 프롬이다. 프롬의 명저 <소유냐 존재냐>(최혁순 옮김, 범우사 펴냄)가 출간된 해는 1976년이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미국 주도로 통합된 세계자본주의 경제가 최대 호황을 구가하고 있던 때었다. 미국의 진보경제학자 크루그먼이 늘 오매불망하는 황금시대가 바로 이때다. 자본주의 최대의 황금기에 자본주의적 삶에 의문을 던진 프롬의 문제의식은 뭘까?

지난해 출근길에 홍대 부근에서 특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젊은이들이 이른 아침부터 수백 미터 줄지어 있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무슨 행사를 하나?'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서야 그 줄이 유명 브랜드의 한정판을 사기 위한 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긴 줄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의 문제의식에 공감할 수 있었다.

긴 줄은 현재 우리 사회 체제가 '소유에 집착하는 사람을 통해서만 이익을 관철시키는 체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무엇을 갖고 싶다는 욕망을 우리는 개인의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프롬은 개인의 욕망조차 사회시스템에 의해 조종될 뿐이라 말한다. 출근길에 본 긴 줄, 그 줄이 계기가 되어 프롬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프롬은 욕망의 무한정한 충족은 인간의 복리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청년들은 '내가 좋은데 무슨 지적질이야!'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한정판에 목매는 심리가 대중매체에 의해 조장된 것이라면, '내 마음'은 결코 '내 마음'이 아닌 게 된다. 프롬은 현대인이 자기 생활의 독립적 주인이 되지 못하고 관료제란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어, 사고도 감정도 대중매체에 조종당하고 지배되고 있다고 말한다.

프롬은 사람들의 감정조차 대중매체에 의해 조종된다고 지적한다. 남한예술단의 평양공연을 보다 문득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이토록 애절한 노래가 많을까? 사랑의 애절함이란 보통 사람들의 삶에 어떤 비중을 차지할까? 감정조차 진솔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과잉된 감정은 포장된 채 소비된다.

갱스터래퍼들은 거친 욕과 스웨그(swag)로 체제에 반항하지만, 이런 반항적 자의식은 오로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되기 위한 상품일 뿐이다. '하남주공아파트' 래퍼 아이언의 인기는 그가 내뿜는 반항적 이미지 위에 쌓인 모래성일 뿐이다. 그가 실제 폭력 사건과 연루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인기도 식어버렸다. 현대 사회는 감정 과잉을 유도하고, 그 감정은 그대로 소비된다. 감정은 체제에 순화되는 방식으로만 유통된다.

프롬은 눈부신 경제적 진보조차 풍요한 나라들에 국한되었으며 선진국과 저개발국의 격차는 더욱 커졌다고 한다. 프롬은 사람들은 현재의 사회경제체제에 적응된 생활양식으로 살아가게 되는데 이것은 결국 병든 인간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이 경제체제의 발전은 이제 '무엇이 인간을 위해 좋으냐?' 하는 질문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무엇이 체제의 경제성장을 위해 좋으냐?' 하는 질문에 의해 결정되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이런 생각을 '배부른 소리'라고 평가 절하해 왔다. 많은 것을 소비하고 많은 것을 축적할 때 행복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 왜 그토록 진지하게 매달렸을까. 즉, 최종 목적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운영하는 세계통계사이트(ourwolrdindata.org) 이미지를 살펴보자. 지도는 약물중독자를 포함한 전 세계 정신건강 관련 환자의 비율을 보여준다. 붉은색이 진할수록 정도가 심함을 나타낸다.

특징적인 것은 부유한 나라는 예외 없이 짙은 붉은색이라는 점이다. 복지학자들은 신자유주의적 영미 자본주의보다 복지친화적 유럽 자본주의가 낫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통계는 영미식이나 유럽식이나 모두 심각한 수준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이 전력으로 추구해도 도달하기 어려워 보이는 나라들이 정신질환으로 고통 받고 있는 것이다. 이 통계는 '성장'이라는 물신주의의 최종 결과가 어떤 것인지 말해준다.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의 문제도 아니다. 사회주의를 진지한 대안으로 생각하는 프롬이지만, 그는 소련식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한다. 세계 체제론자 월러스틴이 소련식 사회주의를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하위시스템으로 평가 절하했듯 프롬도 소련식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의 원리와 동일하게 작동된다고 비판한다.

"공산주의자는 계급을 폐지해서 계급투쟁을 종식시킨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허구다. 왜냐하면 그들의 체제는 생활의 목적을 한없는 소비원리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바꾸는 수준의 혁명으로는 어림없다. 사회가 소비 원리로 구축되어 있고 사회구성원의 마음도 소비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프롬이 제기한 삶을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는 '소유'이며 다른 하나는 '존재'이다. '존재'라는 방식의 삶을 프롬은 이렇게 표현한다.

"'존재'라는 말로 나는 어떤 것을 소유하지도 않고 또 소유하려고 갈망하지도 않으면서 즐거워하고 자기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며 세계와 하나가 되는 삶의 양식을 표현하고 있다."

사람들이 '소유'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프롬은 언어의 변화를 추적해 들어간다. 프롬의 인간 분석 백미는 언어의 변천을 인간의 심리 상태와 연결해 이해한 것이다. 과거 2, 3세기 동안 서구의 언어에서 명사의 사용이 많아지고 동사의 사용이 적어졌다고 프롬은 분석한다.

'소유하다'라는 행위는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행위가 아니다. 히브리에서 '가지고 있다'는 '그것은 내게 있다'라고 간접적으로 표현된다. 사적 소유가 진행되면서 소유의 개념이 발전해 온 것이다. 프롬은 많은 언어에서 소유를 지칭하는 언어가 없었다는 사실을 첨언한다. 얼마 전 간 북한산 입구에는 '벌 쏘임 뱀 물림 위험'이라는 간판이 있었다. '쏘임', '물림'처럼 동사를 명사형으로 바꿔 사용하는 사례가 늘었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 사용의 변화는 의식의 변화를 일정하게 반영한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사회의 기능을 조절하는 규범은 그 구성원의 성격(사회적 성격)까지도 다르게 형성한다. 자본주의의 기초는 개인적 소유에 있다. 소유에 집착하는 소유양식형 사회적 성격은 자본주의를 작동시키는 원동력이다. 소유에 대한 집착은 인간의 가장 근본인 '자아'개념까지도 바꾸었다. 프롬은 소유양식이 바꾼 '자아'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본질적인 점은 자아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도 자아가 우리들 각자가 소유하는 어떤 물건으로 느껴지며 그리고 이 '물건'이 동일성(정체성-필자 주)의 감각의 기초가 된다는 그 점이다."

소유양식에 대립하는 삶의 방식으로 프롬은 존재양식을 말한다. 존재양식이란 무엇인가? 존재양식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소유양식이 관계하는 것은 물건이며 존재양식이 관계하는 것은 '경험'이기 때문이다. 프롬은 존재양식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존재양식의 기본적 특징은 능동적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분주하다는 외면적 능동성의 의미가 아니라 자기의 인간적인 힘을 생산적으로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내면적 능동성의 의미이다."

"푸른 유리는 빛이 통과할 때 파랗게 보이는데 그것은 유리가 다른 빛깔을 모두 흡수해서 통과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즉 푸른 유리는 푸른색의 파장을 보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유하고 있는 것에서가 아니라 방출하는 것에 의해서 명명되는 것이다."

프롬은 존재양식적 삶은 소유양식을 줄여나감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프롬은 자신을 비우고 또 비워야 존재양식의 삶이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프롬은 사회적 성격에 대해서 '개인의 정신적 영역과 사회경제적 구조의 혼합'이라고 정의한다. 한 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조는 그 구성원이 '해야만' 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하도록 사람들의 사회적 성격을 형성한다. 프롬은 철저한 사회혁명을 성취하면 자동적으로 혁명적 사회에 맞는 새로운 형의 인간들이 나오게 된다는 속류 마르크시즘을 반대한다. 또한 인간의 본성을 바꾼 후에만 참된 인간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정신주의적 접근법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그는 구조와 심성의 동시변혁만이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프롬의 설명에 따르면, 16세기부터 이어진 자본주의사회에서의 대중들의 주된 사회적 성격은 권위주의적, 강박적, 저축적 성격이었다. 부를 축적해가는 데 안성 맞춤형인 것이다. 공동체가 무너지고, 믿을 건 가족밖에 남지 않았을 때 가족은 아버지의 권위 아래 뭉친다. 또한 시장에서 성과를 내야 한다는 끊임없는 강박만이 사회의 승자로 올라설 수 있다. 승자의 성과는 돈으로 축적된다. 프로이트가 묘사한 환자 대부분이 권위주의적 성격이었다. 이 성격은 자본주의의 발달과 맞물려 있다.

20세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사회적 성격이 시장적 성격이다. 프롬은 시장적 성격을 "자신을 상품으로 경험하고 자기의 가치를 사용가치로서가 아니라 교환가치로 경험하는 성격"이라고 말한다. 이 시장적 성격의 목적은 시장의 모든 조건 아래에서 선호되는 인물이 되기 위한 철저하고 완전한 순응이다. 타인의 본래적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기에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에 대해서는 극단적 혐오도 서슴지 않게 된다.

프롬이 말하는 '시장적 성격'을 접한 뒤, 그동안 가지고 있던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았다. 예의 바르고 온순해 보이는 청년들이 나이에 따른 위계질서와 군기를 잡는다. 1살 나이에도 형 동생이 되고 위계가 설정된다. 위계 안에서 위에는 순응하고 아래를 향해서는 무게를 잡는다.

청년들의 권위주의 문화는 유교의 폐습과 결이 다르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맞물려 사람들의 성격도 권위주의적이고 시장적 성격으로 변해간다. 청년들이 보이는 사회적 성격의 심각성을 예리하게 잡아낸 책이 사회학자 오찬호가 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개마고원 펴냄)이다. 빈부양극화의 희생자임을 주장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방대를 '지잡대'로, 같은 대학이라도 수시로 입학한 학생을 '수시충'으로, 지역균형발전으로 들어 온 학생을 '지균층'으로 부르며 차별한다.

얼마 전 초등학생들이 엄마를 촬영한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린 일이 있었다. 모든 존재가 단순한 대상이 되어버리고 상대에게 연결된 정서적 유대감이 사라질 때 엄마조차도 유튜브 조회수를 올리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자식을 소유양식을 통해 대하는 부모는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해 지나치게 간섭한다. 이런 '헬리콥터맘'의 행위는 아이들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프롬은 "어린이의 성장과정과 아동기 이후의 인간의 성장과정에 대한 타율적인 방해가 정신적 병리, 특히 파괴성의 가장 깊은 근원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 문장은 최근에 더욱 심해지고 있는 혐오의 감정이 어디에서 발화하는지에 대한 의외의 단서일지도 모른다.

프롬의 책 <소유냐 존재냐>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뛰어난 통찰을 든다면, 신념에 대한 설명이다. 그는 '신념은 소유양식에 있어서는 아무런 합리적인 증명도 없는 대답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고정된 정답에 대한 신념은 진정한 의미의 신념이 아니다. 그것은 물건에 대한 소유양식이 생각으로 전이된 것에 불과하다. 프롬은 소유양식의 신념에 대비해 '존재양식에서의 신념은 우선 어떤 관념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내적 지향이며 태도'라고 말한다. 그는 진정한 신념은 미리 만들어진 정답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고, 신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현대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소유냐 존재냐>는 사회의 바람직한 변화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성찰적 관문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