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노동기구(ILO)는 노동 안전과 건강에 관한 관심을 촉구하고 산업 재해를 방지하기 위해 4월 28일을 세계 노동 안전과 건강을 위한 날로 정했다. 또 1996년 국제노동조합총연맹(ITUC)은 4월 28일을 노동자 추모일로 정해 캠페인을 벌여오고 있다. 2001년 ILO도 이 날을 노동자 추모일을 인정했다. 2002년에는 세계 노동 안전과 건강을 위한 날이 유엔 세계 기념일로 공식 지정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4월보다는 7월에 노동 안전과 건강에 관한 관심을 촉구하고 산업 재해를 방지하기 위한 활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7월 2일은 30년 전 서울 영등포의 한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던 열다섯 문송면 군이 수은중독에 걸려 병마와 씨름하다 숨진 바로 그날이다.
또한 이 날은 반도체 공장에서 발생한 직업병 피해로는 사상 최악인 삼성전자가 일방적으로 피해 보상을 선언한 것에 저항해 고 황유미의 아버지 황상기 씨를 비롯한 희생자 가족과 노동시민단체인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가 서울 강남역 8번 출구 앞에서 천막노숙농성을 한 지 1000일을 맞은 날이기도 하다.
원진레이온, 915명의 직업병 환자와 230명의 희생자를 기록
7월에는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한 산재·직업병 사건이 또 있다. 30년 전 7월 22일은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이황화탄소(CS2) 중독 참사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 날이다. 915명의 직업병 환자와 현재 230명의 희생자를 기록하고 있는, 대한민국 최대, 최악의 직업병으로 자리매김한 이 비극은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역사이기도 하다.
"총을 쏴서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살인죄로 처벌하는데, 화학약품으로 노동자들을 죽게 한 기업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는다. 이대로는 안 된다."
황상기 씨는 요즘 들어 삼성백혈병과 산재예방 촉구 집회 등이 열리는 날이면 빠지지 않고 참석해 마이크를 잡고선 피를 토해내듯 절규하고 있다. 그는 2일 1000일 농성 맞이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 집회에서도 비를 맞으며 11년 전 백혈병으로 숨진 자신의 딸과 문송면과 원진레이온 희생 노동자를 떠올리며 산재 희생자 없는 대한민국을 염원했다.
문재인 정부는 올해 초 자살, 교통사고 사망과 더불어 산재사망 줄이기를 국민생명 지키기 3대 프로젝트로 정했다. 산재사망이 우리 사회 주요 화두임을 알고 선언한 것이다. 해마다 2000명 가까운 노동자들이 산재사고와 직업병 등으로 숨지고 있다. 2016년 통계를 보면 1777명의 노동자가 숨진 것으로 집계됐다. 365일로 나누면 하루 5명꼴로 숨지는 셈이다. 국경일이나 휴일 등을 뺀 순노동일로 계산하면 하루 당 7명꼴로 숨지고 있다. 산재사망 줄이기에 온힘을 쏟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노동 현실인 것이다.
이대로라면 산재사망 절반 줄이기는 연목구어
하지만 과연 2022년까지 산재사망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을까?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노동자의 생명을 지키겠다는 대통령의 선언이 아직 국민의 기억에 또렷한데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는 벌써부터 목표 달성이 불가능하다며 한 발 빼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와 산재·직업병 전문가들도 우리 사회가 지금과 같은 소극적인 산재 예방 노력과 구멍이 숭숭 뚫린 법·제도로는 노동자 생명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문송면 죽음 뒤 30년이 지났건만, 원진레이온 참사가 30년 전에 대한민국에 일대 지진을 일으켰건만, 황유미가 11년 전에 우리의 가슴을 후벼 파며 원통하게 세상을 떠났건만 지난 30년 동안 기업주와 정치인, 관료들의 노동자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변한 게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7월을 맞아 산재로 희생된 노동자들을 진정으로 기리는 사람들은 '살아오는 문송면·원진 노동자, 함께 걷는 황유미'를 외친다. 이는 이들의 오래 전 죽음과 참사 이후에도 우리 사회는 이들을 죽은 상징으로만 여겼으며 함께 걷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그래서 이런 슬로건으로 이들의 죽음과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30년간 권위주의 정권과 보수정권, 진보정권이 서로 교차하며 권력을 잡았고 산재직업병 문제를 잡고 씨름했지만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거의 없다. 이황화탄소 직업병 참사 이후 물질안전보건자료(MSDS) 제도와 평생건강관리수첩 제도 등을 새로 도입하는 등 산업보건 제도 혁신을 가져왔다고 이야기들 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문송면, 원진·삼성전자 노동자, 안전교육 전무
30년 전 문송면과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다루던 물질이 얼마나 위험한지, 또 어떻게 하면 위험을 피할 수 있는지 단 1초의 교육도 받지 못했다. 그 뒤 20년 가까이 지난 뒤 거대 글로벌 기업이라고 하는 삼성전자에서도 황유미를 비롯한 노동자들이 유해물질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거나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지금도 많은 노동 현장에서 물질안전보건자료나 산업안전보건법은 휴지조각이나 다를 바 없다. 이는 2년 전 삼성전자 휴대폰 제작 3차 하청업체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메탄올에 다량 노출돼 집단 실명한 사건에서 그대로 입증됐다.
대기업들은 중대 산재 사고가 나더라도 책임을 면하기 위해 위험 작업을 소기업이나 영세업체에 하청 주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위험의 외주화는 실제 작업을 한 하청기업들만 처벌토록 만든다. 관리감독 책임이 있는 대기업들은 미꾸라지처럼 처벌의 그물망을 유유히 빠져나간다.
이런 일그러진 행태를 우리 사회가 법으로 계속 용인한다면 산재사망 절반 줄이기는 연목구어(緣木求魚), 즉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잡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지난 30년간 해오던 방식으로는 결코 산재사망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없다. 행정·입법·사법부의 최고 책임자들이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이 곧 시민의 안전과 건강임을 제대로 안다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비롯한 노동자·주민 알권리 강화 요구 따위를 더는 외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요구를 노동계와 문송면·원진30년 추모사업회 등이 입이 부르트도록 부르대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언제 이루어질지 점치기 어려운 게 솔직한 진단이다. 하지만 이런 현실을 깨부수지 않는 한 하루 7명 이상의 비정규노동자, 하청노동자, 청소년 노동자 등 사회취약계층 등이 산재로 숨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산재 사망자 72%는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
정부 통계를 보면 노동자 1만 명 당 사고사망자 비율, 즉 사고사망만인율은 2014년 1.24명에서 2016년 0.53명까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 뒤로는 정체 상태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앞서 우려한 바대로 하청사업자, 소규모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가운데 사고사망자 비율이 높다는 사실이다. 사고사망자 중 하청노동자 비중은 16%를 차지하고 있다. 또 50인 미만 사업장의 산재사고 사망자 수가 전체의 72%를 차지하고 있다. 산재 사망사고가 건설(51.5%), 제조업(23.9%) 등에 대부분 몰린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노동 현장의 안전은 결코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 문제로만 그치지 않는다. 원진레이온 주변 주민들은 70년대부터 심각한 악취와 대기오염 공해에 시달렸다. 국내 최대의 석면방직공장에 있던 부산 제일화학 주변 주민들도 환경성 석면질환인 악성중피종에 걸려 고통을 겪고 있다. 2012년 경북 구미의 휴브글로벌이란 중소기업에서는 불산 주입 작업을 하던 노동자들이 불산누출로 숨진 것은 물론이고 인근 주민 건강과 농작물이 큰 피해를 입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전국 곳곳에 있는 석면시멘트 공장의 인근 주민들도 대거 진폐증과 만성폐쇄성폐질환에 걸려 힘든 삶을 겨우 살아가고 있다.
직업병과 환경병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우리는 그동안 직업병과 환경병을 별개로 여겼다. 직업병은 노동자들만의 문제로만 보았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작업환경이 열악하면 직업병 피해 노동자들이 대거 생기게 마련이고 환경성 질환도 거의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로 자리 잡고 있다.
문송면 사망·원진 직업병 30년을 맞이한 우리 사회가 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려면 기업의 비밀과 이익이 우선이 아니라 노동자의 생명과 알 권리가 먼저임을 모두의 뇌 속에 각인시켜야 한다. 또한 노동자의 안전이 곧 시민의 안전이며 노동자의 안전을 소홀히 하는 기업은 망하고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기업은 흥하도록 만들어 나가는데 모두가 손잡고 함께해야만 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