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장님, 우리나라는 정말 돈이 없는 겁니까?" 폭염이 이어지던 오후였다. 폐지를 가득 실은 손수레를 밀던 박 할아버지가 잠시 숨을 고르며 내게 물었다. "뉴스에서는 세계 10위 경제대국이라고 하는데 왜 우리 같은 사람은 갈수록 살기 힘들어지는 겁니까?"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정말 가난한 나라일까. 아니면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돈을 어떻게 모으고 어떻게 쓰는지에 대한 합의가 없는 나라일까. 며칠 뒤 정부는 새로운 세제개편안을 발표했다. 언론은 곧바로 둘로 갈라졌다. '부자 증세다', '기업을 옥죄는 정책이다' 누군가는 환영했고, 누군가는 반대했다. 그 논쟁을 보며 나는 박 할아버지의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우리나라에는 정말 돈이 없는 것일까.
세금은 늘 '누가 더 내느냐'의 문제로 흘러간다. 재정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의 눈에는 세금은 다른 의미로 보인다. 세금은 국가의 수입이 아니라 국가가 어떤 사회를 만들겠다는 약속이다. 어디에 돈을 쓰겠다는 선언이고, 누구를 먼저 보호하겠다는 가치의 표현이다. 좋은 세금은 많이 걷는 세금도 아니고 적게 걷는 세금도 아니다. 필요한 만큼 걷고, 공정하게 걷고, 납득할 수 있게 쓰는 세금이 좋은 세금이다. 이번 세제개편안에서 내가 긍정적으로 보는 대목도 있다. 부동산 과세의 기준을 단순히 집의 숫자보다 보유한 자산의 가치와 부담 능력에 맞추려는 방향이다.
두 사람을 한번 놓고 보자. 서울 강남에 시가 30억 원 짜리 아파트 한 채를 가진 김 씨가 있다. 반면 지방에서 시가 3억 원 짜리 아파트 한 채와 부모에게 물려받은 1억 원 짜리 낡은 시골집을 가진 이 씨가 있다. 김 씨의 부동산 자산은 30억 원이다. 이 씨는 두 채를 가지고 있지만 모두 합쳐 4억 원이다. 그런데 세금이 '몇 채를 가졌느냐'를 지나치게 중요한 기준으로 삼으면 30억 원을 가진 김 씨는 '1주택자'가 되고, 4억 원을 가진 이 씨는 '다주택자'가 된다. 나는 이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세금은 집의 숫자에 매기는 벌금이 아니다. 부담할 능력에 따라 공동체의 비용을 나누는 제도다. 집 한 채를 가진 사람이 반드시 서민인 것도 아니고, 두 채를 가진 사람이 반드시 부자인 것도 아니다.
30억 원 짜리 한 채와 4억 원 짜리 두 채를 앞에 놓고 어느 쪽의 부담 능력이 더 큰지를 묻는다면 답은 어렵지 않다. 그래서 부동산세의 질문도 바뀌어야 한다. '당신은 집이 몇 채입니까?'가 아니라 '당신은 얼마의 자산을 가지고 있습니까?'라고…. 이번 세제개편에서 내가 의미 있다고 보는 것은 바로 이 질문의 변화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서울에는 평생 한 집에서 살아왔을 뿐인데 집값이 크게 올라 종이 위에서는 자산가가 된 노인들이 있다. 반대로 수십 억 원의 금융자산을 보유하고도 상대적으로 적은 부담을 지는 경우도 있다. 이 둘을 같은 잣대로 볼 수는 없다. 서울에서 40년 넘게 한 집에 살아온 78세 최 할머니. 남편과 함께 젊은 시절 어렵게 마련한 집이다. 살 때는 평범한 집이었다. 그런데 주변이 개발되고 집값이 오르면서 어느 날 그 집의 가격이 20억 원이 됐다. 최 할머니의 생활이 20억 원 짜리가 된 것은 아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받는 연금과 얼마 안 되는 생활비가 한 달 소득의 대부분이다. 집값이 올랐다고 냉장고에 반찬이 더 생긴 것도 아니고 통장에 현금이 들어온 것도 아니다. 집을 팔지 않는 한 20억 원은 최 할머니에게 생활비가 아니라 숫자에 가깝다. 반대편에 65세 김 씨. 집은 전세로 살지만 예금과 주식, 채권 등 금융자산을 30억 원 가지고 있다. 배당과 이자에서도 매년 상당한 소득이 발생한다. 한 사람은 20억 원짜리 집에 살지만 당장 쓸 돈이 부족하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집은 없지만 30억 원의 금융자산에서 계속 소득이 나온다. 누가 더 세금을 부담할 능력이 있는가.
집값이라는 숫자 하나만 놓고 최 할머니를 '부자'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하고, 집이 없다는 이유 만으로 김 씨를 상대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보는 것도 이상하다. 자산의 크기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자산의 성격과 실제 소득, 현금 흐름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 재정은 숫자를 다루지만 세금은 결국 사람에게 부과된다. 좋은 조세제도는 숫자만 정확한 제도가 아니라 그 숫자 뒤에 어떤 삶이 있는지까지 볼 수 있는 제도여야 한다. 이 사례의 핵심은 "20억 집 가진 노인은 세금을 내지 말자"가 아니다. 담세 능력은 있는데 당장 현금이 없는 사람에게 세금을 면제할 것인가, 납부 시점만 늦춰줄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나는 고령 실거주자에게는 무조건 감세가 아니라 납부유예가 더 공정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사는 동안에는 부담을 덜어주되, 자산이 처분되거나 상속될 때 사회와 약속한 몫을 정산하는 방식이다. 사람도 지키고 원칙도 지키는 길이다.
기업에 대한 세제지원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미래 산업을 키우기 위해 기업을 지원할 수 있다. 반도체도, 인공지능도, 첨단산업도 필요하다. 그러나 세금을 깎아주는 순간 그 돈은 더 이상 기업의 돈만이 아니다. 국민이 함께 투자한 돈이다. 그렇다면 질문도 분명해야 한다. 세금을 덜 낸 만큼 투자는 얼마나 늘었는가. 좋은 일자리는 얼마나 만들어졌는가. 지역경제는 얼마나 살아났는가. 성과를 묻지 않는 감세도, 성과를 묻지 않는 복지도 오래갈 수 없다.
이번 세제개편안의 가장 큰 아쉬움은 세율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앞으로 어떤 재정을 만들 것인지에 대한 큰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미 초고령사회에 들어섰다. 앞으로 의료비는 늘어난다. 장기요양도 늘어난다. 치매 돌봄도 늘어난다. 노인일자리도 더 필요하다. 고독사 예방도, 지역사회 통합돌봄도 더 많은 재정을 요구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정치권은 여전히 '누가 세금을 더 내느냐'만 이야기한다. 정작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앞으로 대한민국을 유지하는 데 얼마가 필요한가.그 비용을 어떤 원칙으로 함께 부담할 것인가. 복지를 말하면서 증세를 말하지 않는 것은 솔직하지 못하다. 반대로 증세만 말하고 정부의 책임을 말하지 않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 국민은 세금을 낸 만큼 정부를 평가할 권리가 있다. 기업은 혜택을 받은 만큼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 정부는 걷은 만큼 책임 있게 써야 한다. 이 세 가지가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재정은 신뢰를 얻는다.
세금은 숫자가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안심이다. 병든 부모를 돌보는 가족의 희망이다. 노후를 걱정하는 노동자의 미래다. 그리고 노인이 더 이상 폐지를 주우며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약속이다. 며칠 뒤 박 할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손수레에는 여전히 폐지가 가득 실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나라가 조금만 더 좋아졌으면 좋겠어요." 그 말에는 거창한 이념도, 어려운 경제학도 없었다. 단지 자신이 늙어도 버려지지 않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이 담겨 있었다.
세제개편도 결국 그 바람을 향해야 한다. 세금은 숫자로 시작하지만, 그 끝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우리가 재정을 논하는 이유도, 결국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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