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손혜진의 아름다운 우리가락] 짜여있지 않아 자유로운 우리 음악의 즉흥성, 그리고 재즈와의 만남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손혜진의 아름다운 우리가락] 짜여있지 않아 자유로운 우리 음악의 즉흥성, 그리고 재즈와의 만남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이다. 말복도 지나고 어느새 여름의 끝자락, 한낮의 열기가 한풀 꺾인 저녁이면 마음도 조금 느슨해진다. 이런 계절에는 격식을 갖춘 정통 클래식보다 어딘가 헐겁고 자유로운 음악이 더 어울리는 것도 같다. 밤이 깊은 재즈 바에서 연주자들이 서로의 눈빛을 주고받으며 즉흥적으로 선율을 나누는 장면을 떠올려 본다. 악보에 매이지 않고 그 순간의 감흥을 따라 흐르는 음악. 그런데 이런 즉흥의 미학이 서양 재즈만의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 음악을 절반만 아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전통음악에도 짜인 틀을 벗어나 그 순간의 호흡으로 완성되는 음악이 있다. 그것도 재즈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말이다. 이번 컬럼에서는 우리 음악 속 즉흥의 세계로 들어가 그것이 어떻게 오늘날 다른 장르와 만나고 있는지를 따라가 보려 한다.

다시 오지 않을 한 번의 연주 : 시나위의 세계

우리 음악에서 즉흥성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시나위다. 시나위는 본래 경기 남부와 전라도, 충청도의 이른바 시나위권 무당의 굿판에서 대금과 피리, 해금, 아쟁 같은 악기 연주자들이 무가 가락에 맞춰 즉흥적으로 연주하던 기악 합주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 합주의 방식이다. 여러 악기가 동시에 연주하되 미리 정해진 총보를 함께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가락을 그 자리에서 풀어낸다. 각 악기가 서로 다른 선율을 자유롭게 노래하는데 그 선율들이 겹치고 물리고 엇갈리면서 묘한 조화를 이루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를 '다성성(多聲性)'이라 설명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많은 이들이 재즈를 떠올린다. 정해진 코드 진행 위에서 각 연주자가 즉흥 솔로를 주고받는 재즈의 잼 세션과, 무악 장단 위에서 각 악기가 제 가락을 펼치는 시나위는 놀랍도록 닮아 있다. 뿌리도 문법도 다르지만, 짜인 악보 없이 그 순간에 완성되는 음악이라는 본질에서 둘은 깊이 통한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시나위는 아무렇게나 연주하는 음악이 결코 아니다. 정해진 틀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연주자에게 더 높은 경지를 요구한다. 장단의 흐름을 온몸으로 체득하고, 다른 악기의 소리를 순간순간 들으며, 그 위에 자신의 가락을 얹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로움은 오랜 수련 끝에야 비로소 허락되는 자유인 셈이다.

▲시나위 연주 ⓒ한국학중앙연구원

흩어져 흐르는 가락 : 산조의 탄생

시나위가 여럿이 함께하는 즉흥이라면, 그 흩어진 가락을 한 사람의 독주로 갈무리한 것이 산조다. 산조(散調)의 '산(散)'은 흩을 산 자다. 흩어진 가락이라는 이름 그대로 진양조에서 시작해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로 점점 빨라지는 장단의 흐름을 따라 연주자가 자신의 기량과 감흥을 펼쳐 나간다. 19세기 후반 영암 출신의 가야금 명인 김창조가 시나위와 판소리의 가락을 바탕으로 처음 선보였다고 전해지며, 이후 거문고와 대금, 해금, 아쟁 등 거의 모든 국악기로 확장되었다.

산조가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음악이라는 점이다. 스승에게서 제자로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연주자마다 자신의 해석을 더했고, 그렇게 여러 유파가 생겨났다. 같은 가야금산조라도 어느 유파냐에 따라, 나아가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결이 달라진다. 그래서 산조를 두고 흔히 살아 있는 유기체라 부르기도 한다. 고정된 악보 위에 박제된 음악이 아니라, 연주자의 숨결을 따라 매번 다시 태어나는 음악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 음악에는 즉흥이라는 유전자가 깊이 새겨져 있다. 흔히 전통음악이라 하면 오래되고 굳어 있는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그 안에는 매 순간 새로 빚어지는 자유로움이 살아 있었다.

경계에서 만나다 : 국악과 재즈, 그리고 그 너머

즉흥이라는 공통의 언어를 가졌기에, 우리 음악과 재즈의 만남은 어쩌면 예정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 역사는 생각보다 깊다. 사물놀이의 창시자 김덕수가 오스트리아의 색소폰 연주자 볼프강 푸쉬닉 등과 함께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표방하는 독일의 재즈 명문 레이블 ECM을 통해 음반을 낸 것은 한국 재즈계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회자된다. 근래에는 거문고 명인 허윤정을 중심으로 한 블랙스트링이 2012년 런던 재즈 페스티벌을 시작으로 뉴욕 링컨센터와 워싱턴 케네디센터 같은 세계 유수의 무대에 초청되며, 전통에 뿌리를 두되 재즈와 즉흥의 언어로 세계와 소통하고 있다. 시나위의 어법을 현대 재즈에 녹여 ECM과 인연을 맺은 니어 이스트 쿼텟(NEQ) 같은 팀도 있다.

장르의 경계를 넘는 흐름은 재즈에만 머물지 않는다. 판소리 수궁가를 팝의 문법으로 풀어낸 이날치가 '범 내려온다'로 국내외를 사로잡았고, 국악기로 포스트록과 헤비메탈을 빚어낸 잠비나이는 영국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무대에 올랐다. 이들을 아우르는 이름은 흥미롭게도 국악이 아니라 월드뮤직이다. 우리 음악이 세계 음악의 한 갈래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이런 만남이 무대 밖으로까지 번지는 경우도 있다. 올여름 잠비나이가 성수동의 한 화장품 브랜드 팝업 공간에서 선보인 공연은, 표도 좌석도 없이 거리를 지나던 사람이 우연히 국악 록을 마주하게 한 자리였다. 지난 6월 칼럼에서 국악 공연장의 심리적 문턱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이렇게 되면 그 문턱 자체가 아예 사라지는 셈이다. 관심 있는 사람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소리가 먼저 일상의 한복판으로 걸어 나가 낯선 발걸음을 붙드는 것이다.

이런 크로스오버가 반가운 가장 큰 이유는 관객의 문을 넓힌다는 데 있다. '국악은 어렵고 지루하다'는 인상 때문에 선뜻 다가서지 못했던 이들이 익숙한 밴드 사운드나 재즈의 리듬을 통해 우리 소리에 처음 귀를 기울인다. 젊은 세대가, 그리고 외국의 청중이 우리 음악과 만나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영국 TGE2019 코리아 스포트라이트 잠비나이 연주 ⓒ한국콘텐츠진흥원

융합의 명암, 그리고 남은 질문

그렇다면 장르를 섞기만 하면 언제나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은 듯하다. 이날치의 음악 감독 장영규는 한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신기해서 봐주는 것은 일회성에 그치며, 그들이 평소에 듣던 음악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였다. 곱씹어 볼 만한 통찰이다. 국악과 서양음악의 만남이라는 조합 자체는 이제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신기함만으로는 한 번의 눈길을 끌 수 있을 뿐, 두 번째 발걸음까지 불러오지는 못한다.

문화예술경영의 관점에서 보면 성공하는 크로스오버와 그렇지 못한 크로스오버를 가르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우리 악기와 서양 악기를 무대에 나란히 올려놓는다고 해서 저절로 융합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 음악이 만나야 할 필연적인 이유다. 시나위와 재즈가 즉흥이라는 공통의 뿌리에서 만날 때 그 결합에 설득력이 생기듯,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한 위에서 이루어진 만남이라야 새로운 하나가 탄생한다. 단지 이색적인 볼거리로 소비되고 마는 결합과 하나의 온전한 음악으로 남는 결합의 차이는 바로 거기서 갈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크로스오버가 활발해질수록 그 바탕이 되는 원형(原型)의 힘도 함께 지켜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날치의 뿌리에는 판소리가 있고 블랙스트링의 바탕에는 거문고 산조가 있다. 시나위와 산조라는 깊은 우물이 마르지 않아야, 거기서 길어 올린 새로운 음악도 계속해서 샘솟을 수 있다. 새것을 향한 실험과 옛것을 지키는 계승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서로를 살리는 관계인 셈이다.

자유로운 그 순간을 위하여

돌아보면 우리 음악은 오래전부터 자유로웠다. 굿판에서 악기들이 저마다의 가락을 주고받던 시나위에도, 연주자의 숨결을 따라 매번 새로 태어나는 산조에도, 짜인 틀을 넘어서는 즉흥의 정신이 흐르고 있었다. 그 정신이 오늘날 재즈와 만나고 록과 만나며 세계의 무대로 뻗어 나가고 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어느 저녁, 시나위 한 자락이나 산조 한 바탕을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그 안에서 매 순간 새롭게 피어나는 가락을 좇다 보면 우리 음악이 얼마나 자유로운 것이었는지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유가 바로, 우리 음악이 시대를 건너 지금도 살아 있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