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나는 군산의 한 골목 이야기를 했다. 밤 9시면 깜깜해지는 구도심 한가운데 자기 색을 가진 청년들의 작은 가게가 모여 환하게 빛나던 골목. 사람들이 한두 시간을 기꺼이 기다리던 그 불빛을 만든 것이 화려한 시설이 아니라 '사람과 개성'이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날 밤, 바로 그 골목의 한 와인바에서 나는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 내가 대전에서 왔다고 하자 옆에 있던 손님이 반색하며 물었다. "대전에도 구도심이 있던데 거기 이런 바 좀 소개해 주세요."
나는 잠시 멈칫했다. 식품을 공부하고 음식 기사를 써 온 사람으로서, 대전의 웬만한 곳은 다 다녀봤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머릿속에 단 한 곳도 떠오르지 않았다. 군산의 그 골목처럼, 외지 사람에게 자신 있게 "여기 가보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 부끄럽고, 또 아팠다. 왜 우리에게는 소개할 바가 없을까.
공간은 옛스러운데, 감성이 따라오지 못한다
대전의 근대역사 문화 공간 가운데 그나마 활성화된 곳을 꼽으라면 소제동이다. 오래된 철도 관사촌이 카페와 음식거리로 변신해 사람들이 찾는 동네가 되었다. 겉보기엔 군산과 비슷한 출발이다. 그런데 막상 걸어보면 결이 다르다.
소제동에는 작은 가게 사장들이 저마다의 색을 펼치는 풍경이 아니라 큰 자본이 들어와 프랜차이즈 못지않은 시설과 시스템으로 운영하는 매장이 눈에 띈다. 공간은 분명 옛스러운데 그 옛스러움을 채워야 할 감성이 따라오지 못한다.
낡은 관사의 외피 안에 매끈하게 표준화된 카페가 들어앉은 모습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군산에서 느꼈던 '그 사람만의 색'이, 이곳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비용 구조가 개성을 밀어낸다
왜 이렇게 됐을까. 나는 그것을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구조의 문제다.
일정 규모 이상의 매장을 운영하면 비용이 만만치 않다. 임대료, 혹은 건물을 마련하며 진 대출금, 인건비, 각종 운영비가 매달 묵직하게 나간다. 이 비용을 감당하려면 매장은 '개성을 살리는 쪽'이 아니라 '확실하게 수익을 내는 쪽'으로 방향을 잡을 수밖에 없다. 실험적인 메뉴보다 잘 팔리는 메뉴를 주인의 취향보다 대중의 평균을 택하게 된다. 규모가 커질수록 개성을 부릴 여유는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근대역사문화공간에는 대형화된 매장보다, 그곳 사장의 개성과 철학, 독특한 색을 담을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작은 매장이 훨씬 더 어울린다고. 군산의 그 골목이 증명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작아서 가능한 개성, 작아서 살아남는 색.
젠트리피케이션 — 개성을 죽이는 악순환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여기에 더 안타까운 역설이 있다.
구도심이라도 일단 사람이 몰리기 시작하면 임대료가 오른다. 자기 색을 내며 작게 장사하던 자영업자들은 이제 젠트리피케이션을 걱정해야 한다. 동네를 매력적으로 만든 바로 그 사람들이 동네가 떠오르는 순간 가장 먼저 밀려날 위기에 놓이는 것이다. 오른 임대료를 감당하려면 개성 있는 가게도 결국 더 잘 팔리는 대중적인 아이템으로 갈아탈 수밖에 없다. 동네에 활력을 준 개성이, 그 활력 때문에 사라지는 악순환이다.
이것은 비단 대전만의 일이 아니다. 서울 경리단길과 익선동, 전국의 수많은 '뜨는 동네'가 같은 길을 걸었다. 개성 있는 작은 가게들이 동네를 살리면 자본과 프랜차이즈가 들어오고, 임대료가 오르고, 원래의 색이 지워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느 순간 발길을 끊는다. 더 이상 그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눈이 골목을 살린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짚고 싶다. 한 가게를 살리고 죽이는 것은, 임대료나 자본 이전에 결국 소비자의 선택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어디에 지갑을 여느냐가 골목의 풍경을 만든다. 그러니 소비자에게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먼저, 개성을 알아보는 눈이다.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민 '가짜 문화'와 주인의 철학이 밴 '진짜 문화'를 가려 주는 것이다. 오래된 공간을 흉내만 낸 인테리어인지 그 자리의 역사를 살린 공간인지, 뻔한 메뉴에 그럴듯한 이야기를 억지로 입힌 것인지 정말 고민 끝에 나온 메뉴인지. 소비자가 이 차이를 선명하게 구분해 줄수록, 개성 있는 가게는 살아남고 흉내만 낸 가게는 설 자리를 잃는다.
다음은, 휩쓸리지 않는 소비다. 'TV에 나왔다', '어느 연예인이 다녀갔다', '유명 인플루언서가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찬양하며 줄을 서기보다 한 번쯤 그 가게의 속을 들여다보면 좋겠다.
사장은 어떤 사람이고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 이 메뉴는 어떻게 태어났는지, 이 공간의 구성에는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 이 가게는 무엇을 지향하는지. 화제성은 하루면 식지만, 철학이 있는 가게는 오래간다. 그런 가게를 알아보고 기꺼이 찾아 주는 소비자가 많아질 때 골목은 비로소 깊어진다.
물론 소비자의 현명함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또 하나의 축, 공공의 역할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정리하면 이렇다. 좋은 골목은 사람과 개성으로 만들어지는데, 정작 그 개성을 펼칠 작은 가게들은 비용과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두 벽에 가로막혀 있다. 현명한 소비가 한 축에서 개성을 떠받쳐 주더라도, 치솟는 임대료와 비용 앞에서는 한계가 있다. 시장에만 맡겨두면 개성은 결국 자본에 밀려난다. 군산의 그 환한 골목도, 성공할수록 이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품게 되었다. 개성이 비용 때문에 꺾이지 않도록 그리고 동네를 살린 사람이 그 동네에서 밀려나지 않도록 공공이 무언가 역할을 할 수는 없을까. 다음 글에서 그 구체적인 방법을 이야기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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