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3권을 펼쳤다. 김경한(金慶漢, 1944~) 항목의 마지막 줄이 눈을 잡아끌었다.
"2022년 3월 제20대 대통령선거 윤석열 지지 선언."
1981년 학림사건 조작, 1982년 송씨 일가 간첩단 조작, 1985년 김근태(1947~2011) 고문은폐, 1989년 안기부 고문수사관 봐주기, 2008년 촛불시위탄압. 이 이력의 끝에 윤석열(1960~) 지지선언이 있다. 하나의 이력이 아니라 하나의 계보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한 가지 구조가 보인다. 한국의 공안권력은 개인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학연과 지연으로 촘촘히 엮인 카르텔로 이루어진다. 김경한이라는 인물은 그 카르텔의 작동방식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경북고 43회, TK 사단 핵심 '경신회' 멤버
김경한은 1944년 2월 5일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경북중학교, 경북고등학교(43회),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1970년 제11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72년 검사가 됐다.
그런데 이 이력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그가 속한 인맥이다. 경북고 출신 법조인들의 비밀모임 '경신회' 멤버였다. 경신회는 1978년 창립해 경북고 30회부터 46회 졸업생까지 총 422명이 참여한 막강한 TK 법조 사조직이었다. 경북고 37회 정해창이 법무부 검찰1과장일 때 43회 김경한이 그 밑에서 일했고, 그 선후배 관계가 수십 년을 이어가며 서로를 끌어올려 주었다. 검사들의 세계는 넓어 보이지만, TK 공안 검찰의 세계는 경북고 동창회보다 좁았다.
세계사 속의 동류, 카르텔로 움직이는 공안권력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구조가 떠오른다.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는 개인이 아니라 네트워크로 작동했다. 특정학교와 지역출신들이 서로를 끌어올리며 권력을 유지했다. 그 네트워크 안에서 충성심을 증명하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조직이 원하는 일을 망설임 없이 해내는 것.
나치 독일의 친위대 법률부장 오토 티라크(Otto Georg Thierack, 1889~1946)는 나치 당원 카르텔 안에서 서로를 보호하며 사법부를 독재권력의 도구로 만들었다. 그는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카르텔의 일원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했다. 김경한도 마찬가지였다. '경신회'와 TK 공안 검찰 카르텔의 일원으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1981년 학림사건, 고문을 묵인하고 사형을 구형했다
김경한의 반헌법 행위 가운데 첫 번째 정점은 1981년 학림사건이다.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 교사, 노동운동가 수십 명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해 반국가단체 조직 혐의를 허위 자백했다.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 김경한은 안강민(1941~)과 함께 이 사건의 수사와 공판을 담당했다.
피의자들이 법정에서 고문을 호소했다. 김경한은 경찰수사관을 불러 압박을 가했다. 남영동에서 고문을 당한 피의자들은 검찰에서 부인하다가 다시 대공분실로 끌려갈 것이라는 공포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검찰은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같은 대학교재를 증거로 내놓으며 이태복에게 사형, 이선근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는 학림사건을 국가권력에 의한 부당한 인권침해로 규정했고, 2010년 재심에서 피해자들은 전원 무죄를 선고받았다. 29년이 걸렸다.
1982년 송씨 일가, 가족이 간첩이 됐다
같은 해 김경한은 임휘윤과 함께 '송씨 일가 간첩단 조작사건' 수사를 맡았다. 안기부가 청주와 서울에서 무려 116일간 불법감금하며 고문으로 조작한 사건이다. 피의자들이 검찰에서 부인하자 김경한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안기부에서 다시 연행되어 가는 수밖에 없다."
이 말을 들은 피의자 송기섭은 안기부에서 경험한 고문의 공포가 떠올라 온몸이 떨렸다고 진술했다. 협박의 기술이 이렇게 세련될 수가 있다. 주먹을 쓰지 않고도 공포로 입을 막는 방법.
검찰조서 작성과정에서는 안기부 수사관들이 아예 구치소에 들어와 참여했고, 피의자가 부인하면 검찰서기가 나서서 강제로 무인을 찍게 했다. 이것이 1982년 대한민국 검찰의 수사 방식이었다. 이 사건은 핑퐁재판으로 유명하다. 대법원에서 무죄가 나오면 안기부가 법원에 공작을 펴 유죄로 뒤집는 과정이 무려 일곱 차례나 반복됐다. 결국 2009년 재심에서야 무죄가 선고됐다.
1985년 김근태 고문, "고문받지 않았다"고 거짓말했다
1985년, 김근태(1947~2011)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전기고문을 포함한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이 사실이 법정에서 폭로되고 국제적 관심이 쏠리자, 미국에서 인권변호사들이 재판방청을 위해 한국으로 날아왔다. 법무부 검찰3과장 김경한은 이 미국변호사들의 방청을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차단"하는 역할을 맡았다.
미국법률가협회 총무 에이미 영 변호사가 법원 구내까지 들어왔지만 공안기관이 그녀를 끌어다 김경한 앞으로 데려갔다. 이때 김경한은 이렇게 말했다.
"김근태는 고문 받지 않았다. 아프지도 않다."
김근태는 나중에 이 말에 반문했다.
"그렇다. 나는 변호인 접견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한 차례 더 전기, 물고문이나 당하지 않았을까?"
거짓말쟁이와 고문피해자의 이 대화가 한국현대사의 한 장면이다.
1989년 안기부 고문 직무유기, 2008년 촛불탄압
1989년, 민미련 사건에서 안기부 수사관 김군성 등이 고문한 사실이 드러나 홍성담과 차일환이 검찰에 고소했다. 이 사건을 받은 서울지검 형사6부장 김경한은 안기부와 협의하며 시간을 끌었다. 내부 안기부 문건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김경한 부장검사는 정공법으로 대처, 무혐의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며 안기부에서 소명자료 제출 등 적극지원을 요망한다고 언급."
고문수사관을 수사하는 검사가 고문기관에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이후 검찰 퇴직 6년 만에 이명박(1941~) 정부 초대 법무부장관이 됐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시위가 일어나자 시민 200여 명을 무더기 기소하고, MBC 〈PD수첩〉 수사에서 PD와 작가들을 구속하고, 온라인 논객 미네르바를 구속했다. 법무부장관이 검찰총장을 제쳐두고 앞장서서 수사를 독려하자 "검찰총장 김경한"이라는 말이 검찰 안팎에서 퍼졌다. 2009년에는 노무현(1946~2009) 전 대통령 수사의 청와대-검찰 수뇌부 통로역할을 했다.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황태자'는 왕위계승자를 뜻한다. 한국검찰에서 '황태자'는 법무부 검찰1과장을 뜻했다. 권력의 핵심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자리. 김경한은 그 자리를 2년 이상 차지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쌓은 네트워크로 세 개의 정권에 걸쳐 공안권력의 핵심에 머물렀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김경한이 서명한 2022년 윤석열 지지선언을 떠올렸다. 학림사건의 고문을 묵인한 검사가, 김근태의 고문을 "없었다"고 거짓말한 검사가, 안기부 고문수사관을 무혐의 처리한 검사가, 촛불시위 시민들을 무더기 기소한 장관이, 검찰출신 대통령의 당선을 지지했다. 이 계보는 우연이 아니다. 구조의 필연이다.
『반헌법행위자열전』은 김경한의 이름을 기록했다.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구조의 이름으로.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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