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장애가 욕설로 사용되거나 약점이 될까 숨기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당당히 자신의 장애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드라마, 유튜브, 연극, SNS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대중의 편견을 깨부수고 있다. <프레시안>은 장애를 소재로 대중문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살아온 과정, 활동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들었다. 편집자
"코로나 시기마다 가던 곳이 있었어요. 바로 카페예요. 그렇게 힐링되는 공간이 없었거든요.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열을 재는 기계에 이마를 갖다 댔더니 '삑 정상입니다.' (…) 나한테 정상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오른팔이 휘어진 한 남성이 무대에 올라 코로나 시기 경험담을 소개했다. 위로나 연민을 받으려는 게 아니라, 오로지 장애 당사자만 할 수 있는 '자학개그'가 목적이었다. 정상이라는 소리가 좋아서 반복적으로 이마를 갖다 대다가 점원에게 제지당했다는 이야기까지 하자 객석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신의 장애를 웃음으로 승화하는 이 남성의 공연 영상은 최근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수십~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화제를 일으켰다. 누리꾼들은 장애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그의 모습을 응원하면서도 맞장구를 치듯 유머러스한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가장 많은 호응을 얻은 댓글은 다음과 같다.
"기계가 오류가 많긴 했음."
영상 속 주인공, 국내 1호 장애인 스탠드업 코미디언 한기명(31) 씨의 공연을 보러 지난달 28일 경기 수원시 갤러리아 백화점을 찾았다. 스탠드업 코미디는 오직 마이크와 입담만으로 관객을 웃기는 공연이다. 성, 정치, 장애 등 민감한 주제를 유쾌하게 풀어내는 게 특징으로 최근 유튜브와 SNS를 통해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한 씨는 자신을 "뻔장코"라고 소개하며 이날 함께한 5명의 코미디언 중 처음 무대에 올라섰다. 뻔장코는 '뻔뻔한 장애인 코미디언'의 줄임말로, 뻔뻔하게 자신의 장애를 희화화한다는 뜻과 '펀펀(fun fun)한 장애인 코미디언이라는 뜻을 모두 담고 있다.
소개말처럼 한 씨는 자신의 장애인 정체성을 '뻔뻔'하게 희화화했다. "안 웃거나 덜 웃는 분들은 꼭 지옥 갈 테니 많이 웃어 달라"며 관객을 협박(?)하더니, 장애인이기에 겪은 일상 속 에피소드를 하나씩 풀어나갔다. 관객들은 한 씨의 말솜씨를 즐기며 자연스레 그의 삶과 감정을 간접 체험했다.
"지하철을 타는데 제 옆에 앉아 계시는 어르신이 저를 보며 '아이고, 어쩌다 그렇게 됐어' 하시는 거예요. 조용히 가고 싶었는데, 그렇다고 어르신 말씀을 무시하면 안 될 것 같아 웃으며 말씀드렸어요. '아, 지하철 공짜로 타려고요' 이러면 반박을 못 하거든요."
한 씨가 국내 최초 장애인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된 배경에는 유년 시절 교통사고가 있다. 태권도 학원 차량에서 내리던 중 운전기사가 출발하면서 큰 사고를 겪었다. 7살이었던 한 씨가 6개월 동안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다 깨어나 처음 본 프로그램이 TV 프로그램 '개그콘서트'였다. 이때부터 한 씨는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선물할 수 있는 코미디언을 꿈꾸기 시작했다.
쉬운 길은 아니었다. 사고 이후 한 씨는 오른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 손도 사용하지 못하게 됐다. 지체장애인이자 뇌병변장애인이 된 것이다. 학창 시절엔 또래 친구들에게 '장기명'(장애인 한기명)으로 불리며 숱한 괴롭힘을 당했다. 한 씨는 괴로워하면서도 '어둡게만 지내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차별에 굴하지 않고 도전하자 도움의 손길이 닿기 시작했다. 20대가 된 한 씨는 코미디를 연습하는 모임을 찾아다녔다. 모임에서 만난 선배들은 격 없이 대해주며 "네 이야기를 코미디 소재로 써 보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한 씨는 2018년부터 자신의 장애를 소재로 스탠드업 코미디를 시작했고, 금세 관객은 물론 대중 및 언론의 주목까지 받았다.
"내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다는 게 너무 기뻐요. 사람들이 웃으면 해냈다는 마음에 희열감을 느끼거든요. 그래서 장애는 제게 너무 큰 강점이에요. 남들이 할 수 없는 개그를 할 수 있으니까요."
한 씨의 이야기는 노래로도 소개됐다. 가수 요조가 2022년 발매한 EP 앨범 '이름들' 서브 타이틀곡 'Tommy'가 그것이다. 토미는 외국인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하던 한 씨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에 붙인 이름이다. 과거 한 씨와 언론 인터뷰를 진행한 요조가 이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Tommy'를 만들었다. 자세한 노래 제작 배경을 묻는 말에 요조는 이렇게 답했다.
"웃음과 해학을 만드는 코메디 서사의 시작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상처나 결핍, 장애나 슬픔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기명님의 경우 그 아이러니가 더 극적으로 보여졌다고 해야할까요. 특히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없는 한쪽 팔에 토미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새로운 인격을 부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저도 모르게, 언젠가 '토미' 라는 이름의 곡을 만들어 노래하고 싶다는 고백을 했었습니다. (…) 이 노래를 듣는 모두가 기명과 토미의 사연을 아실 수는 없겠지만, 막연하게나마 담담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의 기운을 느끼셨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담았습니다."
한 씨의 코미디 철칙은 '타인의 장애가 아닌 내 장애를 가지고만 코미디를 한다'는 것이다. 장애를 희화화하는 코미디 방식은 사람들에게 쉽게 장애인의 일상을 소개할 수 있는 장점을 가졌지만, 선을 넘는 순간 다른 장애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코미디 철칙은 한 씨 특유의 이타심에서 비롯됐다. "부모님의 헌신과 의사의 헌신이 있었기에 내가 지금 여기 있을 수 있는 것"이라는 한 씨는 거주지인 경기 파주에 있는 노인복지관과 동물보호센터 등에서 매주 봉사 활동을 한다. 저녁 공연이 잡혀 있는 이날도 오전에 시간을 내 노인복지관에 방문해 배식 봉사를 하고 왔다.
삶의 목표 또한 더불어 사는 삶이다. "인생의 최종 목표"를 묻자 한 씨는 "배리어프리 복합문화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답했다. 한 씨는 2018년 스탠드업 코미디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도 스탭드업 코미디계에서 유일한 장애인이다. 앞으로 장애인 코미디언 동료가 생기려면, 코미디에 접근하기 어렵게 하는 각종 시설의 장벽부터 없애야 한다는 게 한 씨의 생각이다.
"어느 날 코미디를 기획하다 주변을 보니 비장애인만 있는 거예요. '왜 장애인은 여기 없을까?' 생각해 보니 장애인들이 문화공간에 다니기 불편하다는 게 먼저 떠올랐어요. 휠체어 이용자의 경우 턱이 있거나 문이 좁아서 공연장에 못 오는 일이 잦고, 시각장애인도 점자가 없어서 못 들어오는 경우가 있거든요. 공연하러 갔던 부산 해운대에는 '배리어프리 존'이 있었거든요. 그런 곳처럼 모두가 편히 와서 이용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장애인들이 스탠드업 코미디에 도전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는 또 있다. 무엇보다 국내 스탠드업 코미디계의 규모가 아직 크지 않아 유명 코미디언이 아닌 이상 공연으로 적정 수준의 수입을 얻기 어렵다. 공연비를 받지 못하는 '무페이 공연'도 많다. 나름 유명세를 얻은 한 씨도 적정 수입은 고사하고, 장애 인식 개선 행사 등을 제외하면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여전히 많지 않다.
한 씨의 경우 오는 5월부터 소속사 정규직으로 취업해 고정 급여를 받는다. 하지만 다른 장애인들은 제도적 현실이 발목을 잡아 쉽지 않다. 장애인 고용장려금의 최소 지급기준은 장애인 상시근로자 2명 채용이다. 이를 채우기도 부담스러워하는 작은 회사 다수가 장애인을 채용하느니 비장애인을 채용한다. 다른 분야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한 씨는 꿋꿋이 무대에 올라선다. 마치 '사람들과 행복을 나누고 싶다'는 열망 뿐인 사람처럼, 매 순간 어떻게 하면 관객을 웃겨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한 씨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묻는 순간에도 자학 개그를 던졌다.
"독자 여러분들에게 제 스탠드업 코미디를 많이 보러 와 달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저를 보러 왔다고 하시면 선착순 세 분에게 '감사'드리고 있어요. 딱 선착순 세 명이에요. 왜냐면 중증장애인은 1, 2, 3급까지거든요. 저는 1급이에요. 정치인으로 따지면 장관급이죠. (…) 앞으로 제 코미디에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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