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40년 사이, 병에 든 생수는 소수 부유층만 소비하던 사치재에서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소비재가 됐다. 1분에 약 100만 병의 생수가 소비된다는 연구가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1995년 먹는물관리법이 제정된 후 생수 산업은 급속히 성장했다. 1995년 하루 1280여 톤에 불과한 취수량은 2025년 5만 7000여 톤으로 40배나 늘었다.
그런 한편 세계 곳곳에선 정반대의 움직임도 점점 커지고 있다. "왜 우리가 물을 병에 담긴 걸로 사 마셔야 하느냐?"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면서다. 캐나다의 한 마을 주민들은 10년 넘게 투쟁해 생수 기업이 마을 지하수를 뽑아 가는 걸 막아 냈다. 어떤 이들은 "깨끗한 수돗물을 되찾자"며 수도 인프라를 바꿔냈고 전국 곳곳에 공공 음수대를 늘렸다. 당장 프랑스 파리에도 도심 곳곳에 1200여개 음수대가 설치돼 77%의 시민이 수돗물을 식수로 마신다.
미국 포틀랜드 주립대학교 사회학 교수 대니얼 재피의 <언보틀드>는 어쩌다 우리가 플라스틱병에 담긴 물을 마시는 사회를 정상으로 받아들이게 됐는지를 탐구한 책이다. 재피 교수는 2010년부터 2021년까지 10여 년간 미국, 캐나다, 멕시코, 브라질 등에서 관련 현장 연구를 진행했다. 그곳에서 만난 지역 주민과 풀뿌리 운동가, 물 산업 관계자, 수도 당국 관계자 등 100여 명의 인터뷰 내용을 종합해 책에 담았다.
<언보틀드>는 지하수와 수돗물이라는 저렴한 공공재가 어떻게 생수란 값 비싼 상품으로 변모했는지를 되돌아보며, 이 흐름에 저항해 공공적인 식수 공급의 대안을 마련한 현장 사례를 소개한다. 재피 교수는 물의 탈상품화를 주장하며 공공 당국이 관리하는 수도 시스템에 대한 비전을 회복해야 한다는 제안도 답으로 제시한다.
국가의 수도 방치 속, 병 생수 확장
생수가 "빛의 속도"로 급증한 흐름의 가장 밑바탕엔 긴축 재정을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가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70년까지 국가 주도 수자원 관리가 근간을 이뤘다면, 1980~1990년대를 경유하며 수도 민영화 바람이 세계 각국을 휩쓸었다. 미국, 유럽 대륙뿐 아니라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 등이 구조조정 프로그램으로 개입한 멕시코, 칠레 등의 남미 국가들도 해당한다.
재피 교수는 남반구 국가 중에선 인도네시아와 멕시코를 예로 들며, 국가의 빈틈을 생수 산업이 파고든 과정을 설명했다. 긴축 재정과 IMF 등이 강요한 민영화 프로그램 속에서 수도 보급이 널리 확산하지 못했고, 있더라도 안전하게 관리되지 못하며, 수도세를 넉넉히 낼 수 있는 부유 계층만 수도 서비스를 누리는 상황에서 인구 대다수가 '포장생수'에 의존케 됐다는 것이다.
수돗물에 대한 '공포 마케팅'도 강력했다. 재피 교수는 2000년대부터 최근까지 매체 광고를 장식한 생수 기업들의 수돗물 공격 문구를 열거했다. "수돗물은 독약"이라거나 "당신의 수돗물엔 해로운 박테리아와 오염 물질이 가득할지도 모른다"는 문구다. 한 컨설팅 업체는 2021년 "생수를 더 안전한 선택지로 만들어야 소비자가 계속 생수 시장에 관여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병 생수가 수돗물보다 꼭 더 안전하다고 볼만한 실증적 이유는 없다." 재피 교수는 미국을 예로 "수돗물에 대한 규제가 병 생수에 대한 규제보다 훨씬 강하다"며 "병 생수의 3분의 2가 사실상 연방 규제에서 면제된 반면, 대도시 수도 당국은 수돗물 상태를 하루에 한 번 이상 더 자주 검사한다"고 밝혔다. 미세플라스틱 등 플라스틱병에 내재한 유해 물질은 널리 알려진 문제다. 사실상 수도 당국이 직접 보고하지 않는 한, 생수는 오염되지 않은 상품으로 대중에 알려진다.
재피 교수는 납이 검출되는 노후 수도관 등 수돗물의 오염 문제도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정부의 긴축 재정이 노후 수도관의 위험을 방치한 결과였다. 비용 감축을 위해 오염된 강을 상수원으로 변경하고 화학 처리도 제대로 하지 않았던 2010년대 미국 미시간주 플린트강 사례는 유명하다.
수도 오염 문제에 대해 미국의 한 활동가는 재피 교수에게 간명하게 말한다. "더 엄격하게 규제하면" 된다. 그는 이것이 아니면 "더 많은 이들이 병 생수 쪽으로 가게 될 테고, 도시 당국에 수도 인프라를 개선하라고 압력을 가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재피 교수는 "수도관의 부식과 신뢰의 부식 둘 다를 해결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낡은 상하수도 시스템을 고치고 유지하고 개선하는 데 중앙정부의 지출을 극적으로 늘리는 것"이라고 밝힌다.
"지구의 모두에게 싸고 안전한 수돗물을"
책의 후반부엔 미국, 캐나다, 유럽, 남미 등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물 정의 운동' 사례가 열거 된다. 물 정의 운동은 '탈플라스틱'을 주장하는 기후·환경운동과 결합해 더 강력한 힘을 내고 있다. 십수 년 이어진 물 정의 단체들의 싸움으로, 유럽연합은 2025년까지 모든 회원국이 공공건물에 무료 식수 설비를 마련하고, 공공장소엔 음수대와 리필 스테이션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를 뒀다.
샌프란시스코의 '수돗물 되찾기 운동'도 눈여겨 볼 만하다. 이 도시는 2007년부터 모든 공공장소에서 620밀리리터 이하 일회용 생수 반입을 금지하고, 대규모 공공 행사장은 반드시 수도 시스템을 이용해 무료 수돗물을 공급하도록 했다. 용량은 추후 1리터로 늘었고, 국제공항에까지 확대됐다. 도시 내 거의 모든 공립학교에 음수대를 설치했고, 공공유틸리티위원회가 도시 수돗물의 수질을 대중교통 등에 광고로 게시한다. 이 예산은 청량음료와 가당음료에 부과되는 세금으로 충당된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대로 안전한 수돗물에 접근할 수 있다면 병 생수는 불필요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재피 교수는 이리 말하며 주 정부와 지역 정부가 공공 영역에서부터 병 생수 구매와 판매를 광범위하게 금지하고, 이를 위한 자금 조달 시스템을 개혁하며, 생수 업계의 과대광고나 수돗물의 질을 폄훼하는 선전 등을 규제하고 병 생수 안전성 규제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나아가 "무료, 혹은 거의 무료로 지하수와 수돗물을 추출하는" 생수 업계의 물 추출에 대한 규제도 더 엄격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은 수생 생태계나 인근 어획 자원, 주민의 생활·농업 용수와 대수층에 미칠 영향 등이 제대로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담수는 마땅히 공공재여야 하며, 시장에 맡기기엔 너무나 소중한 재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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