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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손 놓은 십대 위기여성들, 시민들이 대신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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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손 놓은 십대 위기여성들, 시민들이 대신 잡았다

시민 후원·각계 봉사로 운영되는 십대여성건강지원단 '나는봄'…"전국에 청소년친화공간 필요"

5일 오후 2시 서울 마포구 신촌 한 건물의 초인종을 누르자 사회복지사 이가희 씨가 밝은 얼굴로 맞이했다. 이 씨가 안내한 상담실에 들어가니 여성 청소년들과 활동가들이 격없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청소년 네다섯 명이 모이자 활동가들은 볶음밥을 준비해 그들에게 내줬다. 따스운 밥을 먹는 동안 청소년들의 웃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식사를 마친 청소년들은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거나 주방 옆에 마련된 진료실에 들어가 자신의 건강 상태를 살폈다. 이곳에서 청소년들을 무료로 진료하는 26년차 산부인과 전문의 이영희 씨는 "초음파 검사를 비롯해 감염질환, 자궁경부암 등 다양한 진료가 가능하다"라며 "난소혹 등의 경우 최대한 빠르게 해결할 수 있도록 다른 병원을 연계하는 일도 하고 있다"고 했다.

매주 목요일 청소년들에게 식사와 쉴 공간, 의료서비스를 내어 주는 이곳은 여성청소년건강지원단 '나는봄'이다. 지난해 7월 서울시가 십대여성건강센터 운영 종료를 결정하자 갈 곳을 잃은 위기 청소년들에게 조금의 돌봄이라도 제공하고자 같은 해 9월 문을 열었다. 시민 300여 명의 후원, 사회복지사·의사·간호사의 무료 자원봉사, 기쁨나눔재단의 공간 대여 등 수많은 선의가 모여 가능한 일이었다.

안식처가 필요한 위기 청소년들에게 나는봄은 전국에 몇 없는 편안한 공간이다. 경기도 파주, 충북 청주, 충남 천안 등 멀리서 찾아오는 청소년들이 많은 이유다. 공간적 한계를 넘고자 나는봄 활동가들은 온라인으로 전국 위기 청소년들의 고민을 상담하기도 한다. 이가희 씨는 "전북 등 수도권과 거리가 먼 지역의 청소년들이 온라인 상담을 많이 찾는다"라며 "인프라가 열악한 지역일수록 위기 청소년들이 도움을 청할 곳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5일 오후 2시 서울 마포구 신촌 십대여성건강지원단 나는봄 내부에서 활동가와 청소년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프레시안(박상혁)

나는봄의 전신인 십대여성건강센터는 성매매·성폭력·가정폭력·탈가정 등 여러 이유로 위기에 놓인 십대 여성들에게 긴급 피난처 및 의료지원을 제공하는 공간이었다. 활동가들은 통상적인 지원과 더불어 센터를 찾아온 청소년들의 안부를 묻고, 밥을 해 먹이고, 산책에 나가는 등 일상 회복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다.

가정, 학교, 쉼터 어느 곳도 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해 왔다. 지난해 <프레시안>이 만난 이용자들은 센터를 "집에서도 안 해주는 집밥을 해주는 친정"이라고, 활동가들을 "일상을 돌봐준 엄마"라고 말하곤 했다.(관련기사 바로가기 ☞: "집밥 해준 '친정'을, 일상 돌봐준 '엄마'를 왜 없애나요?")

하지만 서울시는 센터를 운영하던 민간업체와의 계약이 종료되자 새 업체를 찾아보지도 않고 폐쇄 결정을 내렸다. 고용승계를 하지 않기로 결정해 이용자들을 돌봐 온 활동가들을 모두 내쫓기도 했다. 시는 6개월가량 준비 기간을 두고 센터의 기능을 계승한 위기청소년 지원기관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위기 청소년들이 의지하던 '친정'과 '엄마'를 한순간에 없애 만든 상처를 지울 수는 없었다.

갈 곳 잃은 청소년들에게 '센터를 준비하는 동안 돌봄 공백을 최소화하겠다'는 서울시의 약속은 전혀 와닿지 않았다. 기존 센터를 이용하던 가정폭력 피해자 A(17) 씨는 <프레시안>에 "서울시로부터 심리상담이나 병원비를 도와주겠다는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다. 신규 센터가 열린다는 소식도 방금 처음 접했다"고 했다. 가정과 학교에서 모두 폭력을 겪었던 후기청소년 B(22) 씨도 "지난해까지는 종종 센터를 운영하던 민간업체로부터 심리상담을 지원받을 수 있었지만, 올해 1월부터는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16일 십대여성건강센터 나는봄이 운영 종료 후 문을 닫은 모습.ⓒ프레시안(박상혁)

활동가들의 헌신으로 돌봄 공백을 메우는 동안, 서울시는 센터를 정비해 지난달 말 '서울시 온라인 성착취 안심 ON 센터(아래 안심센터)' 운영을 시작했다. 변화한 성착취 구조에 맞춰 오프라인보다 온라인 대응에 무게를 두고, 인공지능 기술을 통해 성범죄를 선제적으로 차단한 뒤 구조한 피해자에게 긴급 상담과 산부인과 진료 등을 제공하겠다는 게 서울시가 밝힌 청사진이다.

나는봄에 모인 위기 청소년들은 이런 서울시 설명을 듣고 일제히 긴 한숨을 쉬었다. 그들 눈에는 다양한 범주의 위기 청소년을 지원하던 기존 센터의 운영 방향성이 디지털 성범죄 피해 지원으로 축소되는 듯해 보였다. 본인이 센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인지 고민하고 방문을 주저하게 만드는 것이다. A 씨는 본인이 신규 센터에서 지원받지 못할 것 같다고 걱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 경우 집에서 폭력을 겪어 집에 나왔어요. 학교도 적응하지 못해서 다니지 않고 있고요. 평소에는 쉼터에 있지만 아이들이 너무 많고 얘기하고 싶은 사람도 없어서 잘 어울리지 못해요. 하지만 나는봄(십대여성건강센터)에서는 선생님들과 편하게 이야기하고, 맛있는 밥도 먹고, 문제가 생기면 도움도 받을 수 있어 좋았어요. 서울시가 새로 만든 센터도 이런 지원을 해주는 기능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디지털 성폭력 피해 지원 위주로 한다고 하니 탈가정 청소년인 저와는 관련이 없어진 것 같아요. 지원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가 하나 사라진다는 느낌에 막막해요."

활동가들 또한 서울시의 청사진이 위기 청소년 지원이라는 목표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 같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가희 씨는 "성범죄 피해자여야만 갈 수 있을 것 같은 이름으로 센터를 운영하면 아이들에게는 도움을 청하는 데 있어 문턱을 높이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라며 "지자체가 운영하는 센터는 단순히 범죄현장을 잡고 치료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위기 청소년을 관찰하고 안부를 물어가는 연대 활동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했다.

▲십대여성건강지원단 나는봄에 설치된 의료기기. ⓒ프레시안(박상혁)

각계의 헌신으로 꾸려가는 나는봄이 언제까지 운영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기쁨나눔재단이 현재까지 약속한 공간 대여 기간은 올해 말, 시민들의 후원금은 청소년 지원비에 사용하기에도 빠듯하다. 활동가들은 실업급여로 생계를 충당하며 서울시가 하루빨리 위기 청소년들을 지원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신규 센터의 체제 개편 소식을 접한 뒤 공적 지원 체계에서 소외되는 위기 청소년들을 계속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봄 활동가들은 해외 사례를 참고해 전국에 보편성을 갖춘 청소년 지원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스웨덴은 전국 265개 유스클리닉을 설치해 만23세 미만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아웃리치, 상담, 진료, 식사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 또한 전국 60개 유스클리닉을 설치하고 청소년 및 20대 여성들에게 상담과 의료서비스 등을 제공한다. 이밖에도 미국, 호주 등 여러 국가에서 청소년들의 건강관리를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이영희 씨는 "해외 많은 국가들은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지원시설을 전국 각지에 설치하고 있다. 호주의 경우에는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도 다양한 의료서비스를 지원받을 수 있다"라며 "지원 범위를 넓히고 접근가능성을 강화해야 하는데 서울시는 이를 역행하는 구조로 새로운 센터를 만들려고 한다"고 우려했다.

이가희 씨도 "자신이 힘든 일을 호소할 수 있는 공간이 조금씩만 있어도 위기 청소년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급한 불부터 끄자는 마음으로 나는봄을 계속 운영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서울시를 비롯한 전국 지자체가 청소년 친화공간을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박상혁

프레시안 박상혁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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