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헌장은 무력행사의 요건을 두 가지로 명시하고 있다. 하나는 타국의 무력공격을 받았거나 이것이 임박했을 때의 자위권 행사이고, 또 하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이다. 그런데 3일 새벽(현지시간)에 자행된 미국의 베네수엘라에 대한 기습 공격은 어느 것도 해당되지 않는다.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는 뜻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자신의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는 규범이나 가치를 헌신짝처럼 내던져왔다. 그런데 이번 만행이 몰고 올 파장은 이전의 언행에 비해 차원을 달리할 공산이 크다.
미국은 베네수엘라에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축출하고 '친미' 정권을 세우면 석유 이권 장악을 비롯한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서반구의 지배력을 강화할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사례가 보여주듯, 친미 정권 수립은 '문제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지정학적 상황이 고삐 풀린 미국 패권주의가 맹위를 떨쳤던 2000년대 초반과 크게 달라지고 있다는 점은 더욱 큰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 2000년대 초반과는 달리 세계의 지정학적 판도에 있어서 러시아의 귀환과 중국의 부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약탈적 제국'을 자처하고 이를 방치하게 되면, 세계정세의 불확실성과 위험은 배가될 수밖에 없다.
당장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질 공산이 커졌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24시간 이내"에 종전을 이루겠다고 장담했지만, 1년이 지나도록 종전의 향방은 안개 속에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기습 작전으로 마두로 대통령 부부를 납치함으로써 러시아의 푸틴 정권도 유사한 유혹을 느낄 수 있다.
세계 정세에서 가장 중요한 양자 관계로 일컬어지는 미중관계의 앞날도 어두워질 수 있다. 치열한 경쟁과 갈등 양상을 보였던 미중관계는 작년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즈음에 열린 미중정상회담을 통해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특히 트럼프는 올해 4월 방중과 하반기 시진핑 주석의 답방을 통해 "큰 그림"을 그리겠다고 밝혔었다.
그런데 미국은 곧이어 대만에 역대 최대 규모의 무기 수출을 승인하고 이에 중국이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해 대만 포위 훈련을 강행함으로써 미중관계의 불확실성이 재소환되었다. 이 와중에 미국이 중국에 다량의 원유 수출을 해온 베네수엘라를 침공했다. 미국이 중국의 에너지 수입 옥죄기에 나섰다는 해석이 나오는 까닭이다. 중국의 맞대응 여부 및 그 수위에 따라 미중관계가 또다시 크게 출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무력을 동원한 미국의 베네수엘라 정권 교체 시도가 중국의 대만 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도 크나큰 변수이다. 최근 대만에선 '독립'을 강령에 명시한 민주진보당(민진당)이 세 차례 연속 집권한 상황이다. 이에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앞세워 대만의 분리·독립 저지 의지를 더욱 확고히 하고 있다. 양안관계의 긴장이 계속되고 있는 까닭이다.
특히 중국과 대만 모두에게 정치적으로 매우 예민한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내년은 시진핑 주석의 4연임 여부가 결정되는 해이고 대만에서도 2028년 1월에 치러질 총통 선거 유세가 본격화되는 때이다. 라이칭더 대만 총통이 재선에 도전하면서 독립 의지를 더욱 강하게 발신하고 중국이 이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질수록 매우 위험한 시기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럴수록 대만해협의 평화적인 현상유지는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무력이나 강압에 의한 중국의 현상변경 시도는 물론이고 대만의 분리·독립 시도도 없어야 한다. 그런데 양안관계의 현상유지를 줄곧 강조해온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무력에 의한 정권교체에 나섰다. 불법적이고 그릇된 선례가 양안 관계에 미칠 파장이 걱정되는 이유이다.
하지만 걱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정부와 민간을 막론한 국제사회는 러시아나 중국은 물론이고 대만도 무리수를 둬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를 위한 대전제가 있다. 미국의 불법적인 침공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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