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만능주의자와 유물론자 사이에서
셀린 송 감독에게 사랑은 모호하고 형용할 수 없는 대상이다. 손으로 부여잡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선 고통을 감내해야 하고, 갈피를 못잡는 감정의 용부림 속에서 헤매이는 걸 감내해야만 간신히 사랑을 논할 수 있다. 연애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이 범람하는 한국에서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는 것은 어쩌면 고리타분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회적 조건 없이도 운명적 만남을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은 2011년 <짝> 이후 폐기되어 버린지 오래다. 마음에 드는 사람들의 순위를 매기는 프로그램 출연자들을 지켜보는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다.
사랑의 크기를 손쉽게 줄세울 수 있다 여기는 시대 속에서 진지하게 사랑의 감정을 탐구하고 결혼의 조건은 무엇인지 따져 묻는 셀린 송 감독의 언어는 지극히 고루하다. 지금의 대중들은 더 빠른 속도로 감정이 어떤 결론에 도달하기 원하고 그 결과를 장르적 쾌감으로 소비해 버리는데 너무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셀린 송의 이질적인 애찬가는 더 흥미로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머티리얼리스트(materialist)'는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물질만능주의자'로 해석된다. 잉여자본의 축적을 최우선으로 두는 자본주의가 그 가치를 최우선으로 두는 자를 속칭 '속물(영어권에서 materialist는 부정적 뉘앙스로 통용된다)'이라 비아냥 거리는 모순이 이 단어 안에 내포되어 있다. 반면 마르크시즘적 관점에서 이 단어는 '유물론자'로 해석된다. 물질(material)이 세계의 근본이라 믿는 신념 안에는 자본의 작동 원리를 밝혀내고 그 원리에 지배되지 않으려는, 결국 자본이 신적 우위를 점하는 것이 아닌 그 조차도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다는 믿음이 이 단어에 내포되어 있다.
영화 <머터리얼리스트>는 제목에 중첩된 전혀 상반된 두 개념들 사이의 거리감 만큼 그 모순을 적극 활용하며 결혼 '시장'의 본질을 파헤치고 그 속에서 결혼과 사랑의 가치를 재발견하려 시도한다. 그 시도가 성공적이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셀린 송 감독이 제시한 문제의식, 과연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물질(자본)을 배제하더라도 사랑은 유지될 수 있을까?, 한국에선 이미 고루해져버린 이 질문을 새롭게 재사유하려 한다는 것 만으로도 <머터리얼리스트>의 가치는 인정해볼 수 있겠다. 단, 그 질문에 대해 감독이 제시하는 답을 과연 어떻게 바라보는게 좋을지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결혼 시장에서 사랑을 쟁취한다는 뻔한 서사
아홉 커플이나 결혼을 성공시킨 매칭 매니저 루시(다코다 존스)는 사람들에게 자신이야 말로 철저히 머터리얼리스트임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결혼 시장에서 사랑이란 불확실성에 매달리는 것은 지극히 부질없는 일이며 오직 서로가 원하는 조건들의 이상적인 결합을 통해서만 진정한 결혼이 성사될 수 있다 믿는다. 그녀에게 결혼은 "요양원 동지와 무덤 짝꿍을 찾는 일"에 불과하다.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결혼한다?! 루시에겐 가장 멀리해야 하는 신념이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를 독신주의자라 선언한다. 만약 결혼한다면 돈이 '아주' 많은 자와 하겠다며 자신의 속물근성을 굳이 숨기지도 않는다. 결혼 시장에 나온 '상품'으로서의 결혼 희망자들 또한 루시처럼 자신의 속물근성을 '속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혼을 위해서는 이러한 조건들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신념한다. 한 존재를 구성하는 사회적 작인들을 철저히 물질로 환원하여 하나하나에 점수를 부여하고, 그 결과 매겨진 사회적 계급 안에서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하는 결혼 시장의 작동원리를 고려 했을 때 루시는 분명 물질만능주의자임에 틀림없다.
감독은 그런 루시 주변에 두 남성을 배치한다.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가장 높은, 어쩌면 지극히 이상적이어서 그 가치를 따져볼 수 없을 정도로 희귀한 사모펀드 매니저 해리(페드로 파스칼), 배우가 되기 위해 케이터링 업체에서 서빙 알바를 하고, 세 명의 동료 배우들과 여전히 집을 나눠 쓰면서도 끝까지 고물이 되어버린 차 만큼은 포기하지 못하는 낭만주의자 존(크리스 애반스). 로맨틱 장르의 관습성을 고스란히 끌고 들어온 두 남자의 인물 배치는 노골적으로 루시의 물질적 신념에 시험을 주고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이도록 밀어붙인다. 그리고 뻔하게도 관습적으로 루시는 존을 최종 선택하며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도 물질적 가치들을 배제한 채 진성한 사랑만으로 결혼을 성사할 수 있음을 선보인다. 두 사람의 이상적인 결합은 (적어도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지극히 고루한 질문에 대한 지극히 고루한 결론에 불과할지 모른다. 낭만적 사랑만으로 결혼이 행복한 결말에 이를 수 있다 믿는 자가 과연 현 시대에 얼마나 있을지 회의감이 드는 필자에게 <머티리얼리스트>의 결말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결론이었다.
결혼을 유물론적으로 사유하기
그런데, 흥미롭게도, 영화를 보고 나온 뒤 머릿 속을 떠나지 않는 한 장면이 있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런칭한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의 결정적 장면. 한 번도 연애해보지 않았던 출연자들이 처음으로 연애 감정을 느껴보고, 그 혼란함 속에서 속앓이하는 모습을 브라운관 너머 안전지대인 집에서 관람케 하는 것이 핵심인 이 프로그램이다. 출연진 중 한 명이 "나 왠지 너랑 결혼할 것 같아"라고 말하는 8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군가는 모태솔로이기에 처음 느낀 감정만으로 섣불리 결혼을 떠올린 것이라며 그들의 설익은 판단들을 평가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필자에게 그 발언은 자기 감정에 대한 확신을 정확히 표현해낸 선언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혼'이라는 단어에 있지 않다. 결혼이란 결론에 도달할 정도로 현재의 감정이 나에게 불러일으킨 어떤 확신을 굳이 숨기거나 판단하지 않는 당당함이 존재한다. 이 프로그램의 출연진들이 지금도 여전히 사귀는 중인지, 프로그램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전히 결혼을 꿈꾸고 있는지, 그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순간 나의 모든 것을 강렬히 사로잡은 그 감정 앞에 솔직하겠다는 것, 그 확신이야 말로 물질적 가치들로 순위를 매기는 결혼 시장에서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태도 아닐까?
자신을 철저한 물질만능주의자라 믿었던 루시는 해리와의 관계를 정리하며 '결혼이 비즈니스인 것은 맞지만 그럼에도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이유를 밝힌다. 결혼을 사랑이 아닌 질병과 죽음을 함께 견뎌내는 동반자의 가치 속에서 발견하려 했던 그녀의 태도를 떠올려 본다면 그녀가 해리에게 주장한 사랑은 단순한 낭만적 감정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녀에게 사랑은 하나의 물질적 가치다. 이것이 사랑임을 확신하려면 상대의 모습에서 늙어가는 주름살과 상대를 닮은 자녀들의 이미지가 함께 상상될 수 있어야 할정도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이어야 한다. 루시는 어쩌면 물질만능주의자가 아닌 사랑에 대한 유물론자일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그녀는 낭만적인 사랑과 현실적 사랑을 구분짓는 자였다. 그녀는 결혼을 위해 전제 되어야 하는 데이트를 노력과 시행착오,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감내해야 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타인을 알아가기 위해 나 자신을 먼저 개방해야 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물질적 가치로서의 사랑은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신념이다. 사랑만으로 모든 것이 성사되지 않는다는 물질만능주의적 태도는 사랑을 절대화 하지 않으려는, 오히려 감내해야 하는 리스크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수용하는 것을 통해서 사랑이 완성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부터 비롯된다. 루시야 말로 그 누구보다 가장 현실적이고 냉정한 사랑주의자인 셈이다.
리스크를 감내하는 사랑이란
<머티리얼리스트>의 관습적인 인물 성장 서사는 이러한 루시의 가치들을 희석시키고 낭만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제공한다. 그것은 '로맨스'라는 장르가 지닌 한계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려 했던 셀린 송 감독의 야심이 낳은 한계 일지도 모른다. 물론 감독은 쇼트와 쇼트 사이, 상황과 상황 사이에서 발생하는 반전들을 통해서 인물의 고민과 내적 갈등들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낸다. 하지만 극장에 앉아 팝콘을 먹으며 스크린을 관망하는 관객들에게 이 모든 영화적 요소들은 한낯 익숙한 장치들에 불과할 뿐이다. 장르를 넘어 감독이 의도했던 바를 적극적으로 해석할 의무 또한 관객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머티리얼리스트>의 흥미로운 작가적 시선은 장르적 관습성에 희석되어 다가오는 이유다.
그럼에도 필자는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의 출연자가 말한 결혼과 루시가 말한 결혼 사이에 대해 계속 사유해본다. 두 사람이 이야기한 결혼의 가치는 분명 서로 동일하지 않지만 적어도 결혼에 대한 각자의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그들이 보여준 태도 만큼은 인상적이었다. 루시의 말처럼 리스크를 감당하며 나의 감정에 솔직해져 보는 것. 그 결과 타인으로부터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또 내가 상처를 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느낀 사랑의 감정을 대상화 하지 않고 오롯이 수용해보는 것. 적어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물질적 조건들로 평가 절하된 사랑의 가치를 다시 되새기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태도는 아닐지,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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