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샤샤처럼 꽤 오랫동안, 끝이 보이지 않는 검고 차가운 망망대해를 혼자서 오직 뗏목 하나에 의지해 떠도는 기분으로 산 적이 있어요. 그런 기분 느껴본 적 있으세요?"
"집 나와 고시원에서 살면서 월급의 대부분을 월세로 입금하러 갈 때, 그리고 입금하고 나서 통장을 볼 때 그런 기분이었던 것 같아요."
샤샤(활동명)와의 인터뷰는 대체로 차분했고, 이따금 조심스러웠다. 아직 스물 몇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 그 짧은 생에서 겪은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청계천 물줄기가 시원스레 흐르는 이스라엘 대사관 앞,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1인 시위에 나선 샤샤는 이따금 피켓을 눈여겨보는 행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외국인에겐 "Free Palestine(팔레스타인에 자유를)!"을 외치기도 했다. 씩씩했다. 하지만 그 씩씩함 뒤에 참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는 학교 밖 청소년, 탈가정 청소년,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청소년으로 자신을 정의한다. 만 24세까지를 청소년으로 보는 청소년기본법상 후기 청소년에 해당하는 20대 청소년 활동가이기도 하다.
만 19세가 되던 새해 첫날 집을 나오며 입고 나온 옷과 메고 나온 검정 백팩을 여전히 입고 메고서, 샤샤는 서울시 교육청 앞 A학교 공대위 집회와 고공농성 공동투쟁 목요일 문화제, 홈플러스 마트 노조 시위, 미아리 텍사스 불법 대출 피해 재판 방청연대 등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는 올해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두고 10년 동안 기른 긴 머리를 싹둑 잘랐다. 서울시 교육청 앞에서 학내 성폭력 문제 해결과 복직을 요구하며 삭발한 지혜복 교사에 연대하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 제 삶을 돌아보면, 청소년 문제에 가장 관심을 갖고 싸워온 일종의 청소년 활동가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교복을 입고 규칙에 맞춰 외형을 재단 당하면서, 그리고 트랜스젠더 성소수자 청소년으로서 여러 가지 부당함을 겪으면서, 자연스레 그에 맞서 싸우게 되었어요."

그는 20대의 '후기 청소년' 활동가
중학교 2학년 때, 학교를 돌아다니며 이른바 순찰을 하던 교장 선생님과 마주친 일을 샤샤는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교장이 샤샤와 친구들에게 다가와 고압적인 자세로 아무 말 없이 손만 내밀었다. 그들이 규칙에 위반되는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드를 들고 있던 친구가 어쩔 수 없이 그걸 건넸는데, 샤샤는 그 상황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규칙의 존재 이유는 재발을 막기 위한 것이고 훈육이란 그 과정이 교육적이어야 하는데, 이것은 당장 행동의 제지일 뿐 학생들을 위한 교육이 전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장 선생님께 의견을 말했지만, 교장은 무시하다시피 귀담아듣지 않고 교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샤샤는 그대로 교장실 앞에 주저앉았다. 점심시간이 끝나서 밖으로 나오려던 교장은 문 앞에 있는 샤샤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때는 뜻도 잘 몰랐던 '1인 시위와 점거'를 하고 있었다는 걸, 그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결국 교장이 저희 담임을 불렀고, 저는 담임에게 제가 한 행동과 그 이유를 말씀드렸어요. 교장의 태도가 부적절하다고 느꼈고, 그에 대해 답변을 요구했는데 답을 제대로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는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고요. 선생님이 그래도 수업은 들어야지, 하며 저를 회유하셔서 5교시가 끝나고 교실로 돌아갔어요. 그 뒤로 교장 선생님을 볼 때마다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돌리지 않았어요. 항상 교장 선생님이 먼저 눈을 피하셨죠."
트랜스젠더로서 학교에서 겪은 일들은 더 심각했다. 중학교 수학여행에서 그가 자고 있을 때, 친구들이 그의 몸 위에 여성 속옷을 올려놓고 어떤 행위를 하는 흉내를 내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서 SNS에 올린 일이 있었다. 하지만 교사도 학교도 그 일을 성폭력이라고 인정해주지 않았다. '네가 그러고 다니니까 그런 일이 생긴 것'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샤샤는 생물학적으로 '남자'였으므로.
고등학교 때 들었던 '동성 간 성폭력에 관한 교육'은 온통 남성 간의 성교가 에이즈를 유발하고, 동성애자들이 에이즈를 퍼뜨린다는 얘기뿐이었다. 샤샤는 교장에게 항의했지만 돌아온 것은 냉담한 무시였다. 결국 고등학교 2학년을 한 달쯤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책을 두세 줄 이상 읽을 수 없었고, 밖에 나갈 때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아주 크게 듣지 않으면 제정신으로 견딜 수 없을 만큼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2017년쯤에 남녀 분반이 시작됐고, 저는 남자반에 들어갔어요. 그때도 머리가 길었고 외모도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았는데, 주변 친구들의 괴롭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휙휙 기절을 했어요. 병원에 가서 뇌 검사도 해봤는데 아무 문제가 없대요. 그러면 보통 스트레스성 증상이래요. 1학년 때는 담임 선생님이 좋은 분이어서 괜찮았는데, 2학년 신학기 시작하고 얼마 못 버틴 거죠."
성소수자를 인정하지 않는 학교 교육에 맞섰던 청소년기
1학년 때 담임은 젊은 신입 교사였는데, 그 한 해 동안 반 학생 삼십 명 중에 열 서너 명이 자퇴했다. 교사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럴 만한 애들을 그 반으로 다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학교 현장이 학생들한테 부당할 때도 있지만, 약한 교사한테 부당한 경우도 적지 않다고 샤샤는 말했다. 책을 읽고 싶어서 독서 토론반에 가입했던 그는 소위 '양아치'들만 잔뜩 모여 갓 부임한 국어 선생님에게 맡겨진 모습을 보고 분노하기도 했다. 기존 교사들은 나머지 '정상적인' 아이들로 볼링이나 배드민턴, 영화 동아리를 꾸린 상태였다.
샤샤는 청소년 단체 활동 없이 그때그때 혼자서 '활동'했다. 교복을 바지와 치마 둘 다 입고 등교했고, 두발 제한을 지키지 않았으며, 수업 중 교사가 부적절한 발언을 하면 즉각 항의했다. 단체 활동을 하지 못한 이유는 성장기 내내 가정폭력을 심하게 당했기 때문이다. 그의 연장선상에서 핸드폰이나 인터넷 등을 사용하기 어려웠으므로 외부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2019년 1월 1일에 집을 나왔습니다. 2019년이 딱 만 19세가 되는 해인데, 만 19세가 되는 1월 1일부터는 청소년 가출이 아니라 성인 가출이 돼요. 청소년 가출은 가출했다는 사실만으로 무조건 추적이 가능한데, 성인 가출은 불법적인 일에 연루된 정황이 없으면 추적하지 않거든요. 가족이 날 찾을 수 없도록 등본 열람 제한도 걸어놨어요. 앞으로도 되도록 가족과 연락하지 않을 예정이고요."
샤샤의 정체성에 대해 들은 엄마는 처녀 귀신이 들렸다며 굿을 하려고 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교문을 닫을 때까지 운동장 벤치에 앉아 있었다. 늦은 저녁 집에 들어가, 운이 좋으면 가족과 마주치지 않고 혼자 저녁밥을 차려 먹을 수 있었다. 우울장애, 불안장애, 불면증, 주의력결핍장애 등을 앓았던 그는 집을 나온 후 스스로 정신과 병원을 찾아가면서 비로소 치료를 시작했다.
병원에 가는 건 오래 생각했던 일이다. 특히 트랜스젠더는 정신과에서 '성전환증'이라고 불리는 질병분류기호 F64 진단을 받는 것이 거의 필수적이라고 샤샤는 설명했다. 그 진단을 받아야 호르몬 치료 등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찾아간 병원은 성소수자 친화적인 곳으로 알려진 살림의원이다. 그곳을 꾸준히 다니면서 그동안 앓았던 정신 질환 치료와 함께 호르몬 치료를 받았고, 현재 성별 정정 소송도 하고 있다.
만 19세에 탈가정…혼자서 치료 시작
"집을 나와 처음에는 친구 집에서 살았는데, 얼마 뒤 친구에게 집을 비워야 할 사정이 생겼어요. 그래서 저는 청소년 쉼터에 가려고 서울에 있는 모든 혼성 쉼터에 전화를 해봤죠. 딱 한 군데서만 일단 와보라는 답이 오더군요. 그곳은 낮에 남‧녀 쉼터를 모두 운영하고 밤에는 여성 청소년 쉼터만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일단 그날 밤에 비어 있는 남성 청소년 쉼터를 쓰고 다음 날 아침엔 나가라는 거였어요. 다음 날 고시원과 일자리를 구하고 나와서, 숙식과 검정고시 등에 대해서 도움을 받으려고 학교밖청소년지원센터를 찾아갔죠."
지금은 LH 전세 대출을 받아서 살고 있고, 정신과도 꾸준히 다니며 치료 중이다. 작년부터는 이어폰으로 크게 음악을 듣지 않아도 밖을 다닐 수 있게 됐고 타인과 오래 대화하는 것도 괜찮아졌다. 여기서 조금 더 회복되면 다시 활동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작년 한 해는 글을 읽는 연습이나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소통하는 연습을 하는 데 보냈다. 수능 공부도 시작했다.
12월이 다가오자 샤샤는 이제 활동을 시작해 봐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에 관심이 많은 친구와 함께 연대 시위 등에 나가려고 준비하던 중, 공교롭게도 내란 사태가 터졌다. 그러니까 마침 나오려던 참에 때맞춰 광장에 나오게 된 것이다. 이후 그는 주요 집회들에 참석하는 한편, 여러 투쟁 사업장에 연대하고 발언하며 대표적인 말벌 시민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얼마 전 윤석열이 재구속되기 전까지는 ‘윤석열 체포 투쟁 청년 학생 실천단’의 일원으로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윤석열 체포 1인 시위를 열심히 했어요. 저는 지난 2월 28일에 서울시 교육청 앞에서 단지 지혜복 선생님 복직 시위를 했다는 이유로 연행돼서 유치장에 갇혔었는데, 내란 수괴 윤석열은 자유롭게 지낸다는 사실이 너무 부당하게 느껴졌거든요."
몸이 회복되면서 서울의 한 청소년 문화정보센터에서 인턴 일도 하고 있다. 아동·청소년들이 재활용품 등으로 창작 활동을 하는 것을 보조하고 지도하는 일이다. 서울시 학교밖청소년지원센터 꿈드림에서 청소년 자치운영위원회 활동도 했다. 여성가족부에 정책 제안서를 쓰는 일을 샤샤가 직접 담당해서 했고, 청계천 광장에서 부스를 열고 학교 밖 청소년에 대한 인식 개선 캠페인도 벌였다. 자신이 지금까지 받은 만큼 다음 세대의 학교 밖 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되는 경험을 나누고 싶었다.

"일상과 사회운동의 경계를 허무는 활동 하고 싶어"
광장에서 활동하다 '청년 사회주의자 모임'을 알게 됐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노동운동 등에 관한 강좌를 틈틈이 듣고 있다. 그는 스스로 사회운동으로 뛰어들기보다 "내 일상과 사회운동의 경계를 허무는, 가장 일상적인 정치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일하는 센터 벽에 '십대 여성 쉼터 폐지 반대' 포스터를 붙여도 되냐고 하니까, 왜 이렇게 작은 걸 붙이냐며 더 크게 인쇄해주셨을 때 눈물이 났어요. 지난 겨울 동안은 센터의 청소년들이 광장의 집회에 나간 부모님을 기다리며 센터가 닫는 시간을 물어볼 때도 있었고요. 그래서인지 아이들에게 서울시 교육청에서 연행돼서 유치장에 갇혔던 일이나 금속노조 거통고지회에서 '연대투쟁호'를 만든 얘기를 들려주면 낯설어하지 않아요. 그때 생각했죠. 아,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싶구나."
지난 윤석열 퇴진 광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경험이 무엇이었느냐고 묻자 샤샤는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었다고 답했다. 박근혜 퇴진 투쟁 때 페미니스트에게 야유가 쏟아지거나 노조 깃발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것을 보면서, 다 별개의 개인이고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번 광장에서는 나랑 같은 문제를 공유하지 않아도 나를 만나고 알게 된 사람들은 다 같은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이다. 인터뷰를 하면서 공통적으로 들었던 얘기다. 이번 광장은 이전과는 정말 달랐다고. 이유가 뭘까.
그동안 사회 구조적인 차별을 당하며 부당함을 느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몰랐던 사람들이 이번 광장을 겪으면서 노동조합 등 사회운동과 만났고, 행동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샤샤의 답이었다. 그 사람들은 그전부터 계속 소수자의 목소리를 내왔던 페미니스트와 성소수자들이고, 이번 광장의 주역이기도 했다.
"기존의 노동운동, 장애인 운동, 농민운동 등 각자의 사회운동과 여성 페미니스트들, 소수자들이 연결되고 만났다는 것. 그게 이번 광장의 힘을 만들어냈고 또 광장의 성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보면 맞을 것 같아요."
그러나 정작 이런 광장의 놀라운 성과가 기성 정치에 제대로 반영되고 있는가에 대해 샤샤는 심각한 의문을 표했다. 새 정부에 대한 실망은 김민석 총리 임명에서부터 시작됐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한 김민웅 목사의 동생이자, 동성애를 반대하고 차별금지법 반대 시위에 나섰던 사람이 바로 김민석이기 때문이다.
내란 내내 윤석열을 옹호했던 안창호가 위원장으로 있는 국가인권위원회는 2017년 이후 처음으로 올해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하지 않았고, 작년 5월부터 신청 서류를 제출한 변희수 재단은 인권위의 계속되는 심의 보류로 아직 재단 설립도 못 하고 있다는 점도 샤샤는 지적했다. 그의 의문은 집요하다. 이런 기성 정치가 과연 내란을 제대로 청산할 수 있을까. 기성 정치를, 아니 기존 시스템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이번 광장의 놀라운 성과, 기성 정치에 반영 안 돼
"당장 윤석열 정부 이후 여성가족부가 약화된 것에 저는 직격탄을 맞았어요. 제도 밖에 있는 사람들과 약자들에 대한 지원이 갑자기 크게 줄었고, 그건 학교밖청소년지원센터도 마찬가지였거든요. 센터에 가서 작년에 했던 지원을 올해는 왜 안 하느냐고 물어보면, 지금은 센터가 폐지되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실무자들이 자조 섞인 농담을 할 정도였죠."
이의 연장선상에서 그가 가장 말하고 싶은 것은 '단기적으로 제도 밖 청소년들의 생존, 장기적으로는 자본주의의 붕괴'라고 했다. 자본주의의 붕괴라.
"보호자가 없는 청소년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지붕과 옷과 음식이에요. 현재 한국에서는 이를 '쉼터'라는 일원적인 복지정책으로 해결하고 있죠. 그런데 다양한 이유로 쉼터를 이용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있어요. 남성 또는 여성에 해당하지 않거나, 쉼터에서 바라는 만큼 모범적인 사람이 아니거나, 채식 등의 이유로 쉼터에서 제공하는 지원에 타협하지 못하거나. 이런 청소년은 길바닥, 혹독한 노동환경, 죽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해요. 이 상황이 어떻게든 개선되었으면 좋겠어요. 제도 밖 청소년이 보호자나 지원제도가 없어도 살아있을 수 있도록."
샤샤는 한참 전부터 자본주의의 지속 불가능성을 느껴왔다고 했다. 그럴 능력이 되지 않았음에도 어려서부터 돈을 벌어야 했고,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는 정신건강 상태였지만 고강도 노동을 하다가 관절이 심하게 상하고 극심한 두통으로 계속 주사를 맞아야 하는 자신이 바로 살아있는 증거이므로. 말하자면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1인분'을 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두에게 똑같이 '1인분'이 요구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 최소한의 시작이 바로 자본주의의 붕괴라는 것이다.
"집을 나와보니 알게 되었죠. 사람답게 사는 건 두 번째고,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개인이 해야 하는 노력이 너무 많다는 것을요. 집도, 밥도, 일자리도, 정신 질환 치료도, 나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혼자서 찾아봐야 했어요. 그저 지붕 있는 집에 몸을 눕히고 매일 끼니를 굶지 않고 옷을 입기 위해서, 이 모든 걸 해내야만 최소한의 생존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힘들었어요."

그가 꿈꾸는 세상의 출발선은 '자본주의 붕괴'
이 막막한 세상에서 혈혈단신으로 배낭 하나 멘 채, 병원을 찾아가고 일자리를 찾아다닐 때마다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이 미약한 말 한마디가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이 말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샤샤, 너무 대단해요. 혼자서 지금까지 정말 잘 해왔어요."
잠깐, 그의 눈에 눈물이 비쳤다.
"다른 분들도 그런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그게 너무 힘들어요. 그럼 나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으면 살아남지도 못하는 거야? 저는 몸과 마음의 상태 때문에 풀타임 잡은 하기 어렵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요. 저처럼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상황에 처한 소수자들이 있을 텐데 그걸 개인의 노력으로 떠넘기는 사회가,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자본주의라는 것 자체가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아요."
그는 요즘 SNS로 도움을 요청하는 탈가정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알려주는 상담사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국가와 공공기관에서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구체적인 지원 내용은 어디를 찾아가면 알려주는지, 만약 가족이랑 법적 다툼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 등. 일생을 살아온 짐을 겨우 배낭 하나에 쑤셔 넣고서 집을 나오면 어떤 심정인지 그가 누구보다 잘 아니까. 자칫하면 죽음을 생각하던 때가, 사실은 거의 매일 그랬던 때가 그 역시 있었으니까.
이제 막 탈가정을 감행한 청소년들이 마주쳐야 하는 것은 당장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오직 그것으로 능력이 매겨지는 세상이다. 중졸 학력의 나이 어린 샤샤가, 성소수자에 각종 정신 장애까지 안은 그가 생존을 위해 헤쳐온 세상은 얼마나 냉혹했을까. '타인의 고통'이란 똑같은 입장이 되지 않고서는 결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사실은 자본주의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붕과 옷과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어른들도 매일 생존의 전장에서 피 흘려 싸우고 있다고.
"사회주의를 보통 급진적인 것으로 여기잖아요. 하지만 저는 그게 출발선이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자본주의의 철폐가, 돈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지 않는 세상이요. 그 뒤에 사람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너무 꿈같은 이야기 아니냐고요? 아니죠, 고작 출발이라니까요. 저도 제가 원하는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잘 모르겠어요. 아직 출발도 안 해 봤으니까요. 저는 적어도 그 출발선을 만들고 싶어요. 그게 제가 바라는 사회대개혁의 모습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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