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듣기까진 다 괜찮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배우는 거니까. 새로운 세상을 배워보겠다고 시작한 일 아닌가. 그런데 만화 주인공의 생일파티라니. 그걸 돈 내고 참석하러 간다니. 쓰읍, 심호흡부터 한번.
'남태령 미니스커트' 대학생 송채연 씨는 첫 번째 인터뷰를 한 후주 씨의 소개로 만났다(☞관련기사 : 연대하는 MZ·말벌 동지의 시작점, '남태령'의 핵심은 존중이었다). 12월 남태령 1박 2일 시위에 짧은 치마를 입고 와서 화제가 되었던 채연 씨는 이후 느낀 바가 있어 제주항공 참사가 일어난 무안공항 자원봉사를 비롯해 세종호텔,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거통고 지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등의 시위 현장에 부지런히 연대했다.
그 추운 날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밤샘 시위에 참여한 경위를 묻는 과정에서, 나는 미처 몰랐던 MZ세대의 새로운 문화를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홍대에서 열린 배구 만화 <하이큐> 주인공의 생일파티에 대해서.

"좋아하는 아이돌이나 만화 캐릭터의 생일을 맞아 팬들 중 누군가가 생일 카페를 차려요. 누구든 나서는 사람이 주최자가 되어서 카페를 하나 대관하는 거죠. 자원봉사자도 모집하고, 내부를 생일 주인공의 컨셉에 맞게 꾸며서 사람들을 초대해요. 참가자들은 음료값에 포함된 대관료를 참가비로 내고 구경하러 가고요. 주인공은 없지만 우리끼리 생일파티를 하는 거예요."
이런 소식은 대부분 X(옛 트위터)를 통해 공유된다. 최근 들어 X는 이렇게 '덕질'을 하는 2030 여성들을 중심으로 힙한 신세대 문화를 향유하는 공간이 되어 왔다. X의 특성상 새소식 전달 속도도 빠르다. 좋아하는 아이돌의 활동 소식, 소속사와의 분쟁 소식…. 여성들이 많다 보니 여성에 관련된 사회 이슈도 자주 공유됐고, 여론화되기도 했다. 그것이 이번 광장의 각종 집회와 활동 소식을 퍼 나르는 데까지 이어진 것이다.
페이스북 유저인 나도 이번에 X에 가입했다. 광장에서 공유되는 청년들의 소식을 따라잡을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X를 좀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12월 여의도의 응원봉 부대나 깃발 부대를 보고 놀라는 지인들에게 아는 척을 좀 했을 텐데.
"미니스커트는 그러니까 홍대 카페 방문을 위한 차림이었죠. 생일 카페에 갔다가 좀 일찍 끝나서 광화문 시위에 갔는데, 행진까지 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 안에서 트랙터가 남태령에 막혀 있다는 기사를 봤어요. 그날 트랙터가 온다는 건 X에서 보고 알고 있었거든요. 광화문에 트랙터가 올 줄 알고 갔다가 없어서 의아했는데…."
하필이면 아침부터 일정이 있어서 유난히 지친 날이었다. 종일 돌아다니다 보니 가방에 짐도 많았다. 더구나 시시각각 기온이 떨어지는 겨울밤에, 짧은 치마차림…. 가지 않을 이유가 훨씬 더 많았지만 채연 씨는 고민 끝에 내려서 반대 방향 전철을 탔다.
'생카' 갔던 차림 그대로…미니스커트 덕에 더 컸던 사람들의 선의
"남태령의 밤을 생각하면 너무 추웠던 게 제일 많이 생각나요. 제가 도착했을 때는 초반이어서 그런지 사람도 물자도 별로 없었고, 난방 버스도 없었어요. 치마 괜찮냐고, 춥지 않냐고 사람들이 자꾸 물어보고. 그런데 오히려 그 덕분에 다른 분들보다 더 따뜻하게 그날 밤을 난 것 같아요."
미니스커트 덕분에 채연 씨는 주변인들의 '집중 관리' 대상이 되었다. 도착하자마자 옆에 앉은 사람이 발바닥에 붙이는 핫팩을 권했고, 대열 사이로 들어가자 옆 사람과 뒷 사람이 각각 방석과 은박 담요를 건넸다. 구호 물품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면서 핫팩이며 장갑이 그에게 전달됐고, 새벽에는 아예 패딩 점퍼를 입혀준 사람도 있었다. 첫차를 타고 떠난 누군가가 뒷사람들을 위해 벗어 두고 간 것이었다.
남태령에서 채연 씨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것이었다. 서로를 도우려는 사람들의 선의. 공교롭게도 짧은 치마를 입은 바람에 그는 남들보다 한층 진하게 그것을 경험했다. 내 곁의 동료가 괜찮은지 돌보려는 마음. 추운 곳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걱정되고 미안해서 트친(트위터 친구)들과 십시일반으로 따뜻한 음식을 보내고 밤을 새 라이브 방송을 지켜본 마음.
"참 신기한 경험이었죠. 다른 시위들과는 너무 달랐어요. 남태령에서는 사람들이 보내는 선의랄까 염원 같은 것이 피부로 확 와닿는 느낌을 받았어요. 워낙 돌발적으로 발생한 상황이어서 더 그랬겠지만, 어떻게든 현장의 사람들이 춥지 않고 안전할 수 있도록 계속 지켜보고 물품을 보내주고 지켜준 사람들이 있었어요. 저는 그 안에서 그분들이 보내주는 것들로 그 상황을 버티는 특별한 경험을 했고요."
그날 밤 X의 '실시간 트렌드' 검색 순위도 모두 남태령이 차지했다. 그 새벽에 X 유저들은 모두 남태령 얘기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농TV'의 유튜브 라이브 방송이나 X의 현장 소식을 접하는 사람들은 계속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은 막차가 끊겨서 못 가지만 새벽에 첫차가 움직이자마자 달려가겠다고. 조금만 버텨달라고.
"새벽에도 여차하면 경찰이 진압해 들어오려고 했기 때문에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 정말로 큰 힘이 됐어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1000여 명 정도였지만 온라인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은 수만 명이 넘었으니까요. 이 사람들의 선의가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죽을 주문했는데 남태령역 3번 출구로 도착할 거예요. 시간 되시는 분 픽업 좀 해주세요.' 이런 글이 X에 밤새도록 올라왔다. 새벽 1시쯤에 올라온 글에 댓글이 없어서 채연 씨가 직접 역에 가 봤다. 역 앞에는 이미 열댓 명 정도의 급조된 자봉(?)들이 와 있었고, 그중에 한 사람이 진두지휘까지 하고 있었다. 채연 씨는 피자 픽업을 담당하기로 했다.
피자를 기다리다 너무 추워서 계단 아래로 조금 내려갔다. 이상하게 따뜻했다. 알고 보니 히터가 계속 돌아가고 있었고, 입구를 막는 셔터는 내려가 있었지만 역사 안엔 불도 환했다. 새벽 3,4시쯤엔 셔터가 열리고 여자화장실이 개방됐다. 선의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을 걱정해 운행이 끝난 역사의 전등과 히터를 차마 끄지 못한, 그러다 화장실까지 개방해 준 누군가를 통해서도.
"남태령은 다른 시위들과는 분명 달랐어요"
"그날 방한용품 등 정말 많은 물품이 들어왔는데 90프로 이상이 음식이었어요. 음식을 가져가서 나눠주는데 너무 많아서 남을 정도였어요. 뒤에까지 다 전달을 했는데도 남아서 먹은 사람이 또 먹을 정도로 많았죠."
아침 6시쯤 되니까 일종의 저체온증이 채연 씨를 덮쳤다. 그도 밤중에 자는 사람들을 깨우고 다녔는데, 그때쯤엔 본인이 그렇게 되더란다. 아침에 경찰차가 조금 뒤로 빠지면서 짧은 구간 행진을 했는데, 이상하게 몸이 쳐져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집에 가고 싶지 않아서 난방 중인 남태령 역사를 들락날락하며 7시까지 버텼다.
역사는 채연 씨처럼 잠깐 쉬는 사람, 옷을 덮고 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전철 운행이 재개된 때라 아래 층 승강장에서 내린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고 올라왔다. 다들 파이팅을 외치며 밝은 분위기였다. 누군가는 찢어낸 종이 박스에 보드마커로 출구 번호를 써서 들고 안내하기도 하고, 올라오는 사람들이 내려가는 사람과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이제 우리가 있겠다'고 말하는 모습이 꼭 바통 터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제 내가 여기 없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 아침 남태령 역에서 쏟아져 나온 수만 명의 동지들을 뒤로 하고 채연 씨는 7시쯤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탔다. 조금 있으니 아침 해가 떠올랐고 사람과 차가 분주히 오가며 평소와 같은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기이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추위에 떨면서 밤새 싸우던 그곳이 마치 꿈속이었던 것처럼. 남태령에 대한 뉴스나 기사가 별로 없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더 있을 걸 그랬나, 내가 없을 때 안 좋은 일이 벌어지면 어떡하지. 자꾸 후회가 되더라고요. 집에 도착했는데 잠이 오지 않았어요. 그러다 남태령 차벽이 뚫려서 트랙터가 한남동으로 향한다는 기사가 뜬 걸 봤어요. 이건 가야겠다 싶어서 이번에는 좀 따뜻하게 입고 다시 나갔죠. 그날은 저도 가슴이 막 뜨거웠었나 봐요."
채연 씨도 남태령을 경험하고 말벌 동지가 된 다른 사람들처럼 이전에는 집회‧시위에 나가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 지난해 9월에 혜화역에서 열린 딥페이크 관련 시위에 참석한 것이 처음이었고, 11월에 동덕여대에서 '과잠 반납 시위'가 열린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 과잠을 벗어놓고 온 것이 두 번째였다. 특히 남태령을 겪고 나서 그의 일상은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남태령 다음 주에 향린교회에서 열린 '남태령 집담회'에 갔어요. 어떤 분이 일어나 발표를 하시는데, 그날 남태령에 가지 못했지만 밤 11시쯤에 소고기죽을 보냈다는 거예요. 그런데 들어보니까 제가 먹은 음식이었어요. 얼마나 반갑던지요. 또 다른 분은 남태령에 밤새 있었는데 치마를 입고 있던 어떤 여자분이 걱정되더라고 하셨어요. 근데 인상착의를 들어보니까 저 같은 거예요. 그래서 제 발표 차례에 '아까 그게 저인데 이렇게 잘 지냅니다'라고 말씀드렸죠."

외롭게 싸우는 이들 없도록 '말벌 시민'이 되다
이후 채연 씨는 어디든 만사 제치고 달려가 연대한다는 '말벌 시민'이 되었다(자기보다 더 열심히 하는 사람들도 있다며, 정작 본인은 그 호칭이 부끄럽다고 했다). 혜화역에서 열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시위에 참가했고, 12월 31일엔 거제도에서 열린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거통고지회) 신년 해맞이 문화제에도 갔다. 다음 날 올라올 때 그는 따로 빠져서 제주항공 참사가 일어났던 무안공항으로 향했다.
나흘간 무안에서 숙식하며 자원봉사를 하고 집에 올라온 날,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서 밤샘 집회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키세스 시위대가 탄생한 그 집회였다. 어차피 집 나온 김에 하루만 더 밖에 있자 싶어서 짐을 풀자마자 한남동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5박 6일을 길에서 보냈다.
"1월 7일에는 거제에서 만난 거통고지회 노조원들이 서울 한화 본사 앞에서 밤샘 시위를 벌였어요. 그날 시위에 같이 참가하고, 다음 날 아침에는 세종호텔이 근처니까 가서 아침 선전전을 함께 했죠. 세종호텔 고진수 지부장님이 고공농성을 처음 시작하시는 날에도 갔어요."
거통고지회 노동자들과 연대 시민들이 함께 한 '무지개조선소'에서 '연대투쟁호' 만드는 작업도 했다. 배 안에 넣을 희망공을 만들고, 설 명절에 모여 배를 색칠했다. 이후 진수식에 참석해 배를 들고 광화문까지 행진도 함께 했다. 그전에는 사회 문제에 대해 잘 몰랐던 그는 그 짧은 몇 개월을 보내며 세상이 약자에게 얼마나 잔혹한지를 알게 됐다.
이번 광장의 경험을 통해 가장 남은 것이 뭐냐고 묻자, 채연 씨는 한참 생각하다가 '사람'이라고 답했다. 어떤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느꼈다는 것이다. 차별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들 곁에서 선뜻 함께 밤을 새 주는 사람들. 나라도 없으면 누군가가 다칠까 봐 같이 있어 주는 사람들. 내가 다른 이를 지켜주고, 그들이 또 나를 지켜준다는 느낌은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저는 사람을 그렇게 믿는 편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모이면 이렇게 아름다운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이번에 본 거죠. 우리의 작은 도움에 너무도 고마워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힘은 없지만 정말이지 이렇게 외롭게 투쟁하시는 분들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지금도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외로운 싸움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을 거거든요."
세종호텔 아침 선전전에 참여한 날 함께 한 시민은 대여섯 명이었는데, '지금까지 3년여 간 선전전을 하는 동안 오늘이 가장 호화로운 날'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 순간 그동안 그들이 느꼈을 외로움이 확 다가오는 것 같아 슬펐다고 채연 씨는 말했다. 내가 내밀 수 있는 작은 손길에 그토록 감동하고 든든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거제도 조선소도 버스 한 대였으니까 40명 정도가 간 건데, 그분들이 '이렇게 많이 올 줄 몰랐다, 너무 고맙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40명이 그렇게 많은 숫자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저희 준다고 선물까지 준비하셨고, 사비로 숙소를 잡아주시고 야식까지 시켜주셨어요. 심지어 강인석 부지회장님은 단식 투쟁 40일 차가 넘어가는 때였는데 저희한테는 음식을 아낌없이 시켜주시고 아침에 떡국도 끓여주셨죠."

광장 겪은 후 기자가 되겠다는 꿈 생겨
채연 씨는 그 뒤로 토요일 큰 시위만이 아니라 자신이 갈 수 있는 곳은 다 가겠다는 마음으로 여러 투쟁 현장에 참여했다. 대여섯 명의 연대에 '호화스럽다'고 하던 노동자들의 말이 잊히지 않았다. 그런 작은 시위들에선 한 명이라도 빠지면 큰 표가 난다. 그 소중한 한 명의 몫을 하기 위해,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매번 현장으로 향하게 된다고 그는 말했다.
그 현장들은 그를 더 깊이 생각하고 성숙하게 하는 배움의 현장이기도 하다. 12월 31일 거제도 조선소에 내려가는 날, 아침에 혜화역 전장연 시위를 마치고 나서 그는 노트를 한 권 샀다. 차를 타고 멀리 다녀오는 긴 일정을 앞두고, 여기서 뭔가 새롭게 알아가는 게 많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느낀 감상을 날짜별로 기록했다.
"거통고 조선소와 무안공항을 다녀오며 느낀 감상을 적은 종잇조각들, 아까워서 못 버린 피켓들, 남태령에서 받은 음식 봉지 등 기억해두려고 간직했던 것들을 모아서 스크랩북을 만들었어요. 시위에 참석한 날짜와 시간, 장소 등을 적고 특히 인상 깊었던 내용이 있으면 그것도 적어두었죠."
학교를 졸업하고 경찰이 되고 싶었던 채연 씨의 꿈은 이번 광장을 겪으면서 바뀌었다. 광장에서 만난 경찰들은 부당한 명령에도 따라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들로 비쳤다. 졸업 학기를 남겨두고 고민하던 그는 얼마 전 기자가 되고 싶다는 것으로 장래 희망을 수정했다. 이번 광장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에 영향을 받은 결정이리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장래 희망 이야기는 '2025년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20대 청년으로서 어떤 고민과 꿈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꿈 쪽이다. 이어 채연 씨는 고민 쪽도 털어놓았는데, 이쪽은 상당히 심각했다. 취직 문제는 어떻게든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린 문제지만, 사실은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더 큰 고민이 있단다. 바로 또래 남성들과 잘 공존할 수 있을까, 하는 것.
"제 친구들 중에 시위를 거의 안 나간 애들도 탄핵 표결이 나던 12월 14일 여의도 집회는 다 갔었거든요. 그날은 정말 중요한 날이었잖아요. 그때 좀 기이하다고 느꼈던 것이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넘기면 여자 친구들은 다 여의도에 있는 사진인데 남자 친구들은 또 다 비슷하게 주말이라고 볼링 치고 삼겹살에 소주 마시는 사진밖에 없더라고요."
집회에서 찍은 사진을 가끔 SNS에 공유했던 채연 씨는 한 남자 동기에게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렇게 정치적인 색깔이 있는 사진을 어떻게 남들이 다 보도록 SNS에 올리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니 14일 여의도에 있었던 사진을 다들 올리지 않았냐'고 했더니, 그 남자 동기는 자기 친구들은 아무도 안 올렸다며 채연 씨를 도리어 신기해했다.
그러니까 서로 삶과 생활의 바운더리가 너무 다른 거다. 채연 씨의 여자 친구들은 시위에 나갔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조차 겁낸다. 혹시 주변에서 무슨 소리라도 들을까 봐 눈치를 보는 것이다. 자신들이 마스크를 쓰고 딥페이크 시위에 나가는 동안, 남초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혜화역 시위 구경하러 간다. 가서 마스크를 가위로 잘라버릴 거야'라는 글을 보는 여성들은 무슨 생각이 들까.

요즘 고민은 '또래 남성들과 잘 공존할 수 있을까'
"저도 한때는 남자친구를 사귈 마음이 있었는데 점점 자신이 없어져요. 주변의 여자 동기들도 대부분 연애에 대한 두려움이나 거부감이 있어요. 가까운 친구들 중에 남친과 헤어진 뒤 스토킹을 당하거나 몰카 피해를 입은 사례도 있고요.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가 좋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안 좋은 사람일 가능성이 더 크니까, 그 리스크를 감당하느니 그냥 연애를 안 하겠다는 게 요즘 20대 여성들의 대체적인 생각인 것 같아요."
채연 씨의 말대로라면 젊은 세대의 남녀 갈등은 내가 상상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렇게 심각하다고? 채연 씨가 앞에 없었으면 마음속 탄식을 입 밖으로 뱉었을지도 모른다. 이번 광장에 청년 여성들이 많았던 것은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 인권 의식은 성장했는데 극우 남초 커뮤니티를 등에 업고 여성 주권자를 노골적으로 무시한 윤 정권의 처사와도.
그는 '이번 광장에 여성들이 많이 온 것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남성들이 오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왜 오지 않았을까.
채연 씨처럼 외모도 마음씨도 아름다운 젊은이가 이런 문제의식으로 고민을 하는 현실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그가 반드시 '남성을 통해' 행복해져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그의 말대로 그들은 앞으로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고 공존해야 하는 대상 아닌가. 이 세상의 반을 적으로 갈라놓고, '우리끼리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여성가족부를 존속시키겠다는 대통령이 나오면 될까. 남자 청소년들이 여혐 문화를 배운다는 커뮤니티 활동을 제한하는 법이라도 만들면 될까. 어떤 해결책을 모색하기엔 이미 혐오의 골이 일종의 문화 현상처럼 깊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 청년들이 서로에 대한 혐오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이 극한의 사회적 조건을 어떤 식으로든 개선하는, 더 멀고 긴 고민을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작은 문화충격으로 시작한 인터뷰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감동을 주었지만 결국 더 큰 문화충격으로 끝났다. 세상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채연 씨가 앞으로 더 나은 고민을 하고 행복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도 같이 고민해보기로 했다. 다음 인터뷰들이 그에 대한 답을, 아니 적어도 더 나은 질문을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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