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태안 석탄화력발전소 2차 하청노동자였던 선반 기술자 고 김충현 씨가 지난 2일 원청 지시로 기계를 가공하던 중 산업재해로 사망했다. 향년 50세.
김충현 씨는 생전 30여 년을 쉼 없이 기계 기술을 공부하고 훈련해 온 성실한 기술자였다. 기술의 더 좋은 쓰임새를 고민했던 그는 발전소에서 퇴사해 실생활에 필요한 기계공작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미래를 꿈꾸기도 했다.
1975년 경북 상주 출생인 그의 기술자로서의 삶은 고교 때부터 시작됐다. 경북 문경공업고등학교 기계과를 졸업했다. 기계조립에 재능을 보인 그는 전국기능대회 선수로 뽑히기도 했다. 해병대로 군대를 다녀온 후, 구미기능대학(현 폴리텍대학 구미캠퍼스) 생산자동화과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했다.
대학 졸업 후엔 로봇 개발 벤처 기업 '다진시스템'에 취업했다. 당시 국내 최초 2족 보행 로봇 '루시'를 만들어내 이름을 알린 곳이다. 루시 작업에 참여했던 연구원 중의 한 명이 김 씨였다. 이밖에 교육용 로봇 도디, 다로 등의 초기 모델 개발에도 참여했다.

당시 회사에서 1년 간 김 씨와 함께 일했던 조아무개 씨는 "기술이 정말 좋았는데, (일반) 대학을 안 나왔다는 이유로 그의 역량에 비례한 인정을 못 받은 게 항상 아쉬웠다"며 "나는 더 칭찬하고 격려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연락하며 지냈고, 김 씨가 꾸준히 연락을 줬다"고 말했다.
김 씨는 지난해 봄에도 조 씨가 운영하는 과학교육센터를 들렀다. 둘은 서로가 관심 있는 과학기술 이야기를 주로 했다. 조 씨는 적정기술에 대한 아이디어가 좋았던 김 씨에게 '사업을 해보라'고 조언해 주기도 했다. 조 씨는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인정해 주면 참 좋아했다. 본인 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며 "매사에 진지하고 순수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일하는 동안 공부에 목이 말랐던 김 씨는 경북 구미에 있는 금오공대 기계공학과에 편입했다. 2002년, 4족 보행 로봇 작품으로 학내 경연대회에 출전해 기계공학부 총장상도 받았다. 휴학 중, 그는 대구의 한 레고교육센터에서 학원강사로 일을 시작하며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공부를 마친 건 이보다 20년이 더 지난 2023년이다. 태안화력발전소를 다니던 와중 학점은행제로 공부를 병행하며 기계공학 학사를 땄다.
지난 18일 <프레시안>과 통화한 김 씨의 30년 지기 권아무개씨는 "정말 고생을 많이 한 친구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혼자 대학 등록금도 벌면서 힘들게 공부하며 대학을 다녔다"며 "그래서 정말 이렇게 죽으면 안 되는 애다. 세상이 참 억울하다"라고 말했다.


레고교육센터를 다닐 당시 20대였던 그는 로봇반을 맡아 '로봇쌤'이라 불렸다. 가르치는 실력도 좋았던 김 씨는 고교 3학년 학생들의 레고 대회 참전을 지도해 수상도 여러 번 따냈다. 권 씨는 "상 받은 학생들이 특별전형으로 대학도 진학한 걸로 안다"며 "평판도 좋았고 일도 오래 잘했는데, 어느 날 다 던져 버리고 어머니가 계신 보령으로 가더라"고 말했다. 김 씨는 "오래 떨어져 살았던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정말 애틋했다"고 했다.
김 씨는 이즈음 적정기술에도 관심을 보였다. 2014년, 완주에 있는 전환기술 사회적협동조합 교육에 여러 번 참여했고 직접 강의도 했다. '자작 콤프레셔(공기압축기)' 제작 워크숍이다. 소음이 적은 냉장고 콤프레셔를 재활용해 나만의 콤프레셔를 만드는 수업이었다.
박용범 전환기술 사회적협동조합 이사는 "섬세하고 꼼꼼하고 손기술이 정말 좋은 사람"으로 김 씨를 기억했다. 또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었다"며 "뭐 만들 때 '이걸로 대체하면 안 돼요?' 물으면 딱 잘라 '안 돼요'라 하는, 야무진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4월 김 씨를 만났던 박 이사는 "2~3년에 한 번은 꼭 연락해서 여길 왔다"며 "그때 '우리도 생활용접 교육이 있으니, 충현 씨가 이걸 잘하니 맡아보는 건 어떠냐'는 얘기도 나눴다"고 했다. 김 씨는 '아직 회사(태안화력)에 매여 있어서 쉽지 않다' 했고, 박 이사도 '올해 교육은 다 짰으니, 다음번에 한번 계획해 보자'고 말했다. 박 이사는 "최근에 충현 씨는 기술을 가르치는 일 쪽으로 꿈을 꾸고 있었다"며 "이 사고만 아니었어도, 1년 안에 방향을 바꾸지 않았을까"라며 안타까워했다.


김 씨의 네이버 블로그 '김충현 공작소'엔 그가 직접 만든 콤프레샤, 난로, 공구, 화로 등 40여 개 기계가 제작 과정과 함께 빼곡히 기록돼 있다. 주문 제작도 있고, 스스로 개발한 작품도 많다. 그는 난로 내 열의 이동 원리를 연구하며 설비를 계속 보완해 나가기도 했다.
적정기술을 접목한 발명품도 많다. 김 씨와 자작콤프레셔 워크숍에서 만나 11년 인연을 이어 온 문영규 항꾸네 협동조합 대표는 김 씨를 "창의적으로 개발하고 실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잘 고안해 내는 실천적인 기술자였다"고 기억했다. 그의 보령 자택을 간 적이 있는 문 대표는 "폐드럼통을 활용해 음식물찌꺼기 퇴비화와 채소재배를 동시에 하는 텃밭, 음식물찌꺼기 통에 동애등에(음식물쓰레기 분해 등에 유용한 곤충)를 유인하고 이 애벌레를 닭모이로 연결하는 장치 등을 봤다"며 "대안기술을 고민하고 적용하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2016년부터 태안화력에서 일했다. 월급이 대폭 삭감돼 퇴사했던 2020년을 제외하면, 사망 직전까지 만 8년을 태안화력에서 선반 기계공으로 일했다. 태안화력 다단계 하청구조의 2차 하청노동자였다. 1차 하청 한전KPS(한전 지분 51%)는 태안 화력발전소를 운영하는 한국서부발전으로부터 경상정비를 도급받아, 이 중 일부를 2차 하청업체에 재하도급했다. 김 씨 직장은 8년 간 8번 바뀌었다.
선반은 공작물을 고속으로 회전시켜 자르고 깎는 절삭용 공구기계다. 그는 태안화력에 필요한 공구나 부품을 가공하고 제작하는 일을 맡았다. 사망 전 1달 치 업무 기록을 보면, 하루 1~3개씩 꼬박꼬박 원청 기계부에서 지시를 받고 부품을 제작했다.
그의 기술 자격증은 12종이다. 이 중 5종을 태안화력에서 일하며 땄고, 2종은 기능장이다. 에너지관리기능장과 배관기능장이다. '기능사-산업기사-기사-기능장-기술사'로 이뤄진 5단계 중 4단계인, 높은 기술력을 입증하는 자격증이다. 김 씨는 2022년엔 발전소 협력업체의 관리자로 일할 수 있는 기계설비유지관리자 중급 자격도 땄고, 용접, 금형, 화공, 설비 등의 분야에서 고급숙련기술자 자격(한국엔지니어링협회 인증)도 땄다.

그와 8년을 꼬박 '구내식당 밥 친구'로 지냈던 동료 손인웅 씨는 "점심 먹을 때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이번에는 무슨 자격증을 땄다', '이번에는 뭘 공부한다' 이런 얘길 많이 했다"며 "'왜 이렇게 공부를 하느냐'고 물으면,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준비해야 하지 않냐'고 했다. 참 배움에 열성적이고 다재다능했다"고 말했다.
그의 블로그엔 발전소 이후의 삶을 준비하던 그의 모습이 담겨 있다. 자신의 앎을 사람들에게 나누는 미래를 꿈꿨다. 2024년 총 15종 분야의 직업능력개발훈련교사 자격증을 땄다. 기능대학, 민간훈련기관 등에서 실무를 가르칠 수 있는 자격증이다. 손 씨는 "우리 회사에 자격증 없는 친구들이 몇 있는데, 이런 동료들한테 자기가 기술을 가르쳐 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나랑 의논도 했다"고 말했다.
그의 친구 권 씨는 "2년 전쯤 만났을 때, 기능장을 2개나 갖고 있대서 '야 그런 데서 그리 힘들게 일하지 말고 대학 가서 교수라도 해라'라고 했었다"며 "그럼 어머니를 떠나 있어야 할지도 모르니 그건 또 싫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그는 평일엔 회사 근처에서 지냈고, 주말엔 보령 본가로 가 어머니가 운영하는 마을 슈퍼 일을 종종 도왔다.
동료들은 그를 'FM 형님'으로 기억했다. 그만큼 원칙대로 업무를 보는 사람이었다. 동료 최아무개 씨는 "원칙에 안 맞게 말로만 뭘 바로 해달라고 하면 절대 안 들어줬다"며 "공사통보서, 담당자 서명, 작업 전 안전 점검서 작성 등을 다 챙겼다"고 말했다. 또 "그래서 지금 (사망 직전) 업무 자료도 다 남아 있는 것"이라며 "진상규명 증거자료로 남았다"고 말했다.
동료 정철희 씨는 김 씨를 가장 먼저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동료로 기억했다. 정 씨는 "나도 사무실 정리를 하고 나가는 편이라 다른 이보다 늦게 퇴근하는데, 그때마다 1층 정비동(김 씨 근무지)의 불을 다 끄고 나가는 모습을 자주 봤다"며 "아침에도 매일 6시쯤 나온다 들었다"고 말했다. 또 "선반 기계 옆에 책상이 하나 있는데, 오더를 기다릴 땐 항상 거기 앉아 대기했다"며 "늘 홀로 책을 보고 계셨던 게 기억난다"고 했다.
김 씨가 사망 직전 책상에 펴뒀던 책은 이재명 대통령의 기본소득 정책을 해설한 '이재명과 기본소득'이다. 친구 권 씨도 "충현이는 늘 책을 읽었다. 20대 때 집에 놀러 가도 TV는 없고 책만 있었다"며 "클래식도 좋아했다. 그때도 집 2층을 작업실로 만들어 이것저것 많이 만들곤 했다"고 말했다.

동료 손 씨는 그를 "나눌 줄 아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생일 때마다 카카오톡으로 선물 쿠폰을 줬고, 타지 여행을 다녀오면 손 씨의 딸 선물로 지역 맛집 빵도 챙겨왔다. 대게 장사를 하는 권 씨는 "2년 전인가, 한 번은 나한테 100만 원을 줬다. 회사가 또 바뀌었는데 그때 사장이 퇴직금을 더 많이 줬다며, 사장이 식당에 오면 대게 대접을 해드리라고 했다"며 "그런 놈이다. 지가 더 받았다고 생각하면 이렇게 하는 놈이다"라고 말했다.
김 씨는 지난해 12월 14일엔 '보령서천민주당 2호차'를 타고 서울 여의도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도 갔다. 그날 국회는 탄핵안을 가결했다. 김 씨는 다음날 블로그에 "오랜 여정의 고개 하나를 넘었다"고 적었다.
권 씨는 "어머니와 함께 살게 돼 진심으로 기뻐하던 예전 모습이 선명하다"며 "친구가 고생을 참 많이 하고 살았던 기억이 많다. 그래서 더 억울하다"며 안타까워했다.
문 대표도 "이런 산재 사고를 구조적으로 만들어 내는 기업의 시스템이 너무 원망스럽다"며 눈물을 보였다. 그는 "(2018년) 고 김용균 님이 사망했을 때 충분히 각성하고 대책을 세울 수 있었는데, 정치권도 외면하고 원청이 책임을 다 피할 수 있게 구멍을 만들어 놓으니 이런 일이 반복된다"며 "태안화력의 일이라 더 알려졌지만, 전국에 이런 일이 얼마나 많겠느냐. 일하다 사람이 죽지 않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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