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선 과정에서 별로 주목받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5월 14일 부산 유세에서 "(국민의힘은) 헌정질서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모두 파괴한 정당"이라고 말한다. 이재명이 "자유민주적"을 언급한 부분이 흥미로웠다. 이재명 후보 공동선대위원장이자 국민대통합위원장인 이석연 전 법제처장은 공개석상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토대로 한 자유와 평등이 조화되는 실용주의적 정책으로 나가야만 국민 통합이 다가올 수 있다"고 말했다.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아니 문제 삼을 이유도 없다. 자유민주주의와 그 발화자는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요컨대 이재명은 윤석열과 윤석열 내란을 옹호하는 세력들이 오염시켜온 말 하나를 슬쩍 훔쳐낸 거였다. 여기에서 야금야금 영토를 넓혀가는 극우 세력 확장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다뤄야 할지 힌트가 살짝 엿보인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자유민주정(주의)는 이렇게 규정된다.
"민주적 정부 구조로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보호되며, 정치적 권력 작용이 법의 지배에 의해 제한되는 것"
자유민주주의가 한국 사회에서 논란이 된 것은 이 말이 사용된 맥락 때문이다. 극우 세력의 '자유민주주의'는 탄생부터 대항 개념이었다. 적을 설정하고 그들을 박멸하기 위한 것으로, '공산주의', '인민민주주의'의 대체 개념으로 수용됐다. 반독재 투쟁을 '빨갱이'로 몰고자 사용된 기만적인 언어기 때문에 그들이 읊어대는 '자유민주주의'에는 전체주의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래서 진보진영에선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이 오염됐다고 봤다.
그럴수록 '자유민주주의'는 극우 세력의 전가의 보도가 됐다. 자유민주주의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절대 선'으로 설정하고 '그 외 모든 세력'은 박멸해야 할 것들로 봤다.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고쳐 쓰는 것은 북한의 계략이고, 대한민국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절대 악'의 이미지를 씌웠다. 민주화 세력 탄압에 쓰였던 이 말은 세월이 흘러 극우 세력의 정치 투쟁 소재로 자리잡는다.
그들은 오늘도 열심히 '반 대한민국 세력'이라는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매질을 하고 있다. 이 허수아비 때리기는 곧잘 통했고, 청년 극우 세력의 자양분이 되어 '민주당은 공산당', '문재인은 간첩'과 같은 허무맹랑한 사상 체계 밖의 세상을 통으로 부정한다.
'언어의 소유권'에 대해 꽤 관심을 가져왔다. 이를테면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두고 얼마나 싸웠던가. 역사 교과서에 '자유민주주의' 표현을 쓰는 것에 대한 논란은 꽤 오래됐는데, 지난해 윤석열 정부 하에서는 교과서 9종 모두에 '자유민주주의'가 명기됐다. 극우 세력은 이를 '좌파에 한방 먹인 자유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극우 세력은 '자유민주주의'를 무기로 사상전에 나섰다. 리박스쿨의 강령이라 봐도 손색이 없는 '언론 자유 없이 자유민주주의 없다'는 제목의 2018년도 문건은 이른바 '우파 사상 개발'과 '여론 확산 계획'을 열거하고 있다. "우파 전략과 논리를 개발", "유튜브 활용", "각 사회단체로 확장", "작가·기자·연예인 발굴" 등의 전략을 담은 이 문건은 옛 독재 정권 사상 투쟁의 21세기 버전이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전유하고 배타적으로 독점 소유하면서 상대 진영을 비난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북한은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전유해 체제 정당성을 대내외에 과시하지만, 우린 그 '민주주의'가 반쪽자리 껍데기임을 알고 있다. 그와 쌍둥이같은 사례가 정통성 부족을 상쇄하려 극우세력이 점유한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이다. '우리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는 아직 이르다'면서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했던 박정희가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세력들의 '우상'이 된 것도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말이다. 전두환이 '정의'를 내세운 것처럼 극우 세력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워 스스로 '반자유민주주의자'임을 은폐해 왔다. 그리고 '국민저항권' 같은 말을 훔쳐와 왜곡해 언어의 영토를 넓히고 있다.
'보수'의 영역에 전략적으로 침범한 이재명은 이 상황을 역으로 이용했다. 윤석열이 자유 민주주의를 말할 때, 이재명이 자유 민주주의를 말할 때, 같은 말이라도 그 맥락과 뉘앙스는 달라진다. 우리는 윤석열과 이재명이 어떻게 다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 진영의 상징으로 떠오른 이재명은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굳이 배척할 이유가 없었다. 자유민주주의는 더이상 민주당에서 금기어일 필요가 없다. 극우 세력이 가져간 '자유민주주의'를 역으로 전유(轉有)하면 된다.
극우 세력을 비판한다고 해서 그들이 약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유용한 전략은 극우 세력에 의해 점유된 가치들을 하나하나 빼앗는 것이 아닐까. 이재명 대통령과 정부가, 민주당이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보다 더 자유롭게 사용하길 바란다. '자유민주주의'에 정명을 찾아주고 본래의 의미를 조명해 역(逆)전유할 필요가 있다.
극우 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빼앗아 전유하기
'건국절' 논란에서 '건국절'이라는 말을 훔쳐오는 건 어떤가. 건국절 논란이 문제가 되는 거기에 부여된 '함의' 때문이다. 이승만 추종 세력이나 극우 뉴라이트 세력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고 1948년 건국을 주장한다면, 건국절이라는 말을 역으로 전유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아이디어라고 본다. 이를테면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건국절'이란 이름으로 공식화하는 것이다.
보수 진영에서도 그러한 사례들이 있다. 대표적인 게 빨간색을 전유한 박근혜의 새누리당이다. '좌파'의 상징 빨간색을 보수정당의 상징으로 파격 도입한 박근혜는 자신의 이미지를 '중도'로 끌어오는 효과를 톡톡히 봤다. 전형적인 이미지 전유의 예다. 물론 그 빨간색은 내란을 일으킨 윤석열과 그걸 비호한 국민의힘의 상징색으로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중이라, 애초에 도입했을 때 기대한 효과는 한참 퇴색한 상황이다. 사람들은 이제 '빨간색'을 '내란 수괴 윤석열'과 등치시킨다. 모르긴 몰라도 국민의힘이 재창당 수준의 정치 기획을 벌인다면 상징색을 바꾸지 않을까 싶다.
'애국'도 마찬가지다. '애국'은 원래 80년대, 90년대 대학가 학생 운동권에서도 널리 쓰이던 말이다. 베트남 호치민이 혁명을 준비하며 쓴 이름이 '아이쿡'(애국)이었다. 과거 애국은 유럽을 비롯해 혁명을 경험한 국가가 내세운 대표적인 가치 중 하나였다. 지금은 극우 세력이 전유해 가져다 쓰면서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태극기(태극기란 말도 얼마나 오염되었는가) 집회 참석자들은 스스로를 '애국 시민'이라 부른다. '애국'의 가치도 리버럴 진영이나 진보 진영에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다시 가져다 쓸 만한 말이다.
'언어 전유'와 '이미지 전유'는 극우세력의 확장 동력에 힘을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배제와 혐오를 일삼는 이들에게 '자유민주주의'니, '애국'이니, '태극기'니 하는 말의 독점 사용권을 주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극우의 세력 확장을 약화시키기 위해선 그들이 훔쳐간 단어들에 '정명'을 돌려주고, 역으로 전유해 새로운 가치를 입혀 재탄생시키는 방식을 고려해 볼 만 하다. 하나의 운동처럼 이어져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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