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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4일제·하루 9시간제 실험, 누구를 위한 것인가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 장시간 노동의 재포장: '주 4일제'라는 이름의 위선

최근 일부 노동조합과 고용 관련 연구자들이 '주 4일제' 도입을 촉진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의 핵심을 들여다보면, 하루 근로시간을 8시간에서 9시간으로 늘리는 조건으로 주 4일 또는 4.5일제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얼핏 보면 진보적이고 실현 가능한 노동시간 단축 방안처럼 보이지만, 이는 '하루 8시간 노동제'라는 노동운동의 역사적 성취를 후퇴시키는 기만적인 주장이다.

'하루 8시간제'의 세계사적 의미

하루 8시간 노동은 19세기부터 이어져온 세계 노동자들의 투쟁이 쟁취해낸 최소 기준이다. 5.1 노동절의 기원이 된 1886년 미국의 헤이마켓 투쟁, 1차대전과 러시아혁명의 결과물인 1919년 국제노동기구(ILO) 1호 협약의 하루 8시간제와 주 48시간제, 그리고 20세기 중반 이후 서유럽 각국의 법제화는 근로시간 단축을 통한 인간다운 삶의 실현이라는 보편적 목표 아래 이루어졌다. 한국에서도 하루 8시간-주 40시간제는 2004년을 전후로 오랜 투쟁과 사회적 타협 끝에 정착됐다. 이러한 역사적 쟁취는 단순한 제도의 변경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삶을 위한 노동운동의 성과였다.

그러나 비롯한 일부 노조와 고용 연구 단체들은 이 기준을 슬그머니 후퇴시키면서도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포장을 입히고 있다. 하루 9시간, 주 4.5일제를 통해 총근로시간은 줄지 않거나 오히려 노동강도가 강화될 수 있음에도, 이들은 주4일제 요구를 앞세워 이를 정당화한다. 이러한 주장은 유연근무제 확대, 선택근로제 확대를 통해 자율적 근무를 실현하자는 자본의 논리와 구조적으로 닮아 있다.

▲4월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노동·시민사회단체 주4일 네트워크가 '주4일제 도입 및 노동시간 단축 요구안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압축근로시간제'의 위험성

특히 이들이 제시하는 방식은 '압축근로시간제'와 유사하다. 압축근로시간제는 법정 주 근로시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를 소수의 근무일에 몰아넣는 방식이다. 예컨대 주 40시간제를 4일에 나눠 하루 10시간씩 근무하자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하루 9시간제도 이의 변형 형태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총근로시간을 줄이지 않으면서도 단축된 듯한 착시를 유발하고, 노동자의 회복권과 건강권을 침해할 위험이 크다. 이미 해외에서는 압축근로제가 장시간 노동의 또 다른 얼굴로 비판받아 왔다.

이 주장은 몇 가지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총근로시간이 줄지 않는 근로시간 단축은 실질적인 단축이 아니다. 노동자는 하루 더 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루 근로시간이 늘어나면서 회복시간은 줄어들고, 피로는 누적된다. 장시간 집중노동은 육체적 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를 유발하며, 산업재해율과 연계되는 주요 요인 중 하나다. 하루 9시간 이상의 연속 근무가 건강에 악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는 이미 2000년대 초부터 발표되어 왔다.

둘째, 이러한 모델은 고정된 근무제도를 가진 정규직, 특히 사무직과 공공부문 노동자에게나 적용 가능한 방식이다. 대다수 플랫폼노동자, 비정규직, 제조업 종사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실제로 쿠팡 등 플랫폼 기반 노동현장에서 하루 9시간이라는 고정적 스케줄은 현실성이 없다. 이 모델은 정규직 중심의 '선별적 복지'와 다를 바 없는 '선별적 근로시간 단축'일 뿐이다.

하루 8시간에서 9시간으로 실질 근로시간 연장

셋째, '과도기 모델'이라는 주장도 모호하다. 하루 9시간제가 과도기라면, 언제 어떻게 하루 8시간제로 회복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시간표와 전략이 없다면 이는 단지 자본의 유연화 전략에 편승한 기만적 전술에 불과하다. '과도기'라는 표현은 흔히 정치적으로 불리한 입장을 일시적으로 모면할 때 쓰이곤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새로운 표준'으로 굳어지는 경우가 많다.

넷째, 하루 9시간제를 실험하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되묻게 된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분단이 심각한 현 시기 대항민국에서 근로시간 단축의 가장 큰 수혜자는 장시간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여야 한다. 하지만 노동문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부 고용 연구자들과 얼치기 노조간부들이 주도하는 현재의 '주 4일제' 논의는 실리콘밸리식 유연근무제와 유사하게 노동시장 상층의 고소득 화이트칼라 중심의 특권적 제도로 전개되고 있다. 이것이 과연 노동시장 상층-중층-하층을 아우르면서 한국 사회 전체 노동자의 삶을 바꾸는 길인지 의문이다.

'주 4일제'로 희석된 교대제와 인력 문제

이 지점에서 금융노조와 보건의료노조의 주 4일제 요구는 또 다른 고민을 던진다. 금융노조는 대부분 정규직 사무직으로 구성되어 있어, 고정된 근무 스케줄을 전제로 '하루 10시간 근무 × 4일'과 같은 압축형 주 4일제를 일부에서 시범 도입하려는 주장도 있었다. 이 경우 실질적인 근로시간 단축은 없으며, 노동강도 강화 및 장시간 집중 노동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는 총근로시간을 유지한 채 '출근일수'만 줄이는 전형적인 압축근무 방식이다.

보건의료노조는 간호사 등 교대제가 중심인 노동구조 속에서 교대제 개편을 병행한 주 4일제를 요구하고 있다. 이 경우 핵심은 인력 확충을 전제로 한 '노동강도 완화'에 있으며, 단순한 출근일 축소가 아니라 구조적 교대제 개선이 목적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인력 충원이 병행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남은 인력의 과중한 업무 부담으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현 시기 '주 4일제' 법제화는 노동시장 분단을 악화시켜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주 4일제는 단지 '출근일수 단축'이 아니라 '총근로시간 감축', '노동강도 완화', '임금 보전', '취약계층 포함'이라는 네 가지 원칙 위에 설계되어야만 의미가 있다. 이 원칙이 결여된 주 4일제는 자칫 계층 간 격차만 확대하는 '선별적 단축'에 그칠 수 있다. 지불 여력이 있는 산업이나 업종에서는 기업이 자발적으로 혹은 노사가 단체교섭을 통해 자율적으로 주 4일제를 도입할 수 있겠지만, 이를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노동시장 이중구조와 분단을 심화시킬 뿐이다.

하루 8시간-주 40시간 법정 근로시간을 규율하는 근로기준법의 적용 범위가 노동조합법의 적용범위보다 좁은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판사, 검사, 변호사, 법학교수 등 법기술자들의 법령 해석 장난으로 노동시장 상층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만 하층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을 적용받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근로기준법은 사라지고 전태일만 남은 격이다.

노동운동이 진정한 의미의 근로시간 단축을 추구하려면, '출근일수 감소'라는 피상적인 효과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총근로시간 감축', '임금 삭감 없는 단축', '노동강도 완화', '비정규직 포함 보편 적용'이라는 네 가지 원칙을 중심에 세워야 한다. 하루 9시간제는 이러한 원칙 어디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자 건강권을 위협하고, 장시간 노동을 정당화하는 효과만 낳는다.

'8시간 노동제'를 후퇴시키지 말라

근로시간 단축은 단순히 '더 많이 쉬자'는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더 인간답게 일하자',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자'는 집단적 선언이다. 하루 8시간제는 이러한 선언의 최소한이며, 그 기준을 더 낮추는 것이 미래지향적 진보다. 책상에 앉아 하루 9시간제를 실험할 명분이 아니라, 하루 8시간제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이를 공장과 사무실에서 더욱 단축하는 사회적 운동이 필요하다.

주 4일제를 주장하는 노동조합 일각과 고용 연구자들이 진정 '근로시간 단축'을 말하고자 한다면, 자본이 설정한 협상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총근로시간 축소와 노동강도 완화를 목표로 한 장기적 로드맵, 비정규직을 포함한 보편적 정책 설계, 실질 임금 보장을 포함하는 제도적 구조가 함께 제시되지 않는 한, 하루 9시간 노동제라는 조삼모사 식의 주 4일제는 그저 이름만 진보적인 '압착근로시간제'일 뿐이다.

노동자의 시간은 교환가치가 아니라 삶 그 자체다. 하루 9시간은 진보가 아니라, 위장된 후퇴일 뿐이다. 한국 노동운동은 그 위선을 정확히 지적해야 하며, 더 나아가 전체 노동계가 실질적 근로시간 단축이라는 본래의 목표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비판적 개입을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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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원

택시노련 기획교선 간사,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사무국장, 민주노동당 국제담당, 천영세의원실 보좌관, 국제화학에너지광산노련(ICEM)에서 일했으며, 지금은 IndustriALL 글로벌노조 프로젝트 컨설턴트로 있다. 근로기준법을 일터에 실현하고 노동자가 기업 경영과 정치에 공평하게 참여하는 사회를 만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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