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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 회스,이근안은 냉혹한 괴물인가? 평범한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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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 회스,이근안은 냉혹한 괴물인가? 평범한 인간인가?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15]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43

흔히 어떤 엽기적인 범죄가 벌어졌을 때 프로파일러들이 나선다. 그들은 피의자의 얼굴을 마주하고 무엇보다 먼저 그의 정신 상태가 정상인지 아닌지를 알아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1901-1947), 독일 국가보안본부(RSHA) 제4국 B과장(유대인 업무 담당)으로서 유대인 박해에 앞장섰던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 이 둘의 정신 건강은 어땠을까. 똑같이 친위대 중령 계급장을 달고 나치 홀로코스트의 실무를 처리했던 두 악인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을까.

수용소 안팎 모습이 다른 회스의 이중생활

구스타브 길버트(Gustave Gilbert, 1911-1977)는 나치 전범자들을 프로파일링을 했던 오스트리아 유대계 출신의 미 심리학자다. 대학 학부에서 독일어를 전공하고 심리학박사 학위를 지닌 길버트는 1945년 중위 계급장을 달고 독일 뉘른베르크로 파견됐다. 그곳에서 열린 국제군사재판(1945년 11월 20일-1946년 10월1일) 과정에서 헤르만 괴링(나치 정권의 2인자, 제국원수), 빌헬름 카이텔(독일국방군 최고사령관), 한스 프랑크(폴란드 총독)를 비롯한 나치 주요 전범들을 잇달아 만나 그들의 심리를 분석했다.

그 결과물이 <뉘른베르크 일기>(Nuremberg Diary, 1947)과 <독재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Dictatorship, 1950)이다. 특히 <뉘른베르크 일기>는 아르헨티나로 도망쳤다 이스라엘로 납치된 문제의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1961년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을 때 다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출판사는 책을 다시 찍어냈다). 당시 롱아일랜드대 심리학교수로 있던 길버트가 아이히만 재판의 증인으로 소환되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패전 뒤 아이히만이 도피 중이었기에 길버트는 예루살렘에 올 때까지 그를 만나진 못했다. 다만 뉘른베르크 시절에 루돌프 회스를 만나 얘기를 나눈 적은 있다. 1961년 5월29일 예루살렘 법정에서 길버트는 "회스는 자신의 전쟁범죄를 부인하면서 주어진 명령에 따랐을 뿐이고, 친위대 총사령관 하인리히 힘러를 비롯한 상부에 책임을 떠넘기려는 태도를 보였다"고 증언했다. 아이히만도 예루살렘 법정에서 회스와 마찬가지 태도를 보이고 있었기에 길버트의 증언을 듣는 방청객들은 "악인들은 늘 저렇지..."하며 혀를 찼다.

길버트의 책에는 루돌프 회스의 정신 상태를 밝힌 대목이 들어있다. 회스는 또렷한 어조로 길버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완벽하게 정상이다. 심지어 내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그곳 수감자들에 대한 절멸 작업을 진행할 때에도, 나는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꾸려나갔다"(Gustave Gilbert, <Nuremberg Diary>, Perseus Books Group, 1995, 259쪽). 남의 가정사 속사정을 세세히 들여다보긴 어렵지만, 가정사에 관한 한 회스의 말은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하다. 프랑스 형사전문 변호사 타냐 크라스냔스키가 나치 전범들의 자식들에 대해 쓴 책(Enfants de nazis, 2016)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저녁이나 주말 오후면, 회스는 아이들에게 독일 민중 사이에서 민간전승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읽어주길 좋아했다. 아이들에게 축음기로 음악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는 좋은 아버지로서 살도록 노력한 동시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확실히 죽어나가도록 세밀한 주의를 기울였다. 수년 동안 그는 자연스럽게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성공했다](타냐 크라스냔스키, <나치의 아이들>, 갈라파고스, 2017, 232쪽).

일단 관사로 돌아오면 회스는 수용소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회스의 이중적인 삶은 영국 감독 조너선 글레이저가 2023년에 내놓은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에도 잘 나타나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담을 사이에 둔, 수영장 딸린 고급주택에서 회스는 5명의 아이들과 승마․수영․낚시를 즐기고, 아내는 정원을 가꾸며 시간을 보낸다(실제로 회스의 관사에는 전쟁을 반대하는 '여호와의 증인'이었기에 붙들려온 2명의 하인을 비롯해 요리사, 미용사, 재단사, 가정교사 등을 두고 있었다. 모두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이었다).

영화 속 회스의 부인은 다른 곳으로 남편이 근무지를 옮기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수용소의 여자 수감자들이 그녀를 여왕처럼 떠받들며 하인 노릇을 해주는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그녀는 독가스로 죽었을지도 모를 수감자의 고급 모피 코트를 거울 앞에서 입어본다. 희생자의 '피 묻은 코트'를 입고 좋아했다면,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가 예루살렘 법정의 방청석에서 마주했던 아이히만을 가리켜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멍청이'라고 했던 비난을 똑같이 받아 마땅하다.

▲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 110만 명쯤이 아우슈비츠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진다. ⓒ위키미디어

검진 의사, "아이히만의 정신상태는 나보다 더 정상"

위에서 회스는 정신상태가 정상이라 했다. 그렇다면 아이히만은 어땠을까. 아르헨티나에서 납치돼 예루살렘 감옥에 갇힌 뒤 아이히만은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로부터 진단을 받았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은 이렇게 탄식했다고 전해진다. "적어도 아이히만을 진찰한 뒤의 내 정신 상태보다도 더 정상이다"(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79쪽).

또 다른 의사는 붙잡혀간 가장(아이히만)을 걱정할 아이히만의 아내와 아이들, 어머니와 아버지, 친구들에 대한 아이히만의 태도와 정신 상태는 '정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는 의견서를 냈다. 감옥 안으로 아이히만을 정기적으로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던 한 이스라엘 성직자도 그를 가리켜 "매우 긍정적인 생각인 지닌 사람으로 여긴다"고 발표했다.

회스처럼 아이히만도 가족(아내와 아들 셋)을 무척 사랑하고 아꼈다. 패전 뒤 신분을 숨기고 숨어살던 그는 1950년 이탈리아에서 가톨릭교회의 도움을 얻어 국제적십자사가 발급한 여행자 서류를 갖고 남미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이름으로 아르헨티나에서 자리를 잡자말자 그는 오스트리아에 있던 가족을 불러들이려 애썼고, 2년 만인 1952년 드디어 합쳤다.

문제는 그의 가족이 여객선을 타고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로 들어올 때 '아이히만'이란 이름을 여권에 그대로 사용했고, 나중에 추적자들에게 신원이 드러나는 한 실마리가 됐다. 도망자 신분의 아이히만도 신중함과 조심성을 잊을 만큼 가족과 합치길 서둘렀다고 보여진다. 1960년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에게 납치되기 전의 아이히만을 연구한 독일 철학자․역사학자인 베티나 슈탕네트의 책(Eichmann vor Jerusalem, 2011)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친위대 장교시절에 최소한 3명의 여성과 혼외정사를 즐겼다고 한다. 하지만 집에선 가족을 아끼는 모범 가장의 모습을 보였다. 아르헨티나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1952년 가족들과 합쳤을 때의 상황을 그린 부분을 보자.

[부부는 둘만의 시간을 갖고 해후했다. 아이히만은 결국 원하는 것을 얻었다. 7년 동안의 이별, 은둔생활과 도주자금 마련 노동 등을 뒤로 하고 이제 아이히만은 새로운 삶뿐만 아니라 가족도 되찾았다. 아이히만은 그에 대해 말을 아꼈지만 몇 년이 지나자 그때의 감정을 숨길 수는 없었다. "재회는 벅찼다"(예루살렘 감옥 안에서 쓴 '나의 도주'라는 제목의 문서)](베티나 슈탕네트, <예루살렘 이전의 이이히만>, 글항아리, 2025, 222-223쪽).

김근태, "고문자는 가족 걱정하는 평범한 사람"

회스나 아이히만의 가정사를 보면 이스라엘이나 서구의 언론이 그려낸 것처럼 '가학적인' 인물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학살자의 냉혹함․잔인함과 가족에 대한 사랑은 함께 묶어 놓고 얘기할 주제는 아닌 듯하다. 이 대목에서 지난 독재 시절에 물고문․전기고문으로 납북어부를 비롯한 생사람들을 간첩으로 만들어냈던 이근안 경감(경기도경찰청 공안분실장. 1938-)이 떠오른다. 1988년 고문 혐의로 수배되자, 11년 도피 기간 중에 10년을 자신의 집(동대문구 용두동) 골방에서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지냈다(1999년 구속돼 징역 7년을 살다 나온 그는 개신교 목사가 됐고, "고문은 예술"이란 망언을 남겼다).

이근안의 희생자 가운데 하나가 김근태(1947-2011)다. 1985년 9월 남영동 서울시경 대공분실에서 이근안으로부터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다. 바로 그 곳에서 1987년 1월 박종철(서울대 언어학과)이 물고문을 받다가 죽자, 6월항쟁의 불길로 번졌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김근태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잠간 쉬는 동안 고문자들끼리 주고받는 대화 내용이었다. 시집 간 딸자식 걱정, 군대 간 아들 걱정도 했다. 김근태의 글을 보자.

"고문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눈에 살기가 감도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장난기 어린 미소조차 짓기도 하며 한숨도 쉬는, 어디서나 부딪칠 것 같은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결혼한 딸의 생활걱정, 군대 나간 아들에 대한 걱정, 대학 진학을 앞둔 자제를 가진 어버이로서 당연히 부딪치는 조바심, 서민이면 누구나 안게 되는 살림살이 걱정, 박봉에 대한 불평 등 종로나 명동의 어느 길거리에서도 부딪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다"(김근태, <남영동>, 중원문화, 2012, 41-42쪽).

김근태가 보기에 '평범한 사람들'이 끔찍하고도 무서운 물고문, 전기고문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조금 전까지 가정사 얘길 나누던 고문자들은 어떻게 같은 인간에게 그토록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일까. 거듭된 고문으로 온몸이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된 김근태는 이근안을 비롯한 고문자들의 태연함, 고문을 하면서 짓는 야릇하고도 냉담한 미소에 질려 뭐라 할 말을 잃었다 했다(김근태는 그 뒤 3선 국회의원을 지냈지만 고문 후유증을 앓았고, 64세로 삶을 마쳤다).

▲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로 납치돼 방탄유리로 둘러싼 피고석에서 재판을 받는 아돌프 아이히만(1961년 5월2일). ⓒ위키미디어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공범자들

루돌프 회스와 아돌프 아이히만은 같은 친위대 중령으로 업무상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친하게 지냈다. 이리저리 따져볼 것도 없이, 둘은 유대인 학살의 공범자다. 회스가 남긴 <고백록>에는 아이히만의 이름이 곳곳에 나타난다. 기록상 둘이 처음 만난 것은 1941년 여름 회스가 하인리히 힘러(친위대 총사령관)의 호출을 받아 아우슈비츠에서 베를린으로 갔을 때로 보인다. 그 때 힘러는 회스에게 "총통께서는 유대인 문제를 단숨에 해결하라 하셨다"라며 집단학살 지침을 내렸다. 그 바로 뒤 아이히만이 아우슈비츠로 회스를 찾아왔다. 회스가 남긴 기록을 보자.

[우리는 유대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논의했다. 그들을 일일이 총으로 쏴 죽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작업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가스'를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을 모았다. 실험해본 결과, 우리는 적절한 가스를 사용한다면 한 번에 800명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 계산했다. 아이히만은 베를린으로 돌아가서 힘러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보고했다](루돌프 회스, <회스의 고백록>, 범우사, 2006, 270-271쪽).

그 뒤에 벌어진 상황은 회스와 아이히만의 계산 이상으로 '효율적인 집단 학살'이 이뤄졌다. 그 뒤로도 둘은 자주 만났다. 아이히만이 워낙 술을 좋아 했으니 함께 술도 많이 마셨을 것이다. 패전이 분명해진 무렵 전쟁범죄를 증명할만한 서류나 데이터들을 모두 없앴다는 공통점도 지녔다. 회스는 <고백록>에서 아이히만으로부터 "힘러와 국가보안본부도 모든 데이터를 파기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썼다. 회스도 인정했듯이, 그런 문서들이 남았다 해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는지는 헤아리기 어렵다. 그런 모든 죽음에 아이히만과 회스가 개입한 것은 아니더라도, '실무자'로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회스의 <고백록>은 예루살렘 법정에 피고인으로 선 아이히만에게 이로울 것이 전혀 없었다. 회스가 아우슈비츠에서 저질렀던 전쟁범죄의 공범자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유대인 학살 수단으로 가스를 쓰기로 뜻을 모았다는 사실부터가 아이히만에겐 치명적이다. 하지만 예루살렘 법정에서 아이히만은 회스가 남긴 기록의 신빙성을 부인하고 나섰다. "나 자신은 그런 일을 하지도 않았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회스와 아주 친한 관계에 있었기에, 나를 옭아맬 개인적 이유가 회스에게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한나 아렌트 133쪽).

흥미롭게도,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옳을지도 모른다"면서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우슈비츠에서 110만 명쯤이 죽었고, 그 가운데 독가스는 사망의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아렌트는 "가스 사용에 대해선 아이히만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서 아이히만을 감쌌다(한나 아렌트 151쪽). 아이히만에게 주어진 임무가 유대인의 효율적 수송이고 가스실 운용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에, 그의 손에 피를 묻히진 않았다는 뜻으로 좁게 풀이했다. 이 대목은 논란으로 남았다.

"나는 한 번도 잔학한 짓을 한 적 없다"

회스와 아이히만, 둘의 공통점은 자신들의 전쟁범죄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명령에 따른 실무 집행자였다는 논리다. 둘은 국가보안본부(Reichssicherheitshauptamt, RSHA)와 이를 지휘 감독하는 하인리히 힘러(친위대 총사령관)에게 책임을 돌렸다. RSHA는 독일의 보안과 경찰을 장악하려는 힘러의 명령으로 1939년 9월 창설된 이래 1945년 패전까지 수백만 명의 민간인들을 죽인 범죄집단이었다(초대본부장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1942년 6월 하이드리히가 프라하에서 암살된 뒤엔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회스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국가보안본부나 강제수용소는 결국 "유대인 세균을 박멸하겠다"는 히틀러와 힘러의 뜻을 받드는 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회스나 아이히만이 힘러의 잘못된 명령을 거부하지 않고 열심히 명령을 따랐다는 데 있다. 회스는 1947년 2월 폴란드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남긴 비망록 끝자락에서 이런 변명을 남겼다.

[나 자신은 수감자 한 사람도 학대하거나 죽이거나 한 적이 없다. 나는 한 번도 잔학한 짓을 한 적이 없다. 나는 절대로 제정신을 잃고 누군가를 학대한 적이 없다. (중략) 나는 나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제3제국의 거대한 학살기계의 하나의 톱니바퀴가 되고 말았다](루돌프 회스, 259-262쪽).

물론 솔직한 고백이 아니다.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지능과 외모는 평범하지만 성격만큼은 잔혹한 인간들이 있다. 회스가 바로 그런 부류가 아닐까 싶다. 29년 동안 미국의 치안판사로 일한 경력을 지닌 작가 존 프리모모는 회스의 인성을 드러내는 사례 하나를 꼽았다.

[1939년 회스가 작센하우젠 수용소장으로 있을 때였다. 영하 25도의 강추위가 몰아치던 어느 날, 회스는 수용소 마당에 수감자들을 하루 종일 세워놓도록 명령을 내렸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외투나 장갑도 없이 몸이 언 채로 혹한을 견뎌야 했다. 몇몇 수감자들이 버티질 못하고 쓰러지자, 회스는 의무실로 그들을 데려가는 것조차 막았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낮 동안에만 78명, 그날 밤 67명이 숨졌다](John W. Primomo, <Architect of Death at Auschwitz: a Biography of Rudolf Höss>. McFarland & Company. 2020, 69–70쪽).

나치 전범재판의 피고석에 섰던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A급 전범들에 견준다면, 헤스나 아이히만은 학력(회스는 중학교 중퇴, 아이히만은 고등학교 중퇴)이나 출신배경이 내세울 게 없었다. 회스는 영국군에 붙잡힌 뒤 (폴란드에서의 본인 재판에 앞서) 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증인으로 불려나간 적이 있다. 미 작가 존 프리모모에 따르면, 그때 회스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미국인 검사 휘트니 해리스 중령은 '회스의 모습과 언행에서 식료품 점원(grocery clerk)을 떠올렸다'고 말했을 정도다. 프리모모는 회스를 가리켜 "평균 이상의 지능은 없어 보였지만, 그는 낡은 폴란드 육군 막사를 최고의 살인공장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흔히 아랫사람에겐 매우 권위적이고 폭력적이지만 거꾸로 윗사람에겐 굽실거리며 아부하는 유형의 인간을 '사도마조히스트'(Sadomasochist)라 부른다. 다른 사람을 괴롭혀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기쁨을 느끼는 사디스트, 이와는 달리 괴롭힘을 당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마조히스트의 합성어다. 회스와 아이히만이 바로 그런 사도마조히스트 유형이라 보면 맞을 듯하다. 창의력을 떨어지지만 시키는 것만큼은 우직하게 잘 해내는 유형은 하인리히 힘러 같은 골수 나치 상급자들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 역사적인 아이히만 재판을 방청하는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1961년 4월11일). Ⓒ위키미디어

학살 현장의 아이히만, "무릎이 떨렸다"

위의 잔혹한 회스에 견주면, 아이히만은 다소 심약한 인간일까. 예루살렘 조사관에게 아이히만은 이런 일화를 털어 놓았다. 1941년 초여름 폴란드 헤움노 수용소로 출장을 갔다. 그곳에선 치클론B 독가스를 샤워장에다 쏟아 붓는 방식이 아니라, 이동용 가스차량으로 수감자들을 죽였다. 큰 방에 갇힌 사람들은 옷을 벗고 기다리다가, 방 출입구 바로 앞에 선 트럭에 올라탔다. 곧이어 뒷문이 잠기고 일산화탄소 가스가 주입됐다.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경찰심문관 아브너 레스 대위에게 35일 동안 조사를 받으면서 74개의 녹음테이프와 이를 글로 옮긴 3564장의 문서를 남겼다. 아이히만의 녹음테이프에서 관련 대목을 들어보자.

[거의 쳐다볼 수가 없었어요. 비명소리가 났고,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차량을 따라갔고, 평생 본 것 중 가장 끔찍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트럭은 넓게 파인 구덩이 앞으로 가서 문을 열었고, 시신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들은 구덩이 속으로 던져졌고, 한 민간인 수감자가 치과용 집게를 가지고 이빨을 뽑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뒤 저는 몇 시간 동안 운전기사 옆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한나 아렌트, 152-153쪽).

아이히만이 봤다는, 시신의 이빨을 뽑는 장면은 그냥 이빨이 아니라 금니였고, (지난 글에서 짚었듯이) 나치는 이를 모아 스위스은행을 통해 전쟁자금을 마련했다. 금니를 뽑은 '민간인'은 수용소 수감자 가운데 시신 처리라는 궂은일을 맡았던 특수작업반원(Sonderkommando)들이었다. 그 바로 얼마 뒤인 1941년 8월, 아이히만은 러시아 민스크(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에 있는 벨라루스의 수도)로 출장 가서 또 다른 학살 장면을 지켜봤다. 아이히만이 녹음으로 남긴 말을 들어보자.

[큰 구덩이에 죽은 사람들의 머리를 겨냥하고 있는 몇몇 젊은 사수들을 봤습니다. 한 여성은 팔이 뒤로 꺾여있는 모습을 보았고, 그것으로 제게는 아주 충분했습니다. 제 무릎은 곧 떨렸고, 저는 그곳을 떠났습니다](한나 아렌트, 153쪽).

위 두 인용문에서 아이히만은 학살 장면이 워낙 끔찍해 두 눈을 뜨고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몇 시간 동안 말을 잊었고, 무릎이 떨릴 만큼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썼다. 이에 대해선 논란이 따랐다. 교활한 아이히만이 자신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회스처럼 그렇게 모진 인간이 아니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엄살을 부리며 의도된 연출을 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아이히만은 학살기계의 톱니였다"

윗글에서 살펴봤듯이, 회스는 자신을 '나치 학살기계 속 하나의 톱니바퀴'(a cog in the wheel of the Nazi extermination machine)였다고 주장했다. 그 자신의 계급이 높지 않아 큰 역할을 못했다는 뜻이겠지만, 작은 톱니바퀴라도 기계를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린 잘 알고 있다. 그에게 내려진 명령이 옳지 못하다고 판단했다면 거부했어야 마땅했다. 회스와 아이히만은 전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재판에서도 톱니바퀴 얘기가 나왔다. 아이히만도 물론 그런 생각을 했지만, 법정에서의 톱니바퀴 발언은 독일인 변호사 로베르트 세르바티우스의 입에서 나왔다. 변호사는 아이히만을 가리켜 "유대인 최종해결책의 기계에서 단지 하나의 작은 '톱니바퀴의 이'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393쪽).

14개월 동안 이어졌던 예루살렘 재판(1961년 4월11-1962년 6월1일)은 TV로 생중계돼 전세계로 알려졌다. 여러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증인으로 나와 눈물을 흘리며 아이히만을 비난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선 '희생자 기억'을 강조하면서 그런 '피의 희생 위에 선 나라'라는 선전 다큐에 큰 돈 안 들이고 아이히만을 주역으로 내세운 셈이었다. 그렇기에 잘 짜여진 각본에 따른 '거대한 극장식 재판'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여기에 논란의 불을 지핀 인물이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였다.

▲ 폴란드 아우슈비츠 기념관에 전시된 희생자들의 안경. ⓒ김재명

아렌트가 지핀 논쟁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933년 히틀러 정권이 들어선 해에 아렌트는 나치의 억압을 피해 프랑스로 갔다가 어렵사리 1941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뒤 많은 유대인 동족들이 홀로코스트 희생자가 된 사실을 바탕으로 나치즘을 자신의 학문적 연구 주제의 하나로 삼았다. 인권 존중과는 담을 쌓은 히틀러와 스탈린의 독재체제를 분석한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 자유로운 정치적 삶(행위)이 인간 존재의 핵심임을 살펴본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1958)은 정치학자 아렌트의 존재감을 서구 학계에 알린 역작으로 평가 받는다.

1960년 아이히만이 납치돼 1961년 재판이 시작될 무렵, 아렌트는 대학 강의를 접고 예루살렘으로 떠났다. 지식층이 많이 보는 주간교양지 <뉴요커>(New Yorker)의 특파원 자격으로서였다. 아렌트는 다섯 차례에 걸쳐 재판 방청기를 <뉴요커>에 실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1963)을 냈다. 하지만 책이 나오기 전부터 많은 논란을 불렀다. <뉴요커>에 실린 아렌트의 방청기가 이미 많은 반발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논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사악한 의도를 지닌 광기 어린 악마로 낙인찍기보다는,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상부의 명령을 따랐다고 했다. 그런 평범한 인간이 엄청난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란 말을 꺼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유가족들을 포함한 유대인 주류 사회는 "아이히만이 괴물이 아니고 그저 평범하다는 말이냐"며 발끈했다. 가까이 지내던 지인들도 절교를 선언했다.

둘째는 유대인 지역 지도자들로 구성된 '유대인 평의회'(Judenrat)의 역할에 대한 아렌트의 부정적 평가다. 유대인 장로들이 나치의 덫에 걸려 순순히 유대인 추방을 도왔기에 희생을 키웠다는 아렌트의 지적은 보수적인 유대인 사회의 분노를 불렀다. 유대인 공동체가 쉬쉬 하며 금기로 삼던 치부를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논쟁의 요점은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법정 연기에 속아 그렇게 판단했느냐"에 모아진다. 비판자들은 아르헨티나에서 아이히만이 했던 발언들과 나중에 드러난 자료들을 모아보면, 아이히만이 곧 냉혹한 악마이자 괴물이라는 사실을 아렌트가 놓쳤다고 지적한다. 아이히만이나 회스는 결코 '평범한 인간'일 수 없다는 얘기다.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테제는 결과적으로 전쟁범죄의 책임을 둘러싼 논의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아이히만이나 회스, 또는 이근안이 될 수도 있을까. 다음 주 글에선 이와 관련한 학술적 논쟁을 좀 더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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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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