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송'의 시대다. 물론 문과라고 다 같은 문과는 아니다. 의대 블랙홀 시대라지만 법학이나 경영학은 조금 낫다. "문과 놈들이 나라를 망친다"는 한 존경할 만한 의사의 발언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문과놈은 고시 패스 등을 통해 권력을 가진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믿고 싶다. 대부분, 적어도 문과 후속 세대 연구자들과 학생들은 나라를 망칠 만한 권한과 권력도, 자기 한 몸 건사할 돈도 가질 것 같지 않다.
문송함과 지방 위기는 교차한다. 작년 가을, 지방의 대형 사립대인 대구대학교의 사회학과가 모집 중지되면서 폐과 퍼포먼스로 장례식이 거행돼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근처 계명대학교 여성학과도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소문이 들린다. 더불어민주당 도종환 의원실의 2022년 조사에 따르면, 2019~2021년 3년간 전국 대학에서 이루어진 학과 통폐합 700건 가운데 비수도권 대학의 폐과·통폐합이 539건으로 77.0%나 차지하며, 인문사회계열의 폐과·통폐합이 가장 많아 700건 중 284건이다.
라이즈와 글로컬 사업 등 윤석열 정부가 내세운 '지방시대'에 맞춘 대학 정책들은 더 강력한 대학 구조조정에 불과하다는 시각이 많다. 지방대, 문과일수록 위험하다(물론 자연과학계열 기초학문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특히 최근 늘어나는 '무전공' 선발은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가뜩이나 기초학문 학과 진학률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오히려 소수학과에 진학하지 않을 수 있는 '우회로'를 만든 셈이다. 그래서 최근 한국대학교육협의회는 대학 재정지원사업 선정에 있어서 전공자율선택제를 평가에 반영하지 말아달라고 교육부에 건의했다. 그야말로 문송의 악순환이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대학 구조조정의 시대에 문송한 학과들을 유지하거나 살릴 수 있을까? 대학 재정지원사업에서 기초학문은 따로 분리시켜 평가하고 지원하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리라. 하지만 대학재정지원사업 내에서 이 방식을 도입하는 일은 쉽지 않다. 도대체 어떤 학문과 학과를 살릴 것인가? 그렇다고 모든 학문과 학과를 살릴 수도 없지 않은가? 따라서 '대학' 정책만으로 인문사회를 살리는 방안은 매우 리스크도 크고 불확실한 일인 듯하다.
한국의 인문사회 예산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2019년 교육부의 <인문사회 학술생태계 활성화 방안>은 미국과 영국은 국가 R&D 예산에서 인문사회 분야가 대체로 7~9% 내외를 차지하지만, 한국은 2019년 기준 불과 1.5% 정도라고 밝힌 바 있다.
한국은 대학진학율은 높지만 막상 석박사 학위자 수는 OECD 국가 중 매우 낮은 편이다. 따라서 '학령인구 감소'로 대학이 어려우니 경쟁력 없는 학문은 사라져도 어쩔 수 없다는 논리도 재고해야 한다. 인구에 비해 한국의 석박사 수는 너무 적기 때문이다. 적어도 인문사회의 경우, 인구보다는 이미 약화된 인문사회 학술생태계의 여건이 더 큰 변수라고 봐야 한다.
그런 면에서 '기울어진 운동장' 상황에서 또다시 학과와 학문을 (시장적) 경쟁력이 없다고 소멸시키는 것은 불공정하다. 인문사회 박사 인력의 일자리 감소는 오래되었고, 일자리가 있더라도 비전임강사, 비정년 트랙 교수, 단기 연구원 등으로 저소득과 불안정에 시달리는 이들이 너무 많다.
'무늬만 교수'로 알려진 비정년 트랙 전임교수의 경우, 전임교수인데도 연봉(평균 4,300만원, 초임은 보통 3,000만원대 초중반)이 너무 낮아 자녀가 둘 이상이거나 부가 수입도 없을 경우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되기도 한다. 이런 형편들이 서서히 알려지면서 인문사회 대학원의 공동화가 이루어진다. 후속 세대의 대학원 진학이 급속하게 감소하고, 대학들은 대학원 공동화를 외국인 유학생으로 벌충하고 있다. 외국인 유학생이 너무 많아지면서 결국 한국인 학생들은 더더욱 진학하지 않으려 한다. 미래의 삶도 담보되지 않고, 수업도 질이 떨어지니까.

지역산업 살리기도 좋지만 '지역 문화' 인프라도 중요
지방대학을 살리자는 취지로 글로컬과 라이즈 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사업 추진에 있어 선택과 집중의 경쟁력 논리나 산학 연계 논리가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메가시티를 구성하고 지역 산업 생태계 회복의 핵심에 대학을 두고자 하는 노력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지역 불균형이 심한 상황에서 산업적 성과를 내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게다가 인문사회 학술도 문화산업으로 돈을 버는 데 도움이 되므로 지원해 달라고 애써 주장하는 것도 안쓰럽다.
발상을 전환해 지역 문제 해결과 지역 문화 인프라에 인문사회학술이 기여할 수 있다고 보면 어떨까? 지역의 경제적 박탈뿐 아니라 지역의 '문화' 부재도 청년이 지역을 떠나는 중요한 요인 아닌가. <대학: 담론과 쟁점> 14호는 대구대학교 사회학과의 폐과의 장면을 기획특집으로 다룬 바 있다. 글에는 대구대학교 같은 지역 대학의 사회학과가 폐과되면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씨름하는 사회문화적 인재가 소멸할 것이라는 타당한 우려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대학 내 연구와 교육 붕괴 및 연구자 재생산 불가능성 문제는 바로 지역의 문화와 사회 문제 해결의 불가능성과 밀접하게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인문사회 학문들은 '지역위기'의 시대에 지역문제를 고민하고 지역 사회문화의 토대를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줄세우기 방식의 대학구조이 지속되는 한, 더 이상 대학에만 인문사회 학술을 맡길 수 없다.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국립대학과 수도권 대학만 인문사회를 감당하면 되는가? 그렇지 않다. 지역의 고유한 문제를 중앙에서 또는 일부 국립대에서만 감당하는 것은 불완전하거나 불가능할 뿐이다.
대학 '외부'에서 당장 시행할 수 있는 제도적 대안이 필요하다. 이강재 선생의 말대로 '국회' 직속으로 지역인문사회연구원을 수도권 이외의 지역에 설치하자. 국회 직속인 점은 미국 국립인문학재단(NEH, National Endowment for the Humanities)이 하원 소속인 점에서 착안했다. 행정부 공무원이 순환직이라서 전문성이 축적되지 않는 단점을 극복하고 장기적인 인문사회 학술정책을 추진하기 위함이다. 마침 최근 행정수도 이전 논의도 다시 불붙고 있으니 동시에 진행해볼 만하다.

비수도권 10곳 이상에 '인문사회연구원'을 설치하자
필자가 제시하는 방안은 지역인문사회연구원을 비수도권 전역에 10여 곳 이상 설치하여 개별 연구자들에게 1인 연구실과 급여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제기돼 온 '국가박사제'를 실현하는 의미가 있으며, 10여 년 전부터 김동춘을 비롯하여 김귀옥, 류재한, 윤기석, 이강재 등이 그 결은 조금씩 다르지만 주장하던 것이기도 하다. 현시점의 특수한 상황들, 즉 지방대학과 지방의 위기, 학령인구 급감, 인문사회 기초학문의 폐과와 몰락 등은 이 조치의 필요성을 높이고 있다.
학문후속 세대 연구자들을 위해 고안된 연구재단의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 A·B' 사업은 가장 호응이 좋은 학술지원사업이다. 개인베이스로 연구를 수행한다는 점, A의 경우 4,000만원의 연봉에 5년간 연구에 전념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꼽힌다. 이 사업이 수년간 진행되면서 수혜 연구자는 현재 3000여명에 달한다.
이 사업은 '지역위기'라는 현 상황에 대처하는 방안으로 사업을 더 확대해 나갈 필요가 있다. 기존 연구재단의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의 예산을 지금의 950억원보다 500억원 정도 더 늘려 1500억원 정도로 늘리고, '지역균형화' 급여체계를 도입하면서 동시에 연구공간을 비수도권 지역에 제공하는 식이다. 주거 제공과 연동하는 방안을 설계하면 더 효과적일 것이다. 기존 인문사회학술교수 A는 연 4000만원을 지급하는데, 일정한 기간 이상 지역 정주를 조건으로 지급하는 것으로 전환하고(약 3000명, 강의는 6학점으로 제한), 기존의 B는 연2000만원을 지급하는데 수도권 거주자에게 지급하는 것으로 한다(약 2000명, 연구공간 無, 강의제한 無). 이렇게 조정하는 것은 수도권의 경우 강의뿐 아니라 각종 소득창출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에 지역균형을 위한 조치의 일환이다.
그리고 생활 안정성을 위해 최소 2년~최대 생애 10년까지 연장되도록 해 최소한의 연구 안정성을 확보하도록 해야 한다. 주거공간의 경우 지자체의 청년주택 사업 등을 연구자에게 연계하면 된다.
비수도권 위주로 지역인문사회연구원 공간을 확보하여 설치하게 되면 학문후속 세대와 소장 연구자들의 연구 수월성과 생활 안정을 동시에 도모하면서, 지역균형발전을 결합할 수 있게 된다. 특히 개인연구를 기반으로 개별적으로 연구하되, 연구자들이 동일한 공간에 모여 있으므로 공동연구로 발전시키기도 용이하다. 해외연구의 번역이나 한국의 연구를 글로벌화하는 작업 모두 더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
문화강국을 주도하자는 개념인 'K-이니셔티브'의 원천 기술자는 바로 인문사회학술과 연구자들이다. 이들이 우선 연구를 해야 지방대학들의 인문사회학과가 어려워져도 나라의 인문학 교육도 유지될 수 있다.
프랑스, 독일 등 여러 선진국들이 대학 외부에 독자적인 연구기관을 독립적으로 설립하고 필요에 따라 대학과 협력하고 있다. 이를테면 프랑스 인문사회과학연구소(INSHS)는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의 하위기관인데, 박사 연구원이 약 1만 명이며 박사 과정생으로 연구비를 지원받는 연구자까지 포함하면 2만5000여 명을 지원하고 있다. 한국에도 국립기초과학연구원(IBS)이 존재하지만, 기초자연과학만을 다룬다. 따라서 인문사회과학을 다루는 기초학술기관도 균형을 맞추려면 설치할만한 타당성이 있다.
이처럼 지역균형의 요소를 반영한 지역인문사회연구원 설치가 이루어지면 연구자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것과 유사하며, 학술문화 발전, 글로벌화 등 다양한 사회적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박사학위를 소지한 연구자들의 급여로서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나 연구자의 기본생활 보장으로 기초학문의 재생산이 가능해진다면 차세대의 대학원 진학도 유도하여 국내 대학원/대학의 더 이상의 붕괴를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인재들이 조선시대의 서원들에서처럼 각 지역에 거주하게 되면, 지역 문화와 지역시민들의 인문학적 역량 향상의 기반도 마련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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