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 끝에서 나치 독일은 수용소 독가스실에서 죽은 유대인들의 '피 묻은 금'을 스위스 은행과의 '더러운 거래'로 세탁해 전쟁자금으로 썼다고 짧게 짚었다. 죽은 유대인들의 입을 벌려 금니를 뽑아내는 끔찍한 모습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다. 그런 야만적 과정을 거쳐 모은 금니, 또는 막 이송돼온 유대인들의 가방을 뒤져 모은 금 목걸이나 반지 등 귀금속은 베를린에 본부를 둔 나치 친위대 소속의 경제행정부(Verwaltungshauptamt)에서 관리했다. 당연히 독일의 침략전쟁 비용을 메우는 데 요긴하게 쓰였을 것이다.
스위스은행과 히틀러의 결탁
문제는 스위스 은행이다. 히틀러의 침략전쟁으로 이득을 챙긴 전범기업들 얘기를 하자면,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까이에 공장을 차리고 노예노동을 강요했던 IG 파르벤, 플리크 KG, 크루프(Krupp) 등과 더불어 스위스 은행을 빼놓을 수 없다. 전세계 독재자들과 부패 기업인들의 비자금을 스위스 은행이 관리해주고 고액의 수수료를 챙긴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독재정권이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독재자(또는 그 대리인)가 갑작스레 죽는다면, 천문학적 규모의 비자금은 '눈먼 돈'으로 스위스 은행 몫이 돼버릴 가능성이 크다. 그런 스위스 은행이 지난날 나치와 손을 잡고 '더러운 거래'를 벌이며 엄청난 이득을 챙겼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라울 힐베르크는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을 최소 510만 명으로 잡으면서 그 가운데 1942년에 260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추산했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2>, 개마고원, 2008, 1722쪽). 1942년 무렵 나치 독일이 동유럽 곳곳에 만든 강제수용소에서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은 국제사회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 스위스 은행가들도 모를 리 없었지만, 아랑곳없이 나치와의 '더러운 거래'를 이어갔다.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서의 패배(1943년 2월) 뒤 전쟁 승리의 전망이 흐려진 뒤에도, 스위스 은행가들은 히틀러가 전쟁을 이어갈 수 있도록 자금 면에서 도움을 주었다. 유럽사를 전공한 캐나다의 진보적인 재야 사학자 자크 파월은 나치 정권과 독일 대기업의 유착 관계를 파헤친 역작(Big Business and Hitler, 2017)에서 스위스은행이 나치의 '피 묻은 금'(blood gold, Blutgold)을 세탁해주었다고 비판한다.
[스위스은행들은 나치가 훔친 금을 스위스 프랑으로 구입했다. 그 은행들은 금의 출처를 물어 귀찮게 하지 않았다. 국제시장에서 독일의 라이히마르크가 신용을 잃어 곤란을 겪던 나치는 이렇게 획득한 스위스 프랑으로 스위스뿐만 아니라 다른 중립국에서 온갖 전략 물자와 원료를 구입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포르투갈의 텅스텐이나 스웨덴의 철광석 같은 원료였다.](자크 파월, <자본은 전쟁을 원한다>, 오월의 봄, 2019, 186쪽)
위에 옮긴 글 가운데 '금의 출처를 묻지 않았다'고 했다. 알고 보면 그 금은 독일 점령지의 은행과 유대인 부자들로부터 약탈한 금이거나, 수용소의 유대인 시신에서 뽑아낸 '피 묻은 금'이었다. 스위스은행뿐 아니라 도이체방크를 비롯한 독일은행들도 금 거래로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제국은행을 통해서 넘겨받은 금괴를 도이체방크는 스위스은행에 다시 팔아넘겼다. 눈앞의 이득 앞에 기업윤리는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굴뚝이란 굴뚝은 모조리 불꽃을 토했다"
1944년 가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처형은 정점을 찍었다. 특히 그해 7월까지 40만 명이 넘는 헝가리 유대인들이 열차로 실려 오면서 가스실들이 풀가동됐다. 수용소 근처의 공기가 너무나도 악취가 심해서 '아우슈비츠 하늘에는 새 한 마리조차 얼씬거리지 않는다'는 말조차 나돌았다.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크리스티나 쥬블스카(1918-1992)는 1941년 바르샤바 게토에서 살다가 도망쳤다. 그러나 1943년 6월에 붙잡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소련군이 다가오던 1945년 1월 친위대 경비병들이 5만 8000명의 수감자들을 데리고 베르겐-벨젠 쪽으로 철수할 때 틈을 봐서 도망쳤다. 1년 뒤인 1946년 <나는 살아 돌아왔다>는 제목의 증언집을 펴냈다.
특이한 점은 쥬블스카는 (유대인 수감자들에 대한 동정심을 나타내면서도)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가톨릭 신자인양 썼다. 나치 독일의 억압을 받으며 어렵사리 살아온 동유럽 유대인들은 전쟁이 끝나고도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어려웠다. 동유럽의 반유대주의 정서 때문이었다. 1951년 런던에서 나온 영역본에서 쥬블스카가 1944년 아우슈비츠 소각로와 화장터 상황이 어땠는지를 묘사한 대목을 보자.
[그날 밤 불길은 절정에 이르렀다. 모든 굴뚝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구멍과 도랑에서 연기가 솟구쳐 머리 위로 소용돌이치고 흔들리며 휘감겼다. 불똥과 재가 흩날려 눈을 뜨기가 어려웠다. 두 번째 화장터의 울타리 너머 불길을 배경으로 갈퀴를 든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구덩이에서 시체를 돌리고 더 잘 타도록 특수 액체를 붓는 특수작업반원들이었다. 불에 탄 시체에서 풍기는 썩은 냄새가 숨을 막히게 했다. 대형 트럭이 시체 냄새를 풍기며 우리 앞을 지나갔다.](Krystyna Zywulska, <I Came Back>, Dennis Dobson, 1951, 179쪽)
가스실 처리 용량에 견주어 워낙 많은 사람들이 끌려오는 바람에 그 시신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정상적이라면 가스실을 거쳐 소각로를 갖춘 화장터에서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1944년의 아우슈비츠 가스실은 초만원이었다. 나치는 하는 수 없이 일부 사람들을 야외 마당에 커다랗게 파놓은 보조 화장터(구덩이)에 몰아넣고 산 채로 불태워 죽였다. 차마 믿어지지 않는, 그야말로 참혹한 이야기다.
존더코만도의 무장 봉기
수용소 안에서 흔히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로 불렸던 특수작업반원들이 모두 주어진 궂은 임무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시신 처리를 거부한다면 죽을 줄 알면서도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 11개월 동안 갇혔다가 극적으로 살아난 이탈리아 화학자 프리모 레비의 증언을 들어보자.
[적어도 한 가지 경우에 관한 한 우리는 확실한 정보를 갖고 있다. 코르푸(지중해에 있는 그리스 섬) 출신의 유대인 400명이 1944년 7월에 특수작업반에 편입되자, 전원이 똘똘 뭉쳐 작업을 거부했다. 그들은 즉시 독가스로 살해됐다. 그밖에도 즉각 처벌된 다양한 개별적인 반란(저항)에 대한 증언이 남아있다. 특수작업반의 극소수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인 필립 뮐러는 친위대원들이 산 채로 화로(소각로)에 넣은 자신의 동료에 대해 얘기한다. 작업반원으로 뽑힌 순간에 또는 그 직후에 자살한 많은 사례들도 있다.](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돌베개, 2014,66-67쪽)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일어난 무장봉기는 다름 아닌 특수작업반원들이 일으켰다. 제2수용소(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 설치된 5개의 화장터 가운데 2개의 화장터에서 일했던 그들은 화장터를 폭약으로 무너뜨렸다. 미 작가 주디 버탤리언의 할머니는 폴란드 유대인 출신으로 홀로코스트 생존자다. 버탤리언의 최근작(The Light of Days, 2021)에서 무장봉기 관련 대목을 보자.
[1944년 10월7일 특수작업반원들은 망치와 도끼, 돌로 친위대원들을 공격하고 화장장을 폭파했다. 화장장에는 기름과 술로 적신 누더기를 갖다 놓았었다. 그들은 숨겨놓았던 무기를 파내서 친위대 경비병을 사살하고 다른 사람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들은 특히 가학적이었던 나치들을 붙잡아 산 채로 화로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철조망을 끊고 도망쳤다.](주디 버탤리언, <게토의 저항자들: 유대인 여성 레지스탕스 투쟁기>, 책과 함께, 2023, 504쪽)
화장장 폭파에 쓰인 무기는 여성 수감자들이 화약 부품 공장에서 몰래 빼낸 원료를 깡통에 채운 수제폭탄이었다. 하지만 탈출은 실패로 끝났다. 어렵사리 300명쯤이 수용소 밖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폴란드 파르티잔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던 터라, 모두 붙잡혔다. 나치는 이들을 모두 총살했다. 시신을 점호 대형으로 늘어놓고 남은 수감자들이 보도록 했다. 뒤이어 엄한 조사와 심문이 이뤄졌다. 폭약을 건네준 10대 소녀 4명이 붙잡혀 교수형으로 죽었다(그날 봉기로 친위대원 3명이 죽고 12명이 다쳤지만, 수감자는 450명이 죽었다).
바르샤바를 비롯해 폴란드 게토에서는 수용소로의 이송 막판에 가서야 봉기가 터졌다(연재 106 참조). 아우슈비츠 봉기도 사정은 비슷했다. 독일군이 패망하면서 수용소에서의 전쟁범죄 흔적을 없애려 들 경우 자신들의 목숨도 위태로울 것이라 판단하고 봉기에 나섰다.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에게는 '즉각적인 복종 아니면 죽음이라는 양자택일'만이 주어졌다고. 너무 늦긴 했지만, 그들은 복종을 거부하고 맞서 싸우다가 죽는 쪽을 택했다.
트레블링카와 소비보르 봉기
아우슈비츠 다음으로 많은 학살이 이뤄진 곳이 트레블링카 수용소다. 많은 경우 하루에 어린이들을 포함해 1만5000명의 남녀가 치클론B 독가스로 처형됐던 악명 높은 '죽음의 수용소'였다. 1943년 가을에 문 닫을 때까지 모두 합쳐 90만 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진다. 트레블링카에서도 특수작업반원들을 중심으로 봉기(나치의 시각에서는 '폭동')가 일어났다.
독일이 전쟁에서 질지 모른다는 생각들이 퍼져있던 1943년 여름, 나치는 전쟁범죄의 증거들을 없애기 위해 시신들을 묻었던 큰 구덩이를 다시 파헤쳤다. 반쯤 썪어 악취가 물씬 나는 시신들을 불 태우고 처리한 사람들은 수백 명의 특수작업반원들이었다. 그들은 총을 든 친위대원들이 (연기와 냄새를 피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그런 끔찍한 작업을 맡아 해냈다.
패망을 앞둔 무렵 트레블링카 수감자들은 나치가 전쟁범죄의 증거를 없애려고 남은 이들마저 죽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지하 부대'를 꾸려 봉기했다. 절망한 나머지 자살하려는 사람들에게 봉기 조직자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나치의 죄상을 증언해야 세상에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며 용기를 북돋았다. 1943년 8월2일 그들은 수용소에 불을 지르고 혼란을 틈타 탈출을 꾀했다. 많은 수감자들이 죽었지만 40명이 도망쳐 살아남았다. 아우슈비츠보다는 더 성공적인 봉기였다(테렌스 데 프레, <생존자>, 서해문집, 2010, 71-72쪽 참조).
폴란드 동부 국경지역의 늪지대에 세워진 소비보르 수용소에서도 봉기가 터졌다. 1942년 봄에 세워진 소비보르에선 모두 17만 명에서 20만 명쯤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네덜란드 유대인 10만 명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 소비보르로 끌려와 살해됐다. 1943년 10월 소비보르 봉기의 주역은 아우슈비츠․트레블링카처럼 소각로에서 시신 처리를 맡았던 특수작업반원들이었다.
소비보르 봉기의 동기는 베우제트 절멸수용소와 관련이 깊다. 1943년 6월 말에 베우제츠가 문을 닫으면서 그곳에서 시신처리를 하던 특수작업반원 300명이 소비보르로 이송돼 오자마자 곧바로 처형되었다. 죽음을 내다본 그들은 자신들의 옷 속에 '다음 차례로 죽는 것은 당신들이다. 우리의 복수를 해달라'는 쪽지를 남겼다. 이를 발견한 소비보르의 특수작업반원 600명은 전투 경험이 있는 소련군 포로 출신의 지휘 아래 은밀히 봉기를 준비했다.
1943년 10월14일 봉기가 터졌다. 주모자들은 먼저 수용소 부소장과 친위대 장교 몇 명을 사무실이나 행정실에서 은밀하게 죽였다. 그런 뒤 저녁 점호 때에 맞춰 집단 탈출을 꾀했다. 감시탑의 기관총이 불을 뿜는 가운데 모두 111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그 가운데 전쟁이 끝날 때까지 58명이 살아남았다. 나치 친위대는 추가 봉기를 막으려고 남은 수감자들을 대부분 학살한 뒤 수용소를 폐쇄했다(소비보르 봉기는 아우슈비츠․트레블링카 봉기보다 더 성공적이었고, 극적인 요소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소비보르 탈출'이란 같은 제목의 영화로 여러 편이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도 각기 다른 버전들이 극장과 TV에서 상영됐다).

폴란드 총독의 수용소 출입 막아
나치 친위대(SS)는 수용소 안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범죄 행위가 바깥에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 애썼다. 아우슈비츠에 처음 발령을 받은 근무자들은 '업무상 비밀'을 지키겠다는 선서를 했다. 친위대 소속 경비대원들과 '트라우니키'(우크라이나 부역자들로 이뤄진 보조원들)은 수용소 막사와는 떨어진 공간에서 지냈다. 아우슈비츠 안팎에서 개인적인 사진 촬영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정부와 나치당의 고위 인사가 수용소를 예고도 없이 방문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그럴 경우 수용소 지휘관들은 신경이 예민해졌다. 방문객이 수용소 굴뚝에서 나는 연기에 대해 묻는다면, 그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시체가 처리되고 있다'고 말이다. 친위대 총사령관으로 나치 수용소들을 관리․감독했던 하인리히 힘러는 호기심에 찬 고위 인사들의 방문을 반기지 않았다.
힘러는 심지어 폴란드 점령지 총독 한스 프랑크의 수용소 방문마저 막아섰다. 프랑크가 히틀러의 신임을 받는 골수 나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법률가 출신인 프랑크가 만에 하나 친위대의 가혹행위를 문제 삼지 않을까 경계심을 품었다. 관련 글을 보자.
[폴란드 총독 프랑크는 절멸수용소의 세부 사항에 대해 아주 큰 관심을 보였다. 프랑크는 힘러에게 루블린(마이다네크) 수용소를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힘러는 말렸다. 그 뒤 프랑크는 예고 없이 아우슈비츠를 찾아갔다. 그러나 프랑크가 탄 차는 제지당했고, '수용소에 전염병이 생겼다'는 표준적인 설명을 들어야 했다. 그 뒤 어느 날 프랑크가 히틀러에게 그날 일에 대해서 불평하자, 히틀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반동들이 처형되고 있다는 것은 당신도 상상할 수 있지 않소. 더 이상은 나도 몰라요. 힘러에게 직접 물어보지 그래요."](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2>, 개마고원, 2008, 1322-1323쪽)
위 옮긴 글을 읽다보면 폴란드 총독 프랑크가 유대인 학살을 반대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십상이다. 그야말로 오해다. 프랑크는 자신의 법적 관할지역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이 높았을 뿐이다. 프랑크는 '유대인이라면 처벌받아 마땅한 범죄자'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골수 나치였다.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을 '열등한 하급생물'로 낮춰보는 발언을 내뱉곤 했다. 그가 자주 입에 올리던 표현은 "유대인들과 이[蟲)와 같다"였다. 1943년 7월 19일의 총독부 회의에서 보건국장이 티푸스가 줄어들고 있다고 보고하자, 프랑크는 "유대적인 요소의 제거가 유럽의 '보건'에 기여한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을 정도다(라울 힐베르크, 1427쪽).
'분리 숙박' '샤워장' 등 완곡어법으로 학살 은폐
나치가 수용소의 학살을 아무리 감추려 해도 한계는 있었다. 수용소 가까이에 사는 폴란드인들도 수용소의 굴뚝에서 끊임없이 퍼져 나오는 매캐한 연기 냄새를 맡았다. 아우슈비츠의 경우 수감자들의 노예노동을 갈취하는 대규모 공업 단지의 성격을 지녔기에, 독일 민간기업의 기술자나 건축기사들이 드나들었다. 그들도 눈치가 있었기에 그곳에서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나치가 감추고 싶어 하는 가스실과 소각로의 비밀은 그렇게 조금씩 바깥 세계로, 독일 본토로,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나치의 지도부는 아우슈비츠의 '더러운 비밀'이 새나가는 것을 막으려 애썼다. 문서나 보고서에서도 '학살'이니 '살인' 또는 '학살시설'이란 직설적인 단어를 삼갔다. 전쟁범죄를 가리는 이른바 '은폐된 용어'를 썼다.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은 가장 널리 알려진 은폐 용어다. '특별처리'나 '특수치료'는 학살을 가리켰다. '작전 또는 조치'(Aktion)도 마찬가지였다. '동쪽에 정착'(Umsiedlung nach dem Osten)은 강제 추방과 죽음을 뜻하는 말이었다. 수용소로의 강제이송을 가리켜 흔히 '동쪽으로 옮겨간다'고 했다.
이렇듯 나치는 유대인 학살에 관련된 일상적인 용어를 암호명과 중립적 의미를 지닌 용어, 또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바꿔 썼다. 곧바로 죽일 사람과 노예노동자로 부릴 사람을 나누는 것을 '분리 숙박'이라 했다. 치클론B 지하 보관실을 '특별창고'로, 지상 가스실을 '특별작전을 위한 샤워장'으로 불렀다. 유대인들을 집단적으로 열차에 태워 보내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에서도 '소개(疏開)'라든가 '이주지 교체' '특별시설' 따위의 용어들이 쓰였다. 특정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는 나치들끼리의 그런 완곡어법은 이해나 소통에서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라울 힐베르크의 글을 보자.
[또 다른 보고서에는 '유대인 세척작전'이란 표현이 나온다. (친위대 총사령관) 힘러는 '근절'이라고 했다. 독일 관리들은 자주 '탈유대화"라는 단어를 썼다. 살인만이 아니라 유대계 재산의 아리아화에도 쓰인 그 표현은 '어떤 것에서 유대인을 제거한다'는 뜻이다. 가장 애용되던 용어는 '유대인으로부터 깨끗이 한다'는 것이었다. 그 표현은, 독일 해충박멸 회사(IG 파르벤)가 치명적인 가스제품(치클론 B)을 공급하여 유대인 100만 명을 죽였을 때 진정한 현실이 되었다. 그렇게 하여 파괴가 '청결 행위'로 전환되었다.](라울 힐베르크, 1428쪽)
홀로코스트는 나치 독일의 국가 기밀이었다. 특히 홀로코스트를 앞장 서 이끌었던 히틀러나 힘러에게 대량 학살은 문서 기록으로 남아선 안 될 일이었다. 학살 계획이나 결과에 관련된 서류들은 모두 '일급비밀'(Geheime Reichssache)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 문서들은 적군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특별 취급'되었고 나중에 파기·소각됐다.
실제로 나치 독일은 패전 무렵 대부분의 관련 문서를 없앴다. 그럼에도 미처 폐기 못한 전쟁범죄 증거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어느 마을에서 모두 몇 명을 죽였다'는 식으로 이동학살부대(Einsatzgruppen)가 상부에 올리는 보고서 따위였다. 전승국들은 그런 문서들을 챙겼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증거 자료로 활용됐다. 전쟁이 끝난 뒤 홀로코스트 연구자들이 희생자 규모를 대충이나마 짚어볼 수 있었던 것도 압수된 1차 자료들을 뒤져본 덕이었다(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나치에 견주면 훨씬 꼼꼼하게 태워 없앴다. 그런 사정으로 일본 극우들은 전쟁범죄를 부인하면서 걸핏하면 '증거를 내놓으라'고 되려 큰소리친다. 그들의 용어 사전에 '사죄'는 없다).
"왜 문신을 지우지 않느냐고?"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와 맞닿은 전범기업 IG 파르벤 공장에서 합성고무 '부나'를 만들다가 살아남은 이탈리아 화학자 프리모 레비는 나치 수용소가 세 가지 목적을 지녔다고 봤다. 첫째는 노예노동 강요, 둘째는 나치 히틀러 체제에 반감을 지닌 자들의 제거, 셋째는 이른바 '열등한 인종' 절멸이었다(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돌베개, 2014, 145쪽). 스탈린 치하의 소련 수용소(Gulag)는 세 번째(인종 절멸)은 없었다는 점에서 나치 수용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글 위에서 나치는 수용소의 더러운 비밀이 새나가는 것을 막으려 애썼고 패전 무렵 전쟁범죄의 증거물들을 없앴다고 했다.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팔에 새겨진 문신이 곧 나치의 전쟁범죄 증거라 여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선 약 40만 명이 팔뚝에 수감자 번호를 문신으로 새겼다. 아우슈비츠 생존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전쟁 뒤 문신을 지웠지만 레비는 그러지 않았다.
[40년의 세월이 지나 나의 문신은 내 몸의 일부가 됐다. 나는 내 문신을 부끄러워하지도 자랑스러워하지도 않으며, 드러내 보이지도 숨기지도 않는다. 순전히 호기심에 보여달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마지못해 보여준다.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에게는 화가 나서 선뜻 보여준다. 흔히 젊은이들은 내게 왜 문신을 지우지 않느냐고 물어 나를 놀라게 한다. 내가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이런 (나치의 전쟁범죄) 증거를 지니고 있는 우리는 세상에 얼마 되지도 않는데.](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돌베개, 2014, 144쪽)
유대인들에게 문신은 종교적으로 피해야 하는 행위였다. 유대교에선 이민족과 유대인을 구별하려고 문신을 금지한다. 모세 율법(레위기 19장 28절)에도 문신을 새기지 말라고 돼 있다. 유대교 신앙이 없는 유대인이라면 몰라도 특히 정통파 유대교 신자에게 아우슈비츠에서 자신의 팔뚝에다 문신이 새겨진 것을 받아들이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에겐 문신이 한마디로 커다란 심리적 충격이었다.
나치는 수용소 행정상 필요했기 때문에 수감자 번호를 문신으로 새겼다지만, 레비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나치가 의도적으로 수감자에게 문신을 새겼다"고 여긴다. 유대인이든 아니든아무런 죄가 없다고 느끼는 수감자라도 문신으로 새겨진 수감자 번호를 볼 때마다 '형벌을 받고 있다'는 현실을 잊지 않게 해준다는 얘기다. 하지만 레비는 문신을 지우지 않았다. 나치 전쟁범죄의 증거를 없앨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21세기엔 희생자가 아니라 가해자
레비는 운이 좋아 살아남았지만, 적어도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아우슈비츠에서 노예노동을 강요당하거나 처참하게 죽어갔다. 14세기 이탈리아의 작가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神曲)> 지옥편이나 18세기 영국 시인 존 밀턴의 <실낙원(失樂園)>을 떠올리는 상황이 20세기 중반 유럽 땅에서 벌어졌다.
그렇기에 유럽인들은 히틀러나 그의 명령을 충실히 집행한 친위대 총사령관 힘러를 가리켜 '악의 화신'이라 부르길 망설이지 않는다. 그런 악의 화신들에게 희생된 이들 가운데 유대인 후손들이 21세기 중동 팔레스타인 가자(Gaza) 지구에서 또 다른 지옥도를 만들어내고 있다. 가자 지구는 이미 거대한 파괴현장이 됐다. 차이점이라면, 이번엔 유대인이 희생자가 아니라 가해자로서다.
수용소라는 한계상황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따로 없었다. 언제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죽음은 가까이 있었다. 벼랑 끝 상황에서도 자존감이 강한 소수의 사람들은 날마다 얼굴을 깨끗이 씻고 최소한의 청결을 지키려 애썼다. "우리는 동물이 돼선 안 된다"며 인간적 품위를 지키려 했다. 그런 이들은 (지난 글에서 살펴본, 삶의 의지를 잃고 자포자기한 모습을 내보인 '무슬림'들과는 달리)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다. 다음 주 글에선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수용소라는 지옥을 어떻게 버텨냈는지,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헤쳐 나왔는지를 살펴보려 한다.(계속)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