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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률이 걱정이라면, 그래선 안 된다

[오찬호의 틈새] 자살률 국가비상사태, '두 번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자살하려는 기질은, 없다

"한국자살률, 공중보건 국가비상사태"

2024년도 자살률 잠정치를 보도한 한 언론의 기사 제목은 자살이라는 사회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번에 드러냈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 28.3명은, 2022년 25.2명에서 2023명 27.3명으로 증가한 흐름이 이어지는 추세라 매우 걱정스러운 수치다. 하루 4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 불안한 기세를 꺾지 못하면 최고치였던 2011년의 31.7명도 돌파하지 않겠는가.

이 통계가 비슷한 생활세계를 구축한 나라들에서 대등하게 나타난다면,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질문으로 접근할 문제일 거다. 어디 그러한가. 한국 사람이 더 죽는다. 성별, 연령별로 따져보면 한국 사람 중 누가 더 죽는지가 드러나지만 그건 한국에서의 차이일 뿐이다. 남성의 자살률이 여성보다 훨씬 높은데, 그 여성의 자살률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노인의 자살률이 청소년보다 훨씬 높은데, 그 청소년들의 자살률도 세계에선 상위권이다. 그러니 한국은 20년 넘게 OECD 국가들 중 자살률 1위인 거다. OECD 국가 자살률 평균이 10~11명이니, 한국 아니었다면 평균은 한 자릿수 아니겠는가. 한국 때문에 평균만 높아진 꼴이다. 노골적으로 말해, 한국은 전혀 선진국이 아니다.

설마 그런 기질을 타고났기 때문이겠는가. 주요 국가들의 2000년과 2021년의 자살률을 보면 독일(13.2→9.7명), 스위스(19.2→10.8명), 오스트리아(20.1→11.0명), 프랑스(18.8 →12.5명) 등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런 기질을 제어했다(통계청, <국민의 삶의 질 보고서(2024)>, 37p) 애초에 기질 문제가 아니었으니 가능한 변화였을 거다. 특히나 '의리 자살'이라면서 사무라이 문화와 연결되어 분석되곤 했던 일본도 23.0명→15.6명으로 큰 변화를 이뤄냈다. 포르투갈(5.2→8.5명), 네덜란드(9.6→10.2명), 미국(11→14명) 등 증가한 나라도 있지만 한국(17.5→ 24.3명)과 비교해 수치의 심각성이 다르다. 한국이 가는 방향도, 그 속도도 더 걱정스럽다.

놀라운 건, 2000년에서 딱 10년 전의 한국의 자살률이 7.6명(1990년)이었다는 사실이다. 통계를 집계한 1983년부터(8.7명) 1994년까지(9.5명) 한국은 자살률이 10명 미만인 나라였다. 그때, 우리는 자살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자살률이 한국의 3~4배였던 핀란드나(1990년-30.6명) 덴마크(25.0명) 사례를 언급하며 복지가 과해서 나타나는 증상으로 배우지 않았는가. 사람들이 할 일이 없고 목표의식이 없으니 삶의 의지를 놓아버린다는 식의 설명을 정확한 분석 없이 누구나 하던 시절이었다. 이후 두 나라는 어떻게 되었는가. 핀란드는 30.6(1990년)→22.4(2000년)→13.2명(2021년)으로, 덴마크는 25.0(1990년)→13.9명(2000년)→8.5명(2021년)으로 수치는 유의미하게 감소했다. 복지국가이길 포기해서일까? 아니면 자살 문제를 공중보건 국가비상사태로 정확히 인지하고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일까?

자살을 우습게 분석했던 풍토야말로 그 시절의 적나라한 수준일 거다. 그러니 그때의 자살률을 언급하며 '힘들었지만 서로 다정은 했다'는 식으로 분석하는 건 참으로 위험하다. 당시에는 중고등학교 입시에도 체력장이 있었고 직장인들도 아침마다 국민체조를 했기에 모두의 몸과 마음이 튼튼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돌아다니는데 큰일 날 소리다. 당시 국민들의 정신건강이 말짱했겠는가. 아픈 걸 몰랐을 뿐이다. 그 결과가 지금의 압도적인 노인 남성의 자살률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2023년 기준 70대 남성의 자살률은 63.9명이다. 80대 남성은 더 끔찍하다. 무려 115.8명이다. 이들은 사회가 자살에 무지했던 시절을 관통하며 노인이 되었다. 그땐, 그저 버텼다는 거다.

뭘 그런 거로 병원을 가냐

자살률은 1997년 13.2명에서 1998년 18.6명으로 급증하는데, 이건 외환위기의 영향이지만 정확히는 그 위기를 '견딜'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아서 발생한 일이다. 서구사회와 이웃 나라 일본이 자살률이 높아 전전긍긍할 때, 한국은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그저 한국의 따뜻한 가족문화 타령하기 바빴다. 가족문화가 깨질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이 가족문화를 깨트리는가를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전자는 개인의 정신건강에 관한 관심이 높아져야 함을, 후자는 고삐 없이 질주하는 자본주의 욕망을 사회적으로 제어해야 함을 뜻한다. 그러했는가. 이미 어그러진 신호는 1992년부터 1997년까지 자살률이 조금씩 오르면서 드러나는 중이었다. 그 상황에서 IMF 사태가 터졌을 뿐이다.

▲1983~2023 자살률 추이 (통계청 지표누리-국민 삶의 질 지표). ⓒ통계청

외환위기는 어떻게 극복되었을까? 당시 한국의 구조조정 속도가 너무 빠르다며 IMF가 걱정할 정도였으니, 어떤 상황이었겠는가. 성장 일변도의 접근이 한국에 외환위기가 발생한 이유인데, 한국은 그보다 더 강한 성장의 정신으로 똘똘 뭉쳐가며 위기를 빠른 시간에 극복했다. 사람들이 쓰러지는 거야 당연했다. 2001년부터 2011년까지 자살률은 가파르게 증가한다. 이 시기 유행어는 '부자 되세요'였고, 서점에서 자기계발서들이 차지하는 비중 역시 가파르게 증가했다. 힘든 게 인생이라는 말이 무슨 철학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유했고 미치지 않고선 성공할 순 없다는 이야기가 교훈이랍시고 넘쳐났다. 성공 아니면 실패 정도가 아니라, 성공 아니면 죽어야 하는 세상이었던 거다.

극기, 인내, 노력만이 진리였던 시기에 누가 '마음이 불안하다'면서 도움을 청하겠는가. 단적인 예로 나는 여러 대학을 돌아다니는 시간강사 생활을 12년간 하면서 병원 진단서를 첨부한 유고결석계를 매 학기 수백 장 받았는데, 단 한 번도 정신과 질환이 적힌 의료기록을 본 적이 없다. 없어서였겠는가? 밝힌들 소용이 없으니, 드러내지 않는 거다. 우울증은 골절하곤 다른 취급을 받았으니 말이다. 우리는 상대의 병을 알면 '어쩌다가?'라는 추임새를 습관적으로 뱉는다. 다리가 부러졌을 때 이 물음은 운동하다가 등등으로 이어져 자연스러운 대화를 보장한다. 하지만 우울증은 끊긴다. 애써 이유를 설명한들 그것도 병이냐, 누군 안 힘드냐, 그러면 대한민국 사람 다 우울증 걸리겠네 등등의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러니 아파도 말하지 않는다. 우울증은 극기, 인내, 노력 앞에서 너무나도 납작한 증상이기 때문이다.

OECD 자살률 1위 국가가 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사회는 움직였다. 연예인들의 연이은 자살은, 우울증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국가 차원에서의 관심은 보다 전문적으로 변했다. 정신과 의사들은 강연과 저술로 대중과의 간격을 좁혔다. 그들은 정신건강 돌봄의 중요성을 부단히 강조했고 그 덕에 사람들은 용기 내서 병원을 찾았다. 이 별 거 아닌 게, 그전까지는 '뭘, 그런 걸로 병원을 가냐'는 식의 빈정거림과 마주해야 했으니 엄청난 변화였다. 자기계발에 너무 집착하면 차별과 혐오에 둔감한 괴물이 된다는 논의도 등장했다. 개인의 정신적 아픔을 차분한 논조로 솔직하게 고백하는 책들이 힐링서로 주목받곤 했다. 편견이 조금씩 깨지니, 2012년부터 2017년까지 자살률은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이후 야속하게도 자살률의 흐름은 약간의 굴곡도 있지만 우샹향이다.

자살률이 걱정이라면, 그래선 안 된다

왜일까. 두 번째 질문이 풍성하지 못하기 때문일 거다. 누가 자살하는지에 대한 첫 번째 질문은 정신건강을 돌보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연료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이제는 학교에서도 검사가 많다. 치료과정도 체계적이다. 학교 상담사를 만나고, 외부 상담기관을 소개받고, 병원을 가는 결심에 이르는 과정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위기관리 매뉴얼이 작동되고 있다는 거다.

하지만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낯설다. 우울증의 원인을 찾아 몇 단계만 거슬러 올라가면,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자살이 '사회적 타살'이라는 말을 다들 이해는 하는데, 그 사회가 구체적으로 언급되면 듣는 둥 마는 둥이다. 많은 이들이 '우울증 환자가 늘어났다'는 걸 사회적 설명의 전부로 이해한다. 요인을 찾아가면 표정은 굳어진다. 경쟁, 능력주의, 승자독식, 엘리트주의, 양극화 등의 말들이 끼어들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저런 가치를 신봉하고 사는 거야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자살률이 걱정이라면, 그래선 안 된다. 사회비판 학문이 대학에서 사라지는 걸 찬성하는 거야 자유다. 하지만 자살률이 걱정이라면, 그래선 안 된다. 언론이 불평등에 예민한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자살률이 걱정이라면, 그래선 안 된다. 워라밸 챙기다가 이도 저도 안 된다고 말하는 거야 자유다. 하지만 자살률이 걱정이라면, 그래선 안 된다. 아무리 정신건강 돌봄 매뉴얼이 좋아졌단 한들, 자살위험군 분모가 커지면 감당할 수가 없다.

나는 강연에서 영화 <기생충>을 '한국이 왜 자살공화국인지 그 이유를 말해주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는데, '세상을 좀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좋겠다'는 충고를 들었다. 방송에서 초등학생이 의대준비반에 들어가는 시험을 '미쳤다'고 표현했더니,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을 폄하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기도 했다. 두 번째 질문(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을 어떻게든 막겠다는 세상에서, 자살률은 절대 줄지 않을 거다.

자살을 공중보건 국가비상사태의 영역에서 다룬다는 것은 그 원인과 해결책을 사회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찾겠다는 뜻이다. '사회적 타살'이란 말에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그 사회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개인에게 얽혀있는 복잡한 사회적 실타래를 조금도 축소하지 않아야 한다. 이는 '왜'의 무한반복으로 가능할 거다. 왜 자살하는가? 이런저런 이유가 있다면 그건 또 왜인가. 이런 접근을 지긋지긋하게 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도대체 어떠한지를 따지고 또 따져야지만 자살률은 유의미한 방향으로 향할 것이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2011년 이후 13년 만에 가장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27일 오후 서울 마포대교 난간에 자살 예방을 위한 메시지가 적혀져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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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

오찬호 작가는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2년 간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친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사회학적 시선을 바탕으로 일상 속 평범한 사례에 어떤 사회구조가 얽혀있는지를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글을 쓰고 있다. 자기계발 강박이 능력주의로 연결되어 공동체를 어그러트리는 모습을 추적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를 시작으로 대학의 기업화를 비판한 <진격의 대학교>(2015), 경쟁사회의 내면을 파헤친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2018) 등 많은 책을 집필했다. 최근작으로는 <민낯들>(2022), <세상 멋져 보이는 것들의 사회학>(202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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