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올해로 80년을 맞았다. 적어도 5000만 명에서 7000만 명쯤이 숨진 그 큰 전쟁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기억한다. 우리 한국인들로선 일제 강점기 시절에 벌어졌던 징병과 강제노동, 성노예 '위안부' 학대가 남긴 깊은 상흔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731부대의 세균전 실험도 빼놓을 수 없다. 이에 견주어 유럽에서는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가 남긴 충격이 으뜸으로 꼽힌다.
유럽인들에게 '전쟁 중에 끔찍한 집단학살과 노예노동이 벌어졌던 곳이 어디냐'를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아우슈비츠'라고 말한다. '죽음의 수용소' 또는 '절멸 수용소' 하면 아우슈비츠를 떠올린다. 그만큼 나치 전쟁범죄의 상징적인 장소로 자리 잡았다. 만주 하얼빈에 악마의 터를 잡았던 731 세균부대와 마찬가지로 인류전쟁사의 어두운 집단 기억을 지닌 곳이 아우슈비츠다.
"내게 용서와 화해를 말하지 말라"
오스트리아 유대인 출신인 장 아메리(1912-1978, 본명은 한스 마이어)는 나치 전쟁범죄에 관련된 깊이 있는 성찰로 이름을 남긴 작가다. 1943년 벨기에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활동하다가 게슈타포에게 붙잡힌 그는 고문을 받은 뒤 폴란드 아우슈비츠, 독일의 부헨발트, 베르겐-벨젠(<안네의 일기>로 이름이 알려진 소녀 안네 프랑크가 죽은 곳)을 거치며 극적으로 살아남은 이른바 '홀로코스트 생존자'다. 아메르는 나치 독일이 저지른 전쟁범죄가 워낙 악독했기에 '(나치의) 지나친 악의 부패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진정으로 설명해주지 못 한다'고 잘라 말한다.
[그것(나치의 전쟁범죄)은 어느 개발도상국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고, 소련과 같은 독재정권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진 것도 아니고, 로베스피에르의 프랑스혁명 때처럼 불안에 떠는 혁명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고, (이른바 '문명국가'라 일컬어온) 독일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자연을 거역해서 무성생식(無性生殖)으로 생겨난 것 같았다.](장 아메리, <죄와 속죄의 저편>, 필로소픽, 2022, 13-14쪽)
전쟁이 끝난 뒤 '용서와 화해'를 말하는 사람들을 아메리는 못 마땅하게 여겼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1938년 팔레스타인으로 옮겨가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 자리를 잡았던, <나와 너>로 잘 알려진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 프랑스 유대인 출신의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처럼 독일을 너그럽게 감싸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은 나치 수용소가 어떤 곳인지를 모른다고 했다. 부버나 마르셀은 아우슈비츠 같은 지옥을 겪어보지 않았기에, 그곳 수감자들이 겪은 고통의 깊이를 제대로 헤아릴 수가 없다는 얘기였다(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전후 독일과 이웃 나라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선 따로 곧 살펴볼 참이다).
장 아메리는 1978년 그의 작품 낭독회 때문에 머물던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죽음은 흔히 말하는 '자살(Selbstmord)'이 아니라, 아메리의 표현에 따르면, '자유죽음(Freitod)'이었다. 아메리와 같은 아우슈비츠 생존자였던 이탈리아 화학자 프리모 레비(1919-1987)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87년 이탈리아 토리노의 집에서였다.
<이것이 인간인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비롯해, 레비는 수용소에 갇힌 한계 상황을 둘러싼 깊이 있고 진지한 생각들을 담은 저작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작가다. 앞의 아메리처럼 레비도 '용서'를 쉽게 입에 올리려 하지 않았다.
[나는 범죄자들을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았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 누구도 용서할 생각이 없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리고 너무 늦지 않게 이탈리아와 외국(독일)의 파시즘이 범죄였고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그것들(파시즘)을 진심으로 비판하고, 그들과 다른 사람들의 의식으로부터 그것들을 뿌리째 뽑아내지 않는 한 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만이 나는 용서할 수 있다.]((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2007, 270쪽)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한계상황 속에 갇힌 인간의 문제, 삶과 죽음의 문제, 용서와 화해의 문제를 놓고 긴 시간을 생각했을 아메리와 레비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수용소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희미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초현실적인 범죄들이 날마다 벌어졌다. 수용소에서의 끔찍했던 체험이 아메리와 레비의 죽음을 앞당긴 단 하나의 이유는 아닐 테지만,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에게 줄곧 고통스런 기억(트라우마)로 남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탈출자 생기면 집단 처형으로 보복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을 던져보자. 아우슈비츠 같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도망치는 것이 가능했을까. 유대인 게토에 갇힌 이들이 탈출하는 것은 수용소에 견주어 그나마 틈이 있었다. 게토 밖으로 강제노역을 나갔다가 눈치 끝에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4만 명에서 8만 명쯤이 그렇게 게토를 벗어난 것으로 추정된다(연재107). 하지만 수용소는 달랐다. 전쟁 끝 무렵의 혼란을 틈타 도망친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일상적인 상황에선 수용소 탈출을 꿈꾸기 어려웠다.
수용소 주변은 이중으로 철조망이 둘러쳐졌고 고압의 전기가 흘렀다. 게다가 기관총과 자동 소총으로 무장한 경비병들이 망대 위에서 밤낮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1947년 교수형)가 독일 패전 뒤 폴란드 감옥에서 전범재판을 기다리며 남겼던 기록(Kommandant in Auschuwitz, 1963)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아우슈비츠에서 (탈출에) 성공한 예는 많지 않지만 탈출의 기회는 수없이 있었다. 물론 모든 것을 건 이상 탈출에 실패해서 죽음으로 끝날 것도 각오해야 했다. 탈출할 생각을 가로막아선 것은 보복과 (연고지에 남아있는) 가족·친지의 체포, 그리고 같은 고통을 나누어 가졌던 동료 수감자 10명 이상이 함께 '제거'된다는 것이었다.](루돌프 회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헤스의 고백록>, 범우사, 2006, 158쪽)
탈출자가 붙잡히면 곧바로 수감자 모두가 보는 앞에서 총살 또는 교수형으로 죽였다. 덩달아 동료 수감자들도 처형됐다. 그리고는 같은 수감자들이 연주하는 빠른 행진곡에 맞춰 이들 시신 주변을 다른 수감자들이 열을 지어 걷도록 시켰다. 탈출 의지를 꺾기 위한 음울한 공식 행사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동료 수감자들이 집단 징벌을 받고 본보기로 탈출자 1명 당 적어도 10명이 처형당하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탈출을 꿈꾸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탈출을 꾀하다가 경비병이 쏜 총에 맞아 죽은 일들은 가끔 일어났다. 총을 쏜 경비병에겐 포상휴가가 주어졌다. 수감자가 실제로 탈출을 꾀했는지는 의심스럽다. 가능성은 두 가지다. 첫째는 지옥 같은 삶을 스스로 끝내야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일부러 철조망 쪽으로 다가가 감시병의 총격을 유도해 죽었을 가능성이다. 둘째는 포상휴가를 가고 싶은 경비병이 탈출 낌새를 전혀 보이지 않는 수감자를 겨냥해 일부러 총을 쏘았을 가능성이다. 이런 경우도 수용소 문서엔 '탈출 기도자 제거'로 기록됐다.
기차역에서 삶과 죽음 가른 멩겔레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열차가 닿으면, 그곳 승강장에서 손에 흰 장갑을 낀 친위대 군의관들이 삶과 죽음을 갈랐다. 노인, 어린이, 임산부를 포함해 열차에서 내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 부적합' 판정을 받고 왼쪽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왼쪽은 곧 가스실에서의 죽음을 뜻했다. 그렇게 손가락 하나로 삶과 죽음을 갈랐던 친위대 의사들 가운데 하나가 요제프 멩겔레였다. 그는 가학적인 쌍둥이 생체실험으로 '죽음의 천사'라는 악명을 얻었다(연재 52).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복무하는 친위대 소속 의사는 20명이었다. 멩겔레는 그 20명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의 유대인 작가 퍼트리샤 포즈너는 멩겔레에 관한 행적을 좇다가 멩겔레의 외아들로부터 "아우슈비츠에 주임 약사가 있었다. 아버지의 친구였다"는 말을 들었다. 그 약사의 이름은 빅토르 카페시우스. 전범기업인 IG 파르벤의 자회사였던 제약회사 바이엘의 영업사원 출신이었다.
바이엘은 친위대 약사장교가 된 카페시우스와 손을 잡고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실험약들을 먹였다. 멩겔레와는 다른 종류의 생체실험이었고, 사망자들이 생겼다. 실험이 끝나면, '실험 완료. 피실험자 전원 사망. 신규 주문 곧 발주 예정'이란 보고서가 만들어졌다. 친위대는 '인간 기니피그'들을 내주고 바이엘로부터 돈을 챙겼다. 이와 관련, 뒤늦게 서독 법정에 기소된 카페시우스는 1965년 9년형을 선고 받고 2년 반 뒤 사면으로 풀려났다. 작가 포즈너가 카페시우스에 관한 행적을 추적한 책(The Pharmacist of Auschwitz, 2017)에서 어떻게 나치 의사들이 아우슈비츠에서 기차에 실려온 사람들의 생사를 가르게 됐는지를 보자.
[1943년 초까지는 아우슈비츠 소장 루돌프 회스의 지시에 따라 친위대 대원들이 승강장에 서서 기차에서 내리는 유대인들을 죽일지 살릴지 결정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 의사들의 우두머리) 에두아르트 비르츠 박사(대위)는 새로 도착하는 수감자들의 선별작업을 직접 통제하길 원했다. 그는 아우슈비츠가 나치의 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전례 없는 기회이므로, 의사들이 직접 실험대상을 선정할 수 있어야 하다고 주장했다. 1943년 봄 동부전선에서 훈장을 받은 32살의 요제프 멩겔레가 아우슈비츠로 합류하면서 비르츠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퍼트리샤 포즈너, <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 북트리거, 2020, 62-63쪽)
멩겔레는 1942년 러시아전선에서 부상을 입은 뒤 철십자훈장과 함께 대위로 승진하면서 아우슈비츠로 옮겨갔다. 쌍둥이 연구에 빠져 있던 멩겔레로선 생체실험 대상자가 넘쳐나는 아우슈비츠는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근무지였다. 멩겔레는 '꾀죄죄한 얼굴로 녹초가 된 채 무질서하게 밀려드는 수천 명의 수감자들 사이에서' 쌍둥이를 찾아내는 일을 따로 훈련을 받지 않은 친위대 대원에게 맡겨 둘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루돌프 회스 수용소장은 결국 나치 의사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1943년 봄부터 '왼쪽이냐 오른쪽이냐'를 가르는 선별작업에서 친위대원들은 손을 떼도록 했다.
[수많은 신입 수감자가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처음으로 마주한 나치 당원이 바로 멩겔레였다. 가끔은 휘파람으로 아리아를 불며 반짝이는 승마용 채찍으로 수감자 한 명 한 명에게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 방향을 지시하는 이 친위대 장교의 모습은 많은 생존자들의 머릿속에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다.](퍼트리샤 포즈너, 65쪽)
아우슈비츠 의사 20명이 모두 그 선별 작업을 반긴 것은 아니었다. 명령에 따라 하는 일이니까 하며 마지못해 나선 의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심리적 괴로움을 털어내려고 저녁마다 술을 퍼마셨다. 한 젊은 의사는 선별작업을 거부했다가 강등 당하고 제2수용소(비르케나우)에서 혈액 샘플을 처리하는 한직으로 밀려났다. 결국에는 약 5000명의 쌍둥이가 수감자들 사이에 '멩겔레의 동물원'이라 불리던 캠프 F의 14번 막사를 거쳐갔다.

수시로 옷 벗겨 모욕감 안겨
가스실 행을 가리키는 왼쪽이 아닌, 오른 쪽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은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죽음보다 더한 고역'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갖고 온 가방들을 다 빼앗기곤 발가벗어야 했다. 머리카락은 물론 몸의 털이란 털은 다 깎였다. 그 뒤로도 수감자들은 일상적으로 발가벗어야 하는 모욕을 겪었다. 이 검사, 의복 수색 등으로 수용소의 하루는 강압적으로 옷을 벗어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수용소 노동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독가스실로 보내야 할지)를 가리는 '위원회'의 선별 심사를 받을 때도 발가벗어야 했다. 이탈리아 화학자로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 전범기업 IG 파르벤 공장의 합성고무 '부나'를 만들었던 프리모 레비의 글을 보자.
[맨발에 벌거벗은 인간은 온몸의 신경과 힘줄이 잘려나가는 기분을 느낀다. 그는 속수무책인 먹잇감이다. 비록 배급받은 게 더러운 옷이라 해도, 밑창이 나무로 된 형편없는 신발이라 해도, 의복이란 보잘 것 없지만 최소한의 방어다. 의복이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차라리 스스로를 땅바닥에 기어 다니는 지렁이처럼 벌거벗고 느리고 비천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이 언제라도 짓이겨질 수 있다고 느낀다.](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돌베개, 2014, 137쪽)
수용소를 지키는 나치 친위대원들이 수감자의 옷을 벗도록 명령하는 것은 누가 지배자이고 누가 피지배자인가를 확인시키는 순간이기도 했다. 옷을 벗는 행위는 곧 복종이다. 이를 뒤집어 보면, 친위대원은 수감자들에게 '언제라도 나를 짓이겨도 이상하지 않다'는 패배감과 모욕감을 안겨 주려는 의도가 담겼다.
오줌 누기도 쉽지 않았다
수감자들에게 무력감과 박탈감을 안겨주는 교묘한 수단 가운데 하나가 숟가락이었다. 나치는 수용소 신입자들에게 숟가락을 나눠주지 않았다. 개처럼 혀로 핥지 않고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 수용소 안에서 숟가락 하나의 교환 가치는 빵 반개나 죽 1리터쯤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수용소 물정을 모르는 신입 수감자가 숟가락을 마련하려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요구를 받곤 했다.
그렇다면 수용소 안에서 숟가락이 정말로 귀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수감자들에게 굴욕감을 안기려고 일부러 주지 않았다. 1945년 1월 소련군이 아우슈비츠를 접수했을 때 그곳 생존자들은 창고 안에서 수만 개나 되는 숟가락들을 발견했다. 막 이송돼 온 사람들의 가방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그 속에는 값 나가는 은수저들도 있었고,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플라스틱 숟가락들도 수천 개나 있었다.
수감자들이 겪은 또 다른 고통은 화장실을 자주 갈 수 없다는 데 있었다. 방광이 약하거나 긴장감 때문에 자주 소변을 봐야 하는 수감자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생리현상조차도 자유롭게 해결하기 어려웠다. 카포나 경비대원은 너그럽지 않았다. 참다못한 이들은 옷을 입은 채로 소변을 봐야 했고, 그 때마다 비웃음을 샀다.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자존감마저 잃기 마련이었다.
여성 수감자들은 수용소에서 나눠준 반합(에나멜 금속으로 만든 우묵한 그릇)을 세 가지 용도로 썼다. 날마다 죽을 배급받는 데에, 빨래터처럼 물이 나오는 곳에서 몸을 씻는 데에, 그리고 화장실 가기 어려운 밤에 소변보는 데 썼다. 굳이 말하자면, 다목적 반합이었다. 수용소 여성들은 그런 반합을 바라볼 때마다 속이 상했고 자살 충동마저 느꼈을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 금지된 문신 새겨
아우슈비츠에서 수감자들에게 모욕감을 안겨주는 장치는 여럿 있었다. 몸에 새기는 문신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입고 있는 옷 가슴팍에 수감자 번호를 달았던 여러 수용소들과는 달리, 아우슈비츠에선 수감자 번호를 문신으로 갈음했다. 아우슈비츠 역에서 노동자로 분류된 사람들은 먼저 머리를 깎고 소독과 목욕을 한 다음, 남자는 왼쪽 팔뚝의 바깥쪽에, 여자는 왼쪽 팔뚝 안쪽에 문신을 새겼다(예외적으로, 국적이 독일인 수감자들은 문신을 새기지 않았다).
[문신 작업은 그다지 아프지 않았고, 1분 이상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 문신의 상징적 의미는 모두에게 너무나 분명했다. 문신은 지워지지 않는 표식이다. 이곳에서 너희들은 결코 나갈 수 없다. 이것은 도살될 운명인 짐승들과 노예들에게 찍하는 낙인이다. 너희들은 바로 그런 것이 되었다. 너희들은 더 이상 이름이 없다. 이것이 바로 너희의 이름이다.](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돌베개, 2014, 144쪽)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용 노동자'로 분류돼 팔에 문신을 새긴 사람 숫자가 40만 명에 이른다. 1944년 5월 헝가리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로 대거 이송되면서 문신 번호의 앞머리는 A로 시작했고 얼마 뒤엔 B로 시작했다. 집시들은 앞머리에 Z을 새겼다. 아무개라는 개인의 이름은 사라지고 번호로만 남았다. 한 마디로 익명의 인간이 됐다. 그러다 평균적으로 3개월쯤 뒤 건강을 잃고 죽으면 한줌 재로 바뀌고 수감자 기록부에 X로 처리됐다. 죽은 이를 기리는 최소한의 추모의식 같은 것은 없었다.
아우슈비츠 관련 다큐를 보면 어린애들이 소매를 걷어 팔뚝에 새긴 문신을 보여주는 장면이 눈길을 끈다. 1944년 9월까지 아우슈비츠에는 어린이 수감자가 없었다. 나치는 부모와 함께 역에서 내린 어린이들을 모두 가스실로 보내버렸다. 다큐 속 문신 아이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거의 끝 무렵에 가족과 함께 수감돼 왔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은 이들이다. 나치는 갓난아기까지 문신을 새겼다. 아기가 평생 지니고 갈 트라우마를 새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대인은 노란색, 카포는 초록색 삼각형
수용소 가운데 가스실을 갖춘 6개의 이른바 '절멸수용소'(Vernichtungslager. 헤움노,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베우제츠, 마이다네크-루블린,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강제노동수용소의 기능도 했다. 유대인이 나치 학살의 주요 과녁이었기 때문에, 절멸수용소 수감자의 다수는 유대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말고도 전쟁포로,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 여호와의 증인, 가톨릭교도, 장애인, 성소수자, 집시(신티족, 로마족)을 비롯한 여러 집단이 갇혀 있었다.
수용소 경비를 맡은 친위대 병사들은 수감자들을 쉽게 구분하려고 각기 다른 색깔을 지닌 삼각형을 겉옷에 붙이도록 했다. △유대인은 노란색 삼각형 △정치범(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조합원 등)은 빨간색 삼각형 △일반 범죄자는 녹색 삼각형 △집시(로마, 신티)를 비롯하여 이른바 '반사회주의자' 또는 '무능력자'는 검정색 삼각형 △여호와의 증인은 보라색 삼각형 △성소수자는 연자주색(핑크색) 삼각형을 달았다.
삼각형 안의 알파벳 문자는 국적을 나타냈다. 이를테면, P는 폴란드인, SU는 소련인, F는 프랑스인을 뜻했다. 정치범 수감자, 여호와의 증인, 그리고 동성애자 등은 유대인, 집시, 소련군 포로처럼 조직적인 학살의 대상은 아니었다. 특히 종교적 양심을 중요시하는 평화주의집단이었던 여호와의 증인들은 사무실이나 식당처럼 상대적으로 노동 강도가 덜한 곳에 배치됐다.
나치는 수감자들 가운데 카포(kapo)라는 이름의 작업반장을 뽑아 통솔하게 했다. 일반 수감자들이 굶어도 카포들은 절대로 굶는 일이 없었다. 이들은 흔히 '초록'이라 불렸는데, 그들의 삼각형이 초록색이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 출신의 아우슈비츠 생존자 빅터 프랭클(1905-1997)이 일찍이 써내 화제를 모았던 책(Man's Search for Meaning, 1946년 초판)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감시하는 병사들보다도, 나치대원들보다도 카포들이 수감자들에게 더 가혹하고 악질적인 경우가 많았다. 수감자 중에서 이런 일을 하기에 적합한 성격을 가졌다고 인정되면 카포로 뽑혔고, 기대했던 대로 일을 잘 해내지 못하면 즉시 쫓겨났다. 일단 카포가 되면 그들은 금세 나치대원이나 감시병들을 닮아갔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을 판단할 때에는 나치대원이나 감시병들과 같은 정신의학적 기준을 가지고 판단해야 할 것으로 본다.](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2005, 26-27쪽)
독일인 수감자들이 카포 자리를 많이 차지했다. 정치범(사회주의자, 반체제 저항운동가)도 물론 있었지만, 대개는 강도·성폭력 등 강력범죄자 출신들이었다. 친위대원들의 입장에 보면, 일단 말이 통하기에 수감자 관리가 더 편했다. 카포들은 수용소에 갇혀 있다는 사실에 분풀이를 하듯 수감자들을 괴롭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회스도 그들의 잔인함에 질린 듯 이런 증언을 남겼다.
[인간이 그런 야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놀랍다. 프랑스 유대인을 갈기갈기 찢고, 도끼로 죽이고, 목 졸라 죽이는 등 '초록'의 학대 방식을 보면 소름이 끼친다.](앤터니 비버, <제2차 세계대전>, 글항아리, 2017, 785쪽에서 재인용)

하루에 1만 명 학살 소각
아우슈비츠와 함께 '절멸 수용소'라 일컬어졌던 다른 5개 수용소(헤움노,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베우제츠, 마이다네크-루블린)의 가스실들은 1943년 말 무렵엔 문을 닫았다. 아우슈비츠는 1944년 후반부까지도 수감자를 받아들여 가스실 학살을 이어갔다. 1945년 1월 소련군이 아우슈비츠에 닿았을 때 그곳엔 7000명의 병약자들이 남아 있었다.
(헤움노는 1942년 문을 닫았다가 1944년에 잠깐 가스실을 재가동했고 15만 명쯤이 학살됐다. 43만 명이 죽은 것으로 알려진 베우제츠는 1942년 말에 문 닫았다. 최대 25만 명쯤이 학살당한 소비보르는 1943년 10월 수감자들의 봉기 뒤 폐쇄됐다. 트레블링카는 시신 처리 부담 때문에 중간 중간 멈추기도 했으나 꾸준히 가스실을 운용하다가 1943년 가을에 문 닫을 때까지 90만 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진다. 희생자 숫자에선 수용소 가운데 아우슈비츠 다음으로 많다. 1944년 들어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은 아우슈비츠 혼자 맡았다.)
아우슈비츠가 홀로코스트의 상징적 존재로 기억되는 것은 학살 규모에서 가장 컸고, 가장 늦게까지 가스실을 운용했다는 점에서다. 100만 명 가까운 유대인을 포함해 110~150만 명이 아우슈비츠에서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대규모 학살이 이뤄졌던 제2수용소(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소각로 실태는 너무 참혹해서 차마 글로 옮겨 놓기가 망설여질 정도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소각장 4개의 작업능력은 이론적으로 하루 4400명이었다. 그러나 고장이 잦아서 실제 처리능력은 거의 언제나 그보다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4년 5월과 6월에 헝가리 유대인만 하루에 1만 명꼴로 학살했고, 그해 8월 하순에 우치의 유대인들이 도착하자 그때에도 하루에 1만 명씩 처리했다. 아우슈비츠의 (엄청난 에너지를 지닌 사디스트로 알려진) 시신 처리 담당자는 길이 35m, 너비 7m, 깊이 2m의 구덩이를 8~9개 파놓았다. 그는 구덩이 바닥에 인간 지방이 쌓이면 양동이로 퍼 올려서 소각장 화덕에 부었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2>, 개마고원, 2008, 1335쪽)
시신처리는 수감자들 가운데 체력이 좋은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가 맡았다(우리말로 직역하면 '특공대'가 되겠지만, 문맥상으론 '특수작업반'이 맞다). 1944년 8월의 경우 874명이 간단하게 '낮'과 '밤'이라 부른 2개조 작업조에서 교대로 일했다. 작업반원들은 말이 시신처리지 알고 보면 소름 끼치는 일을 했다. 시신의 입에서 금니를 뽑고 몸의 여러 구멍(항문, 귀, 코 등)에 숨겨 두었을지도 모를 보석이나 귀중품을 뒤졌다. 이런 끔찍한 과정을 거쳐 확보한 모든 물품은 염산 등으로 씻어냈다.
존더코만도들은 사실상 대량학살이라는 나치 전쟁범죄의 목격자였다. 나치는 '더러운 비밀'이 새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3개월 쯤 지난 뒤엔 그들을 죽이고 새 인력을 투입했다. 아우슈비츠의 경우 12차례(일설에는 14차례)나 교체됐다고 알려진다. 베를린으로 보내진 '피 묻은 금'은 스위스 은행과의 '더러운 거래'로 세탁돼 나치의 전쟁자금으로 쓰였다. 차마 글로 써내려 가기 힘들고 독자 분들도 읽기가 불편한 '야만과 광기의 시대'를 다음 주에 좀 더 들여다보자.(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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