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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학살보다 빠른 나치 학살, "100일 동안 147만 명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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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학살보다 빠른 나치 학살, "100일 동안 147만 명 죽였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07]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35

지난 주 바르샤바 게토 봉기를 다룬 글(연재 105, 106)을 본 독자 한 분이 이메일로 질문을 하나 보내주셨다. 짧게 줄이자면, '게토 유대인 가운데 도망쳐 살아남은 사람들은 없을까. 있다면 그 숫자는 얼마나 될까'라는 물음이었다. 홀로코스트 연구자들도 탈주 생존자가 어느 정도였는지 제대로 알긴 어렵다고들 말한다.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의 최근작(Blood and Ruins, 2021)에서 관련 내용을 보자.

[독일이 점령한 유럽에서 검거를 피하거나 게토와 수용소 생활을 모면한 유대인이 얼마나 되는지 추정한 수치들은 4만 명에서 8만 명으로 격차가 아주 크다. 그런 유대인의 압도적 다수는 지리적 조건이 가장 유리한 동유럽에 집중돼 있었다. 1942년 약 300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한 폴란드 총독부에서는, 비록 검증할 수 없는 수치이긴 하지만, 최대 5만 명의 유대인이 루블린과 라돔 주변의 숲으로 달아난 것으로 추정된다](리처드 오버리, <피와 폐허>, 책과 함께, 2024, 1144쪽).

게토에서 도망친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나치 독일은 '도망은 곧 사형'이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그것은 빈 말이 아니었다. 붙잡히면 곧바로 처형됐다. 도망자가 안전한 곳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뿌리 깊은 반유대 정서를 지닌 동유럽 농민들은 유대인 도망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밀고를 해 보상금을 챙기려들곤 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도망자들은 사람 발길이 드문 숲지대, 또는 늪지대에 몸을 감췄다. 시골 출신이라면 모를까, 도시에서 살았던 유대인에게 숲이나 늪에서의 거친 자연 생활은 힘겹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게토 탈주자들, 추적자에 쫓기다

무엇보다 식량을 구하기 어려웠다. 원주민들의 식량을 훔치거나 물물교환으로 어렵사리 먹거리를 마련했다. 유대교 율법에 따라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사치'는 접어둬야 했다. 또한 추적자들의 눈길을 피하느라 늘 긴장 속에 지냈다. 추적자는 많았다. 독일군과 경찰은 물론, 폴란드의 친독 부역집단인 '감색경찰'(Granatowa), 그리고 소련인들 가운데 전향자(부역자)로 꾸린 '동방부대'가 유대인 도망자를 붙잡으러 다녔다.

감색경찰과 동방부대원들은 독일인들조차 고개를 돌릴 만큼 잔인하게 유대인을 다뤘다. 추적자는 이들 말고도 또 있었다. 반유대 정서가 강했던 우크라이나인들도 유대인에게 위협적이었다. 오버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두 독재자(히틀러와 스탈린)을 비교 분석한 책(The Dicatators, 2004)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점령지 우크라이나에서 독일은 우크라이나 민족도 '유대-볼셰비즘'의 희생자라며 반유대주의 선전을 펼쳤다. 수많은 우크라이나인이 민병(民兵)으로서 유대인을 검거하고 처형하며 나치 독일을 위해 일했다. 유대인을 당국에 넘기면 보상을 받았다. 소련(우크라이나)의 유대인이 숲으로 피신하여 (항독) 유격대에 합류했을 때도 비유대인들로부터 때때로 죽음의 영접을 받았다](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 2008, 818쪽).

반유대정서가 강했던 폴란드․우크라이나․소련의 항독 파르티잔((partisan, 빨치산, 유격대)들도 유대인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역사학자 오버리는 유대인 도망자 4명 가운데 1명은 비유대인 파르티잔의 손에 죽은 것으로 추정한다. 붙잡힌 여성 유대인들은 심지어 성폭행을 당한 뒤 죽었다.

그 살벌했던 시절의 유럽 땅에서 자신이 유대인임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을 부르기 십상이었다. 게토에서 도망쳐 어렵사리 파르티잔에 들어갔던 한 유대인은 가톨릭 신자로 꾸며 간신히 살아남았다. 예전에 감옥에 있을 때 가톨릭 기도문과 의례를 몸에 익혀둔 덕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어려웠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그 유대인은 잘라 말했다. "나는 유대인일 수가 없었다.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들이 나를 죽였을 것이다”(리처드 오버리, <피와 폐허>, 1146쪽).

나치 박해를 피해 게토에서 달아난 유대인들의 생존 확률은 극히 낮았다. 역사학자 오버리는 10명 가운데 한두 명을 뺀 나머지 대부분은 반유대적 폭력 또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숨졌을 걸로 추정한다. 유대인들에겐 그야말로 고난의 시절이었다(그런 어려움을 겪은 유대인들이 21세기에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아랍 난민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다).

▲ 나치 수용소 분포도. 이 가운데 아우슈비츠를 비롯, 가스실을 갖춘 폴란드의 6개 수용소는 ‘죽음의 수용소’로 불렸다. ⓒU.S. Holocaust Memorial Museum

친독파 유대인 평의회장도 아우슈비츠로

나치 독일이 동유럽 독일 점령지(폴란드, 우크라이나 등) 일대에 만든 1000개의 게토 가운데 가장 먼저 생기고 가장 늦게 문을 닫은 곳이 우치 게토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 5개월 뒤인 1940년 2월 폴란드 지도 한복판에 자리 잡은 우치 빈민가에 게토를 세웠다. 철조망과 나무 울타리로 에워싼 넓이 4km²의 좁은 구역에 20만 명 넘는 유대인들이 강제 수용됐다. 바르샤바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게토였다.

우치 게토 주민들도 수용소로의 이송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1942년 1월부터 9월 사이에 적어도 7만 5,000명이 헤움노 절멸수용소로 옮겨져 죽었다. 우치에서 50km쯤 떨어진 헤움노에선 1941년 12월부터 이동식 가스 자동차가 학살수단으로 쓰였다. 나치 친위대원들은 유대인들에게 '독일에서 노동자로 일하러간다'고 속여 한 번에 50~70명씩 밀폐된 트럭에 들어가도록 했다. 그런 다음 트럭 안으로 연결된 파이프로 일산화탄소 가스를 불어넣어 질식사시켰다(이보다 한 단계 진화한 살해방식이 샤워실처럼 꾸민 건물 안에서 이뤄지는 치클론 B 독가스 살포다).

1944년 6월 하인리히 힘러 친위대 총사령관은 "게토를 깨끗이 청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드디어 우치 게토 '종말의 날'이 다가왔다. 8월4일, '게토가 공장과 함께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다'는 포스터가 나붙었다. "집단 이송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처형된다”는 경고와 함께였다. 다른 곳으로 게토와 공장을 옮긴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6만 8400명의 우치 유대인들을 태운 열차들이 멈춘 곳은 독일 땅도, 공장도 아니었다. '죽음의 땅'인 아우슈비츠였다.

우치 게토를 떠나는 맨 마지막 열차로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유대인 가운데는 유대인평의회 의장 하임 룸코프스키와 그의 가족도 들어있었다. 전쟁이 터지기 전에 고아원 원장을 지냈던 룸코프스키는 친독(親獨) 부역자였다. 식량 배급표를 미끼로 게토 주민들에게 군수물자를 만드는 장시간의 노예 노동을 강요했다. 자신의 얼굴 초상을 박아 넣은 우표와 화폐를 찍어내고, 주민들이 '총독'이라 불러주길 바랐다. 주민들의 눈에 비친 그는 변절자이자 나치 전쟁범죄의 공범자였다. '게토 총독'처럼 으스댔던 그가 정작 막판에 아우슈비츠로 떠나는 화물열차에 강제로 태워졌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밤과 안개처럼 사라진 사람들

1939년 9월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전시체제로 들어가자, 나치 정권은 이른바 '패배주의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전쟁 사흘 째 되던 날(9월3일) 나치 친위대 총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와 그의 오른팔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독일은 결국 전쟁에서 이기지 못할 것”이란 투로 불만을 나타내는 독일인들을 찾아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붙잡힌 자들은 수용소로 보내졌다.

독일 점령 아래 놓인 유럽 시민들도 입에 재갈을 물렸다. 폴란드 침공 3개월 뒤인 1941년 12월7일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독일군 최고사령관 빌헬름 카이텔(패전 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교수형)이 서명해 내놓은 법령도 그러했다. '밤과 안개'(Nacht und Nebel) 로 알려진 그 법령은 유럽 전역의 독일군 점령지에 적용됐다. 붙잡힌 사람들이 어디론가 '밤과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고 붙은 이름이다(1956년 프랑스의 알랭 레네 감독이 만든 다큐 '밤과 안개'는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고전적 명작으로 꼽힌다. 레네는 원폭이 떨어진 히로시마를 배경으로 한 프랑스 여인과 일본 남성과의 사랑을 담은 1959년도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의 감독이기도 하다).

수용소는 히틀러가 권력을 강화하는 도구였다. 눈엣가시라 여겨진 사람들은 나치 비밀경찰(게슈타포)에게 영장도 없이 붙잡혀 수용소로 사라졌다. 전쟁이 터지기 전 수감자는 세 부류였다. 첫째는 정치범이었다. 이들은 공산주의자, 사회민주당원, 여호와의 증인, 나치에 비판적인 성직자와 언론인, 그리고 부패 또는 권력남용 등으로 숙청된 나치당원과 돌격대원 등이었다. 둘째는 강도나 동성애 등 이른바 '반사회적인 범죄자', 셋째는 유대인들이었다. 1939년 전쟁이 터진 뒤부터는 수감자가 달라졌다. 유대인, 폴란드인, 소련군 전쟁포로, 프랑스 레지스탕스 요원 등이 수용소에 갇혔다. 물론 유대인 수감자가 절대 다수였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2>, 개마고원, 2008, 1223쪽 참조).

가스실 갖춘 6개 '죽음의 수용소'

1942년 1월20일 베를린 서쪽 포츠담으로 가는 중간지점에 있는 반제 호숫가의 나치 친위대 별장에서 중요한 회의가 열렸다(연재 91 참조).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Endlösung der Judenfrage)을 논의한 악명 높은 이른바 '반제 회의' 뒤 학살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었다. 나치는 '학살'이란 용어보다는 덜 직설적인 '최종해결'이란 용어를 즐겨 썼다. 실제로 나치 히틀러 집단의 지도자들은 유대인 정책을 둘러싼 공적 논의를 (나중에라도 조사가 있을 경우 빠져나갈 꼼수에서였을까)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한 언어로 흐리곤 했다.

여기서 눈여겨 볼 중요한 사실은 반제 회의를 기점으로 폴란드에 '죽음의 수용소'들이 세워졌다는 점이다. 독일의 지배 아래 놓인 유럽 전역의 유대인들은 그 무렵 세워진 6개 수용소(헤움노,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베우제츠, 마이다네크-루블린, 아우슈비츠-베르키나우)의 가스실로 보내졌다. 독일의 홀로코스트 연구자들을 이 6개 수용소를 가리켜 Vernichtungslager라 일컫는다. 우리말로는 '집단학살 수용소' 또는 '절멸 수용소'다.

1942년 들어 건설을 서둘렀던 베우제츠, 소비보르, 트레블링카, 이 세 개의 절멸수용소가 겨우 몇 달 안에 잇달아 모습을 드러냈다. 건설속도를 높이기 위해 검은 옷을 입은 소련군 전쟁포로들과 인근 지역의 게토 유대인 노동자들을 강제 동원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유대인 집단학살기계'를 만들어준 셈이었다. 학살수용소의 구조는 모두 비슷했다. 홀로코스트와 관련한 선구적 연구자 라울 힐베르크(버몬트대, 1926-2007)의 글을 보자.

[경비병력이 거주하는 막사 한 동, 기차에서 내린 유대인들이 점호를 받는 마당, 탈의실, '수도관'이라고 칭해지던 S자 모양의 보도, 가스실의 구조는 거의 똑같았다. 벌거벗은 유대인들은 보도를 지나 가스실로 들어갔다. 샤워실로 위장된 가스실은 중간 규모의 거실 크기였다. 가스실은 처음엔 3개를 넘지 않았다. 베우제츠에서 사용된 가스는 병에 들어 있었고, 내용물은 이산화탄소였으며, 부분적으로는 시안화수소였을 수도 있다. 소비부르에서는 일산화탄소와 이산화탄소 혼합가스를 가스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시체 소각실은 설치되지 않았다. 시체는 구덩이에서 태웠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2>, 개마고원, 2008, 1234-1235쪽).

▲ 1942년 기차를 타고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로 떠나는 폴란드 동부지역의 게토 유대인들. ⓒ위키미디어

산업적 규모의 대량학살

또 하나 짚고 넘어갈 사실은 이들 절멸수용소가 갈수록 산업적 규모의 대량학살을 위해 세워졌다는 점이다. 가스실과 화장터(매장 또는 소각 시설) 등을 갖추고 하루에 수만 명을 죽였다. 그곳에 실려간 유대인들 가운데 대부분은 열차에서 내리는 즉시 몇 시간 안에 숨을 거두었다. 이들 수용소는 소나무 가지로 위장한 나무 망루와 철조망 울타리가 있었지만, 아우슈비츠와 마이다네크(루블린)와는 달리 전기 울타리가 없었다. 이송자들을 곧바로 '처리'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우슈비츠와 마이다네크(루블린)는 처음엔 강제노동수용소로 운용되다가 나중에 가스실과 화장터가 들어섰다는 점에서 앞의 수용소들과는 차이가 있다. 특히 아우슈비츠는 대규모 학살시설을 갖춘 죽음의 수용소로 악명이 높지만, 또 다른 주요 기능은 강제 노동이었다. 1백만 명 가까운 유대인이 목숨을 잃은 아우슈비츠가 '홀로코스트의 상징'이 된 것은 1942년부터 1943년에 걸쳐 제2수용소인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에 모두 6개의 대형 가스실들이 잇달아 들어선 뒤부터였다(아우슈비츠에 대해선 다음 주에 따로 살펴본다).

이들 6개 수용소의 공통점은 △오스트반(Ostbahn)이라 부르는 동유럽 간선 철도의 지선으로 연결돼 화물열차로 많은 사람들을 빠르게 실어 나를 수 있고 △인구 밀집 지역인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들이라 일반인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고, △대체로 숲이 우거진 지역이나 허허벌판에 자리 잡았다. 1942년부터 1944년 여름까지 2년 동안에 걸쳐 1000개의 게토에 흩어져 수용돼 있던 유대인들과 독일 점령 아래 놓였던 유럽 각지(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발칸반도 등)의 유대인들을 이들 수용소로 끌려갔다. 라울 힐베르크의 글을 보자.

[(나치가 벌인) 파괴과정의 가장 비밀스런 작전은 6개의 학살수용소에서 펼쳐졌다. 그 수용소들은 폴란드, 특히 독일에 병합된 지역과 부크강 사이에 위치했다. 3년 동안 수천 대의 기차가 300만 명에 가까운 유대인을 싣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기차는 돌아갔지만 승객들은 사라졌다. 학살수용소는 빠르고 효율적으로 작동했다. 아침에 희생자가 기차에서 내리면, 당일 밤에 그의 시체가 소각되고 옷가지는 포장되어 독일로 발송되었다. 그것은 치밀한 기획의 산물이었다](라울 힐베르크, 1221쪽).

1942년의 라인하르트 작전

홀로코스트 연구자들은 나치가 집중적으로 유대인을 학살한 시기를 1942년으로 잡고 있다. 절멸수용소들이 그야말로 풀가동하던 해가 1942년이었다. 라울 힐베르크가 작성한 <홀로코스트 사망자의 연도별 분류> 자료를 보면 △1933-1940년 사이엔 10만 명 이하 △ 1941년 110만 명 △1942년 260만명 △1943년 60만 명 △1944년 60만 명 △1945년 10만 명 이상으로, 1942년이 가장 많았다(합계 510만 명, 라울 힐베르크, 1722쪽).

나치가 기획한 유대인 학살작전의 비밀 암호명 가운데 하나가 '라인하르트 작전'(Aktion Reinhard)이다. 이 작전은 1942년 3월에 시작되어 1943년 11월까지 21개월 동안 이어졌다. 작전명은 친위대 총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의 최측근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제국보안본부장 겸 체코 총독)의 이름에서 따왔다. 라인하르트 작전의 요점은 △폴란드 유대인을 말살한다는 원칙 아래 △폴란드에 처형시설을 갖춘 6개의 절멸수용소들을 세우고 △게토의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강제 이송해 독가스나 총살로 죽인다는 섬뜩한 내용이었다.

('프라하의 도살자'란 악명을 지닌 하이드리히는 오만함과 부주의로 제 목숨을 줄였다. 1942년 5월 27일 아침 체코 프라하의 집무실로 가려고 경호차도 없이 벤츠 오픈카를 타고 가다가 영국에서 훈련받은 체코 특공대원들의 습격을 받았다. 중상을 입은 그는 8일 뒤 프라하 병원에서 죽었다. 나치는 보복 겸 경고로 한 체코 마을 하나를 불태워버리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나치는 라인하르트 작전을 철저한 보안 속에 펼쳐나갔기에 '집단학살 현황' 같은 도표나 기록은 없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패전 무렵엔 전쟁범죄로 처벌받지 않으려고 관련 문서들을 일부러 파기 소각해버렸다. 한편으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홀로코스트의 중심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비쳐졌기에 라인하르트 작전 기간 동안 절멸수용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00일 동안 147만 명이 죽었다”

이스라엘 연구자 레비 스톤(텔아비브대, 생물수학)은 통계와 숫자에 밝은 수학자로, 나치의 철도 운송 기록을 바탕으로 라인하르트 작전 기간 동안의 희생자 규모를 추산했다. 특히 그는 1942년 7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100일 동안 나치가 벌인 유대인 절멸작전에서 희생된 유대인을 147만 명으로 본다. 현대전쟁사에서 벌어졌던 어떤 다른 대량 학살에 견주어도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유달리 빠르게 폭력적인 성격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스톤의 글을 보자.

[라인하르트 작전(1942~1943)은 홀로코스트 중 가장 큰 규모의 단일 학살 캠페인이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베우제츠, 소비보르,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사망했다. 철도 운송 기록에서 비롯된 데이터 세트를 사용해 살펴보니, 제2차 세계대전 6년 동안 사망한 유대인의 25%가 넘는 147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100일(약 3개월) 동안 나치에 의해 집중적으로 살해됐다. 라인하르트 작전은 수용소에서 살해된 사람의 비율(99.9% 이상)과 희생자 숫자를 고려할 때 극단적으로 폭력적이었다.](Lewi Stone, 'Quantifying the Holocaust: Hyperintense Kill Rates during the Nazi genocide', Science Advances, 2019년 1월).

1994년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후투-투치족 사이의 내전이 터졌을 때 그해 4월부터 7월까지 약 100일 동안 80만 명이 학살당했다. 20세기 말에 일어난 끔찍한 인종청소였다. 스톤은 르완다 학살을 보기로 들면서, 나치의 학살 속도가 르완다 학살보다도 빠르게 나치 독일의 점령지에서 벌어졌다고 지적했다. 스톤의 글을 더 보자.

[라인하르트 작전은 1942년 죽음의 수용소 베우제츠, 소비보르와 트레블링카의 건설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다른 기록들은 이 작전이 1941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기간까지 합치면 약 170만 명의 유대인이 살해당했다. 특히 1942년 8월과 9월 두 달 동안 매달 약 50만 명의 피해자가 생겼으며, 이들은 수용소에 도착한 지 몇 시간 만에 독가스로 죽거나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기동학살대)의 총살로 죽었다. 이 3개월(92일) 동안의 데이터에 따르면 희생자 가운데 29만 명이 총살로 죽은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라인하르트 작전은 홀로코스트 안에서 가장 큰 살인 캠페인일 뿐만 아니라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일어났다](Lewi Stone, 위 논문).

결론적으로, 스톤은 유대인 절멸작전 중 100일 동안 죽은 '147만'이란 숫자는 '우리 인간의 정신이 공감하기에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크고 이해하기 어려운 단일 숫자'라 했다. 그럼에도 나치는 수용소의 '처리 용량'이 작아 애를 태웠다. 1942년 6월에 세운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선 미처 태우지 못해 썩어가는 시체 더미들이 쌓여있는 가운데 새로운 유대인들이 밀려 들어왔다. 이에 따라 1942년 9월까지 기존의 수용소 안에서 가스실이 두 배 가량 증축되었다. 수용소의 크기에서나 학살 규모로 볼 때, 트레블링카는 아우슈비츠 다음으로 컸다. 1942년 7월부터 1943년 8월까지 90만 명의 목숨을 트레블링카가 앗아갔다고 추정된다.

나치 친위대가 지옥문을 장식하는 데 신경을 쓴 듯한, 어쩌면 조롱하려는 의도가 담긴 듯한 모습은 흥미롭다. 트레블링카 가스실 건물 전면에 다윗의 별을 걸어놓았고, 입구에는 시너고그(유대교회당)에서 떼어온 커다란 커튼을 둘렀다. 그 커튼에 원래 적혀있던, '이것은 정의로운 자가 지나는 문이다'라는 구절이 곧 숨을 거두게 될 희생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22살 난 청년 리하르트 글라차르는 트레블링카에서 1942년 10월부터 1년 가까이 희생자들이 남긴 소지품을 정리하는 일을 하다가 기적적으로 도망쳐 살아남았다. 볼프강 벤츠(베를린기술종합대, 독일현대사)는 훗날 전범재판의 증인으로 나온 그의 말을 이렇게 옮겼다.

[작지만 엄청난 용량을 지닌 덫이 바로 트레블링카였다. 1942년 가을 폭 400m, 길이 600m의 공간에서 날마다 1만 5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이발소'에서 머리를 삭발 당한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앙상한 뼈만 드러낸 남자들이 차례차례 호스 관처럼 생긴 좁다란 통로를 지나 가스실로 끌려갔다. 가시철조망을 두른 그 통로는 사나운 동물들을 서커스 원형경기장 안으로 몰고 갈 때 쓰는 출입문을 떠올리게 했다](볼프강 벤츠, <홀로코스트>, 지식의 풍경, 2002, 154-155쪽).

유대인 처리 시설이 부족해지자, 1941년에 세워져 전쟁포로들을 가둬두던 루블린 지역의 마이다네크 강제노동수용소에도 1942년 9월과 10월 U자형 건물 안에 가스실 3개가 들어섰다. 그 무렵 나치는 루블린 일대의 유대인들을 모두 '해결'해버린다는 결정을 내렸고, 대규모 학살작전을 펼쳤다. 지난 글에서 살펴본, 독일군 기동학살부대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이 마이다네크로 끌려온 유대인들을 사살했던 것을 비롯해 동유럽 유대인 130만을 포함한 200만의 목숨을 총격으로 앗아간 전쟁범죄와 맞닿는다(연재 93, 94 참조).

▲ 1942년 베우제츠 절멸수용소에 막 도착한 유대인들.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었다. ⓒ위키미디어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신조어 낳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라울 힐베르크는 나치 절멸수용소를 가리켜 '조립라인 방식으로 인간을 죽인, 전례가 없는 학살기관'이라 했다. 그 어느 전쟁사에서도 절멸수용소를 닮은 형태의 원형(原型)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얘기다. 힐베르크는 그 근거로, 절멸수용소가 전쟁포로나 수감자에게 노예노동을 강요했던 일반적인 수용소와 체계적인 학살 시설이 합해져서 태어난 혼합물이라는 점을 꼽았다(라울 힐베르크, 1221쪽).

굳이 힐베르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치의 대량학살은 현대문명의 기술적 도움으로 가능했다. 치명적인 독가스, 길게 뻗은 파이프라인, 여러 구의 시신을 빠르게 태워 없애는 소각로 등은 19세기만 해도 없던 것들이다. 잘 짜인 조립 라인으로 이뤄진 홀로코스트는 산업적 규모의 학살이었다. 수용소를 운용하는 인력(나치 친위대 소속 지휘관과 감시병, 수감자들 가운데 뽑은 보조인력 등)은 '죽음의 수용소'의 작동이 멈추거나 삐꺽거리지 않고 잘 돌아가도록 만드는 '학살 전문가 집단'이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731부대의 만행과 난징(南京) 학살을 비롯해 아시아에서 저질렀던 끔찍한 전쟁범죄와 더불어 인류문명사의 부끄러운 기록이다. 우리 인간이 문자를 발명하고 부족국가든 민족국가든 하나의 정치조직을 이룬 이래로 끊임없이 벌여온 5000년 전쟁사에서 그처럼 수백만 명의 인간들이 조직적으로 학살당한 경우는 없었다. 일본의 전쟁범죄와 제주 4.3사건을 비롯한 민간인 학살들을 기억하는 우리 한국인들에게도 홀로코스트는 남의 일이 아닐 듯하다.

폴란드 유대인 출신의 법률가 라파엘 렘킨(미 듀크대, 1900-1959)은 집단학살을 뜻하는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었다(Genocide란 민족․종족을 뜻하는 그리스어 genos와 살인행위를 뜻하는 라틴어 접미사 caedo의 합성어다). 램킨이 애를 쓴 덕분에 1948년 12월 유엔총회에서는 제노사이드협약(genocide convention,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이 만장일치로 채택됐다(1951년 발효).

이런 국제사회의 관심은 적어도 5000만에서 700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이 저질렀던 전쟁범죄에 대한 경계심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21세기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의 이스라엘 전쟁범죄에서 보듯이, "제노사이드협약은 문서로만 남았다”는 지적을 받곤 한다. 예나 지금이나 강자의 주먹은 법보다 앞서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다음 주엔 1백만 명 가까운 유대인이 목숨을 잃은 아우슈비츠의 지옥도를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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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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