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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을 건 언행일치를 배우다

[고등학생운동사 한 장면] ① 정화여상 사학 비리 척결 민주화 투쟁

30년이 지나도 또렷한 그날

1987년 11월 4일 아침 자율학습이 있어 일찍 학교에 갔다. 건물 출입구 벽면에 대자보가 주욱 붙어 있었다. 그동안 소문으로 무성했던 학교 비리가 조목조목 적혀 있었다. 학생들은 여기저기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수군댔다.

교실로 들어간 후 조회 시간이 되자 방송 스피커로 대자보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학교 측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대자보를 붙인 교사가 그에 반박하려고 말을 시작하자마자 마이크는 꺼졌다. 마이크가 꺼지자 학생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다. 우리 반 교실에서도 마이크가 일방적으로 꺼지는 것을 듣고 순간 당황하다, 옆 반 친구들이 뛰쳐나가는 발소리에 다들 벌떡 일어나 "우리도 나가자" 소리치며 운동장으로 뛰어갔다.

분노해서 뛰쳐나갔는데, 뭐라도 해야 하는데 같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학생들이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전교생이 다 나온 것으로 보였다. 그때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삼각산 높이 솟고 역사 깊은 옛터전에 찬란하게 빛나라고 이룩하신 우리 학교…." 울부짖는 항의의 '떼창'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큰 함성으로 교가를 부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정화여상 사학 민주화 투쟁의 시작이었다.

정화여상 투쟁은 열세 명 선생님(이하 '서명교사') 명의로 학내 비리를 대자보로 폭로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학생들에게 가해졌던 성희롱, 언어폭력, 폭행, 부실수업 등 불만이 있었지만 말하지 못하고 쌓여 왔던 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하며 이어진 투쟁이다. 이 투쟁 과정에서 학생들이 학교의 주인으로 섰다. 자주적 학생회 건설 등 학생들이 마지막까지 투쟁을 책임져 나간 싸움이기도 하다. 학내비리로 시작된 투쟁을 학생들 스스로 '정화 학내 민주화 투쟁'이라고 명명했다.

학생들을 분노케 만든 학교 비리는 이미 소문으로 무성했다

1987년 6월항쟁 때 학생들 사이에서는 '우리 학교 선생님이 전철 문을 강제로 열어 전경을 피해 도망가는 학생을 구했다더라' '선생님이 그렇게 정의로운지 몰랐다'는 등 교사들에 대한 자긍심에 찬 무용담이 오갔다. 6월항쟁에 이어 7월, 8월, 9월 노동자들의 투쟁이 연일 보도되는 것을 보면서 나라가 뒤집히는 건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무섭다기보다 뭔지 모를 설렘이 가득했다.

한편 그 무렵 학교는 88올림픽 사전행사(D-365)에 학생들을 동원하더니, 나중에는 방송사 쇼 프로그램인 <젊음의 행진, 쇼 비디오자키> 등에 방청객으로 학생들을 동원했다. 자꾸 수업을 빠지고 행사에 동원되는 데 불만이 있던 학생들이 이를 거부하자, 학교는 거부한 학생들에게 벌칙으로 대청소를 시켰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학생들을 강제 동원해서 받은 출연료를 학교가 챙겼다' '학생들에게 걷은 수재의연금과 수학여행비 일부를 학교가 떼먹었다' '동창회비에서 장학금으로 사용하라고 준 기금도 떼먹었다' 같은 소문도 돌았다. 학생들의 불만은 계속 커졌다. 우리는 다른 학교에서도 수업 대신 학생들을 행사에 동원하고 있었고, 폭력적 언행을 일삼는 교사, 학교 비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1988년 국정감사에서 학교의 비리 내용은 사실로 확인됐다. 학교에 이렇게 비리가 난무하게 된 원인은 설립자의 가족들로 구성된 족벌체제에 있었다. 재단 이사장의 형제, 자매, 고종사촌, 동서지간 등 가족들이 교장, 교감, 교사, 서무과장, 경리 담당 등에 포진해 있었다. 이들이 서로 비리를 저질러도 눈감아주거나 협력자가 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87 정화학내 민주화투쟁 자료집. ⓒ도서출판 동녘

우리는 왜 그렇게 분노했을까

그 당시엔 집안 사정이 어려운 친구들이 상업고등학교(지금은 '특성화고등학교' '마이스터고등학교'로 불린다) 진학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야 대학에 진학하고, 대학을 나와야 일종의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절이다. 나도 대학에 가고 싶었으나 형편이 되지 않아서 상업고등학교에 갔다. 하지만 어떻게든 대학에 가고 싶었고 부기 1급을 취득하면 특례입학이 가능하다는 말에 열심히 학원도 다녔다.

그런데 학교라는 곳이 가난한 학생들의 수학여행비를 착복하고, 졸업생들이 모은 장학금을 떼먹고, 수업에 충실하기보다 학생들을 쇼 프로그램 방청석을 메워주는 데 동원하고, 올림픽 사전행사에 동원하고 돈을 받았다. 너무나 화가 났다.

일상적으로 성희롱을 하는 교사, 수업 준비를 전혀 해오지 않거나 소위 '문제아'라는 이유로 학생에게 폭행을 가해 전치 4주가 넘는 진단을 받게 한 교사도 있었다. 학내에는 심각한 문제가 너무나 많았다.

정화여상 사학 민주화 투쟁의 시작은 학교 비리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우리들 마음속에 쌓였던 그간의 울분이 하나로 묶여 일종의 전면적인 반발, 총체적인 문제 제기가 시작된 것이다.

모든 학생이 정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싸웠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는 몇몇 장면이 있다.

첫 번째 장면은 중간고사 백지동맹의 순간이다. 재단 비리 투쟁이 벌어진 상황에서 학교에선 2학기 중간고사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학생들이 시험 연기를 요구했지만, 학교는 시험을 강행했다. 시험을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학교 측에서 투쟁을 위축시키기 위해 시험 강행을 한다고 학생들은 판단했고, 전교생이 2학기 중간고사 백지동맹을 결의했다.

나는 문제를 풀지 않으니 지루하고 피곤해서 엎드려 잤지만, 유흥희(현재 비정규직이제그만공동투쟁 집행위원장. 정화여상을 함께 다닌 동창이자, 후에 기륭전자에서도 함께 싸우게 된다)가 속한 2학년 1반에선 시험 끝나는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반 학생 전체가 항의성으로 볼펜을 똑딱거려 선생님이 제발 그만하라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답안지를 작성한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결국 학교는 시험을 연기했고, 우리는 우리들의 단결된 힘의 뿌리를 확인했다.

또 다른 장면은 언론사에 항의하던 순간이다. 투쟁 중에 한 언론에서 '학생들이 돈 받으려고 싸우고 있다'며 왜곡 보도를 냈다. 학생들이 즉각 왜곡 보도를 정정하라는 항의 전화를 했고, 결국 해당 언론사는 정정 보도를 약속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언론사 업무가 거의 마비 수준이 되었다고 한다.

교정을 벗어나 거리로 나서다

학교 비리를 폭로한 서명교사들과 학생들은 재단의 사과와 재발 방지를 요구했지만, 학교 측에선 비리 내용이 거짓이라는 말만 되뇌었다. 참다못한 교사, 학부모, 학생이 교장과 면담하기 위해 교장실로 가서 비리에 대한 사과와 해결 방안 등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했지만, 학교는 답변은커녕 공권력을 투입했다.

그날 이후 비서명교사는 학교 옆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로 출근했고, 학생들은 대거 철야농성에 돌입해 1987년 겨울부터 다음 해인 1988년 개학 때까지 농성이 이어졌다. 농성 초기엔 참여 학생이 많아 공간이 부족해 잘 때도 눕지 못하고 앉아서 자야 할 정도였다. 졸업생도 분개해 600여 명이 학교에 모여 그동안 겪었던 부당한 일을 얘기하며 분노를 터트렸다. 학생, 교사, 졸업생, 학부모가 각각 정화학원수습대책위(이하 '대책위')를 구성해 활동했는데, 학생 대책위는 학생회가 중심이 되었다.

대책위는 비리 재단과 교장 퇴진을 요구하며 싸우는 동시에, 서울시교육위원회(이하 시교위)에 현재 재단 이사로는 해결되지 않으니 관선이사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우리는 청량리에 있던 학교에서 서대문 시교위까지 전교생이 행진했다. 행진 후 시교위에 들어가 항의하려는데 전경들이 사과탄을 쏘며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여기저기 흩어진 학생들을 연행하듯 잡아 '닭장차(전경차)'에 태웠다. 나는 너무 놀라 친구들과 근처에 있던 오락실로 뛰어 들어갔는데, 오락실 안까지 전경들이 들어와서 학생들을 끌고 나갔다. 닭장차에 태워진 학생들은 시교위를 벗어나 곳곳에 버려졌다. 이때 학생들이 걱정되어 먼발치에서 따라온 교사 세 분과 학부모 한 분이 연행됐다.

학생 대책위, 농성 중인 학생들은 학내 활동뿐 아니라 외부에도 학교 상황을 알리는 활동을 했다. 첫 직선제 대통령선거가 있던 때라 후보들의 대규모 유세가 곳곳에서 벌어졌는데, 유세장을 찾아 선전물을 나누고 모금함을 돌리고 거리집회를 했다.

학교에 공권력이 투입되고 학생들이 학교에서 농성을 시작한 후 비서명교사들이 학교로 출근하지 않아 학교 수업과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학생들은 자율적으로 학교를 운영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노조에서 파업 프로그램 운영하듯 자주적으로 출석체크, 아침조회, 자율학습, 신문기사 읽기, 방송 수업, 노래 배우기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간선제 학생회를 넘어 아래로부터 자주적으로 대책위를 구성하다

탄압은 계속됐다. 서명교사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겠다는 겁박하는 등 학교와 정부의 탄압으로 투쟁 상황은 어려워졌다. 농성 기간이 길어지면서 학생들의 동력도 점점 떨어졌다. 결국 12월 25일 지속적으로 탄압받던 서명교사들이 농성을 풀었다. 그러자 학교를 떠났던 비서명교사들이 출근했다.

이 때문에 교무실에서 농성하던 학생들은 밀려나서 지하에 있는 특별활동 교실에서 농성을 이어갔다. 학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건물에 붙어 있던 대자보를 떼고, 깨끗이 페인트칠을 했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학생 200여 명이 다시 모여 대자보를 붙이고, 벽에 우리의 요구를 다시 쓰고 운동장에서 항의농성을 벌였지만 12월 31일 학생회는 싸움을 계속하기 어렵다며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농성을 푼다고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그동안 학교를 함께 지키며 싸워온 학생들과 토론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학생 중심으로 새롭게 정화여상정상화수습대책위원회(이하 '정대위')를 구성해 싸워나갔다. 늦은 밤 농성장에는 술 취한 선생님들이 쫓아와 우리를 겁박하고, 창문을 깼다. 무서웠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그즈음 서명교사 한 분이 컵라면을 한 아름 들고 와 미안하다며 전하고 가기도 했다. 학교는 서명교사와 학생회가 농성을 풀자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처럼 말하며 계속 농성하고 싸우면 수업일수 부족으로 유급될 것이라고 가정통신문을 발송했다. 정대위는 아직 문제해결이 되지 않았고 법 조항을 따져 유급은 협박이라고 반박하는 가정통신문을 발송했다. 새 교장 취임식을 거부하고, 전국교사협의회에서 진행한 교권탄압대회 집회에 300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했다.

하지만 농성 대오가 늘어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학교에 나오지 않는 친구들에게 연락해 학교에 나와 함께 문제를 풀어가자고 호소했지만, 선생님과 학생회가 모두 포기한 상태에서 조직은 쉽지 않았다. 겨울방학 끝자락 즈음 우리의 점거 농성은 마무리됐다.

치열하게 교사, 학생, 학부모, 졸업생이 같이 싸웠지만, 관선이사는 끝내 파견되지 않았고 교장만 3개월 동안 두 번 바뀌었다.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고 구속된 교사와 학부모 석방, 직선제 학생회 및 취업 공정성 등을 요구하며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갔다. 투쟁의 주축이던 3학년이 졸업한 1989년 3월에 또다시 새 교장이 취임해 총 세 차례 교장이 바뀌었다. 비리재단을 바꿔내진 못했지만, 투쟁을 통해 직선제 학생회를 만들어 냈다.

우리는 졸업 이후에도 정대위 친구들과 꾸준히 소모임을 하며 새로운 활동을 모색해 보자는 고민을 나눴다. 당시만 해도 세상을 바꿔보자고 활동하는 이들이 '현장투신'이라는 이름으로 제조업 조직 활동을 하던 때다. 논의하던 중 몇몇 친구들이 구로공단에 취업했다. 나 역시 고민이 많아졌다. 노동조합 활동을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공장에서 일을 잘할 수 있을까 겁도 살짝 나긴 했지만, 용기를 내서 1992년 구로공단에 갔다. 갑일전자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시작했고, 기륭전자 입사 3년 만에 파견직, 계약직, 정규직이 함께하는 노조를 만들고 회사의 불법에 맞서 55일간 현장점거파업농성, 고공농성 등 조합원들의 치열한 투쟁과 90일이 넘는 단식, 시민사회 연대 힘으로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으로 복직하는 합의를 만들어 냈다. 온 힘을 다해 싸웠던 정화여상 투쟁은 내 삶을 바꾼 계기가 됐고 이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됐다.

12.3 계엄 선포로 인한 광장에서 어떤 주체들은 계속 '재발견'됐다. 대표적으로 2030여성 '재발견' 그리고 10대들도 마찬가지다. 유사 이래 10대의 정치적 투쟁은 늘 존재했다. 11.3학생의날 유래가 된 일제강점기 학생 항일운동, 4.19혁명의 시작과 주역은 고등학생이었다. 5.18과 6월 항쟁, 박근혜 탄핵 과정에서도 늘 광장에 있었다. 그럼에도 10대의 정치적 투쟁은 매번 낯설게 여겨지고 재발견된다. 왜일까? 10대를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하기보다는 연령주의와 입시지옥에 가두고, 학교를 통해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으로 훈육하고 싶어 하기 때문은 아닐까. 역사에서 잊혀진 고등학생운동을 주목하는 것은, '재발견'을 멈추고 광장 이후 만들어 갈 새로운 민주주의 사회 논의에 유의미할 것이다. <프레시안>은 이러한 취지에서 ‘고등학생운동사 한 장면’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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