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3일 기자회견에서 '흑묘백묘론'을 기치로 내걸고 "이념과 진영이 밥 먹여 주지 않는다"며 성장과 친기업 정책으로의 전환을 선언한 이재명 대표의 변신이 놀랍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던 기본소득 정책의 전면 재검토를 시사하더니 31일 기본사회위원회 위원장직 사퇴 의사를 밝혔다. 시급한 추경예산 편성을 위해서라면 '전국민 25만 원' 입법 포기 의사도 밝혔다. 이미 작년에 금융투자소득세 폐지와 가상화폐 과세 유예를 선언한 터다.
3일엔 반도체 산업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허용 특별법 토론회를, 5일엔 삼성·LG·SK 등 대기업 관계자들을 불러모은 토론회를 직접 주재했다. 민주당은 발 빠르게 상속세·소득세법 개정 등 감세 정책 추진 계획과 '성장 우선'을 전면에 내세운 경제전략까지 발표했다. 외연 확장을 위한 민주당의 공세가 숨 쉴 틈 없다. 당연히 당내 논란을 촉발했다. 이인영 의원은 "민주당의 노동 정책이 윤석열 정책과 같아서야 되겠느냐"며 비판했다.
개인적으로 민주당의 변화에 동의한다. 성장 없이 복지가 가능하겠는가. 나폴레옹1세, 로베스피에르가 숨 쉬던 19세기의 산물인 이념은 진작 폐기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급격한 정책 전환은 당내 동의는 물론 지지자들과 특히 이 대표가 목표로 하는 중도의 호응이 있어야 성공한다. 반발과 역풍이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급격한 피보팅, 성공 가능성은?
원래 스포츠 용어인 피봇은 농구에서처럼 한 발을 축으로 방향 전환하는 것을 이르는데 최근 비즈니스 (특히 스타트업) 분야의 일상적 용어가 됐다. 시장 상황에 따라 사업 전략이나 모델을 전환하는 것이다. 정치에서 '담대한 피봇'으로 성공한 사례가 바로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경우다. 민주당이 집어 들어야 했던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빼앗아 선점해 선거를 주도했다. 구시대 이미지였던 친일 독재자의 딸 박근혜를 서민 복지와 재벌개혁을 실행할 인물로 탈바꿈시켜 공수부대 출신 인권변호사였던 문재인에 승리를 거둔 것이다.
지금 이 대표가 추진하는 성장 우선, 친기업 기조는 정확하게 이때 상황의 '역 버전'이다. 당연히 논란이 따른다. 우선 당내 논의 과정이 없었고 이를 이 대표가 직접 앞장서 밀어붙인다는 점이 눈을 끈다. 박근혜는 대선 1년 전 김종인을 비대위원으로 영입해 경제민주화 정책을 설계하게 했다. 이로 인한 당내 논란이 있었지만 국민 눈엔 신선하게 느껴졌다. 2012년엔 김종인을 '국민행복추진위원장'에 앉혀 복지정책까지 함께 추진하게 했다. 1년여에 걸친 기간이 있었고 교수 출신 경제전문가인 김종인이 대리인 역할을 하면서 완충지대 역할을 했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의 급격한(?) 방향 전환은 이 대표가 직접 진두지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람이 그 사람 맞나?' 싶을 정도다. 정치인들은 지지층에 호소하기 위해, 또 중원을 공략하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구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한다. 몇 가지 고민해야 할 지점이 있다.
지도자의 덕목, 일관성
문재인은 원래 점잖은 스타일의 안정감 때문에 인기를 얻었다. 2016년 6월 반기문이 혜성과 같이 등장해 지지율 1위에 오른 상태에서 곧 박근혜 탄핵 정국으로 들어갔다. 문재인은 급해졌다. 지금처럼 조기 대선 시즌이었다. 그는 거국내각, 중립총리, 국회지명총리, 명예로운 퇴진 보장, 하야, 탄핵 등을 국면이 바뀔 때마다 수시로 제안했다. 이 와중에 '적폐청산,' '쓰레기,' '대청소,' '혁명'이라는 과격한 발언까지 하게 된다. 평소 문재인의 언어가 아니다.
지지율에 문제가 생겼다. 해가 바뀌면서 반기문은 사라졌지만 '30% 박스권'에서 도무지 움직이질 않았다. 당시 안보에 대한 의심을 받았는데 이를 혁파하면서 중도 공략이 가능한 회심의 일격을 준비했다. TV토론회에서 특전사 시절 사진과 함께 전두환 당시 여단장에게서 표창장을 받은 사실을 자랑하듯 공개한 것이다. 다음날부터 지치도록 해명해야 했다. 본전도 못 건진 것이다.
그래도 문재인은 결국 대통령이 됐다. 중원 공략을 위한 차별화를 시도했다가 처절한 실패로 이어진 슬픈 이야기도 있다. 세련된 총리직 수행과 21대 총선 압승으로 부동의 차기 주자로 부상한 이낙연 대표. 그는 2021년 언론 인터뷰에서 대통령께 박근혜 사면을 건의하겠다고 말했다가 처참한 지지율 추락을 감내해야 했다. 강성 이미지의 이재명 경기지사와 차별화하려는 '중도 공략'에 나섰다가 정치생명을 스스로 재촉했다. 이재명이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다.
정치인에게 중요한 것은 일관성이다. 곧 안정감이다. 기업의 CEO라면 파격과 리스크를 무릅쓴 결정도 할 수 있지만 국가를 책임진 정치인은 안정감을 유지해야 한다. 국민은 자신의 꿈꾸는 바를 일관되게 추진할 정치인에게 표를 준다. 이 대표는 강성 이미지가 있지만 그게 일관되기 때문에 안정감으로 연결된다. 이제까지 서민과 민생, 복지와 분배, 그리고 기본소득이라는 일관성을 유지했기에 지금의 지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 그의 지지율은 크게 출렁인 적이 없다.
승리의 덕목, 정체성
2002년 4월 노무현 후보는 대선을 앞두고 오래 전 결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가 "의미 있는 날이면 이 시계를 찼다"면서 13년 전 받은 시계를 손목에 차고 보여줬다. 그러나 '지역주의 부활,' '정계개편 노림수' 등 역풍으로 끝없는 지지율 추락의 길에 들어선다. 원희룡 역시 2007년 새해 전직 대통령들에게 세배를 갔다가 전두환에게 세배한 것이 문제가 돼 공식 사과해야 했다.
멀리 갈 것 없다. 지난 총선에서 정체성이 애매한 정당들은 모조리 사라졌다. 오랜 세월 한국정치의 한 축이었던 녹색정의당은 0석의 성적표를 받고 원외로 퇴출됐다. 노동과 여성 사이에서 갈등을 겪다 정체성을 잃고 스스로 몰락했다. 관록의 정치인들이 모인 새로운미래는 민주당을 대체하겠다는 막연한 정체성으로 민심을 얻지 못했다. 사실 정체성이 없었다. 돌풍이 예상됐던 개혁신당은 민주당 기성 정치인들과 합당하려다 애매한 정체성과 어지러운 전략으로 우왕좌왕하다가 체면치레에 그쳤다. 지금 이 순간도 어지럽다.
이들이 모두 실패하는 사이 홀로 돌풍을 일으킨 당이 바로 조국혁신당이다. 혁신당 돌풍의 핵심은 명확한 정체성이다. '3년은 너무 길다'라는 슬로건으로 벼락 같이 등장한 혁신당의 목표는 오직 하나다. 바로 윤석열 탄핵. 이를 위해 스스로의 행동반경을 오히려 좁히고 가두다시피 했다. 그래서 이겼다.
중도 확장? 민주당 지지자는?
전례를 찾기 힘든 민주당 정책 기조의 대전환이다. 이 대표는 여기에 승부를 건 듯하다. 물론 성공할 수 있지만 리스크도 있다. 최근 민주당을 향한 '일방적'이라는 비판을 다시 보게 된다. 그럼에도 이를 밀어붙일 수 있는 이유는 이 때문에 지지자들이 이 대표를 떠나 다른 경쟁자에게로 옮겨 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중도 유권자들은 어떨까. 사실 중도 확장 전략이 중도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 대표 또는 민주당 후보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첫째, 국민의힘 지지자들이 결집하고, 둘째, 중도가 호응하지 않고, 셋째, 민주당 지지자들이 투표장에 나가지 않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동시에 맞아떨어지면 다음 대선은 오리무중이다. 국민의힘 지지자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민주당의 이러한 변화에 중도와 민주당 지지자들은 함께 지지할까. 그렇다면 대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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