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오전 10시 40분경,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 칩거하던 윤석열 대통령이 체포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관저 인근에서 열린 체포 촉구 집회 참가자들은 환호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참가자들은 '좋지 아니한가', '다시 만난 세계' 등의 음악을 틀고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며 한남동을 떠나는 경찰 버스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비상계엄 선포로 전 국민을 충격에 빠트린 윤 대통령이 체포되기까지 43일, 분노한 시민들은 매일같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윤 대통령의 탄핵을 외쳐왔다. 집회가 이어지는 동안 청년 여성들의 대규모 참여를 상징하는 아이돌 응원봉, 집회 참여자들을 격려하는 선결제 릴레이, 혹한의 날씨에 밤샘 농성을 위해 은박 담요를 두른 키세스 시위대 등 새로운 광장 문화가 탄생하기도 했다.
탄핵광장은 시민들에게 연대의 의미를 알린 학습의 장이기도 했다. 시민들은 탄핵 촉구를 위해 서울로 진입하는 농민들을 경찰이 가로막았다는 소식을 듣고 대치가 벌어진 남태령역으로 모여들었다. 1만여 명(주최 측 추산)의 시민들이 28시간 동안 시위한 끝에 경찰은 차벽을 열었고, 농민들은 감사 인사를 하며 서울로 진입했다. '남태령 대첩'에서의 승리로 연대의 효능감을 느낀 시민들은 안국역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시위, 민주노총 하청노동자·해고노동자 시위 등 다양한 투쟁 현장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탄핵광장과 마찬가지로 연대 투쟁의 주축은 청년 여성이었다. <프레시안>이 만난 20대 여성 5인은 비상계엄령을 통해 이유 없이 죽고 끌려가는 일상을 맞이했을 수 있다는 위협감을 느낀 여성들이 경찰에게 제지당하는 농민들을 보고 동질감을 느꼈고, 다른 소수자들과의 연대가 모두의 생존에 실리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현장에 뛰어들었다고 설명했다.
반면 이들은 탄핵광장에서도, 연대 투쟁에서도 청년 남성들이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이유로 "총에 맞는 시민보다 총을 쏘는 계엄군 및 기득권에 이입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실제로 청년 남성들은 탄핵 집회보다 윤 대통령 체포 반대 집회에서 더 눈에 띄었다. 극우 반여성주의 단체 '신남성연대'가 운영하는 '댓글부대'에는 청년 남성 수만 명이 참여해 윤 대통령을 옹호하고 있다.
이들은 계엄 이후 탄핵광장에서 탄생한 민주주의적 성취가 한국사회에 공고히 자리 잡기를 바랐다. 또한 학내에서 민주주의 운동을 벌이고 있는 동덕여대 학생들에게도 비난을 삼가 달라고 당부했다.
다음은 지난달 28일 서울 마포구 모처에서 만난 20대 여성 5인과의 좌담회 내용 전문이다. 윤석열 탄핵 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은 스스로를 함함(26, 불교 신자), 아몰(22, 수도권 대학 재학생), 덕수(24, 아르바이트 노동자), 라이츄(21, 본관점거에 참여한 동덕여대생), 리본(23, 한신대 민중가요노래패)으로 소개했다. 첫 편에선 이들이 광장에 나온 까닭을 소개했다. (☞관련기사 : "부끄러워서", "후회하기 싫어서" 청년 여성들은 광장으로 달려나갔다)
"비상계엄으로 여성들도 이유 없이 죽고 끌려가는 일상 맞이했을 수 있다는 당사자성 생겼다"
프레시안 : 대규모로 벌어진 여의도 탄핵집회 외에도 남태령 집회 등 여러 영역에서 여성들의 연대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여성들은 어떻게 탄핵국면에서 연대의 범위를 넓히게 됐을까.
리본 : 남태령에서 농민들이 경찰과 대치하던 현장에 직접 갔었다. 엄마한테는 사람이 없으면 농민들이 끌려가 죽어 나갈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장에 도착하니 경찰들이 방패와 곤봉을 들고 서 있었다. 걱정이 많았지만 시민들의 연대에 기뻐하는 농민들을 보고 나까지 기쁘더라. 여성들은 계엄령을 통해 우리도 이유 없이 죽고 끌려가는 일상을 맞이했을 수 있었다는 당사자성을 갖게 됐다. 이 와중에 당장 끌려가고 있는 농민들을 보니 동질감을 느껴 현장에 가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고 본다.
아몰 : 여성들은 탄핵집회에서 다른 소수자들과 연대함으로써 시위를 성평등하고 차별 없는 곳으로 바꾸는 경험을 했다. 연대가 결코 실리만을 위해 하는 건 아니지만, 모두를 더 잘 생존할 수 있게 만들고 발언에 힘을 실어주는 길이라는 느낌을 받아 더 활발히 연대하는 것이다. 특히 시위하는 농민들은 항상 경찰에 끌려갔었는데 사람들이 모인 남태령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이런 변화에 여성들이 연대의 효능감을 느꼈다고 본다.
덕수 : 남태령에서 여의도나 광화문에서는 느끼지 못한 위안을 받았다. 지금까지의 집회에서는 여성들이 줄곧 자신의 약자성을 이야기하며 집회의 주체가 됐다면, 남태령에서는 여성들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비장애인이라는 강력한 정상성을 인지한 채 연대자의 위치에서 농민들을 지켜줬다. 약자성을 줄세우던 모습에서 남태령에서는 횡으로 된 연대를 처음 봤다.
함함 : 내가 어디선가는 힘없는 소수자겠지만 어디선가는 권력을 가진 주체일 수 있음을 잊고 살곤 한다. 남태령에서는 우리가 수도권 거주 청년으로 굉장한 강자성을 띤 존재임을 다시 한 번 일깨울 수 있었다.
아몰 : 나도 남태령 집회의 가장 큰 키워드 중 하나가 교차성이었다고 생각한다. 중학생 시절 퀴어퍼레이드에서 사회적 권력을 얼마나 가졌는지 묻는 사회자 지시에 따라 앞뒤로 움직였는데, 마지막에 가장 앞에 서 있던 건 나였다. 남태령에서는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며 대학을 다니고, 수도권에 살고 있는 여성으로서 농민들을 지킬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성에 매몰되기보다 교차성을 인정하고 연대의 중요성을 느꼈다.
"청년 남성들, 총 맞는 시민 아닌 총 쏘는 계엄군에 이입해"
프레시안 : 청년 여성들의 집회 참여와 연대가 주목받는 만큼 청년 남성들의 저조한 참여를 우려하는 시선도 많다. 주위 남성 동료들은 어떤가. 집회 참여와 관련해 대화를 나눠본 적 있나.
리본 : 집회를 나가는 동안 군대를 다녀온 중학교 동기와 연락하고 지냈다. 집회에 오는지 묻자 "시험 준비 때문에 못 간다"고 하더라. 나도 과제 있고 시험 있다고 답하니 "굳이 내가 가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답을 받았다. 이 친구 외에도 에브리타임 등 커뮤니티를 보면 총을 쏘는 계엄군에 감정을 이입한다. 이건 기득권적 생각, 타노스가 인류의 절반을 죽이면 살아남는 쪽이라는 생각이다. 아무래도 피해자가 더 연대에 관심을 갖는 만큼 약자성으로 피해를 입어본 여성들이 더 광장으로 나온다고 생각한다.
함함 : 최근 애인과 시위 경험을 나눈 적 있다. 대학 안에서도 시위한 적 없고 박근혜 탄핵집회에도 나가지 않았다고 하더라. 왜 하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먹고 사느라 바빴다고 한다. 시위를 나가는 사람들에게 '먹고 산다'는 정치적 활동으로 삶의 환경을 개선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의미다. 거기까지 생각이 뻗어나가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남성들의 비율이 큰 것 같다.
덕수 : 중년 남성들과 달리 청년 남성들이 광장에 나오지 않는 이유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나라에 탈정치화 기조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광장에서 하는 자유발언을 보면 발언자들이 어느 정당 소속도 아닌 일반 시민임을 어필한다. 다만 이런 변화는 청년 남성뿐아니라 여성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라이츄 : 남성들은 항상 누군가를 혐오하고 비난하는 방식으로 연대감을 쌓아왔지, 누군가 피해를 입었을 때 도와주자며 모이는 일은 많지 않다. 연대의 경험이 없다 보니 "굳이 우리가 가야 해?"라며 광장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신남성연대가 우리 학교에 한 달간 집회 신고를 넣었을 때에도 겨우 이틀 동안 몇 명 오다 말았다.
한편으로는 광장에 나오지 않는 문제가 꼭 남성에게만 해당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여성 지인들 중에서도 "시험 기간이라 그런 거 신경 못써"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시험 공부도 우리나라를 지키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지 않나. 당장 앞에 놓인 시험과 아르바이트가 중요할 뿐 민주주의는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몰 : 내가 다니는 대학도 평등하게 시위에 안 나가는 분위기다. 동성 룸메이트와 3년째 함께 살고 있는데 이 친구는 한 번도 시위에 나가본 적 없다. 내가 꼬박꼬박 집회에 나가거나 생방송을 보며 정치 이야기를 해도 흘려듣고 만다. 성별보다는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계급에 따라 참여 여부가 많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동덕여대 이야기도 물어보고 싶다. 똑같이 민주주의를 외치며 광장에 나왔는데 탄핵광장에 나온 여성들은 각광받고 동덕여대 공학전환에 반대하는 여성들은 질타를 받았다. 그 이유가 뭐라고 보나.
아몰 : 언론과 대중이 동덕여대 학생들에게 얼마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의견 표명을 하려고 하면 외부에서 검열과 사이버불링을 가했다. 친구가 혜화역에서 벌어진 동덕여대 학생들의 시위를 보고 다른 집회랑 분위기가 너무 다르다고 하더라. 학생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고 공격을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했다. 계속해서 학생들을 촬영하거나 남자 고등학생들이 동덕여대생들을 조롱하는 모습을 보며 '학생들이 정말 대중에게 머리채 많이 잡혀 왔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리본 : 동덕여대 사건의 경우 대다수는 당사자가 아니고 여성혐오로 인해 학생들에게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줄었다. 또한 여성들을 괴롭히는 남성 문화에 동덕여대 학생들이 타게팅이 돼서 거센 공격을 받았다. 여대에 들어간 사람들은 여성만 존재하는 비교적 안전한 커뮤니티를 생각하고 입학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공학전환을 하는 건 학생들의 권리를 빼앗는 비민주적 절차다. 우리 학교도 종교문화학과를 폐지한다는 이야기가 교수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돌다 기정사실화된 적이 있다. 총학생회 차원에서 이사회에 찾아가 비민주적 절차로 학교를 모욕하지 말라고 따졌다. 단순히 학과를 폐지한다고 해서 분노한 게 아니었다. 비민주적 절차로 학생들의 권리를 탄압했기 때문이었다.
함함 : 한 인스타그램 게시물이 동덕여대 학생들을 비난하는 댓글로 가득하길래 반박 댓글을 단 적이 있다. 그러자 계정 관리자가 댓글을 지우고 나를 차단하더라. 임시 계정을 만들어 왜 댓글을 지웠냐고 따지니 또 지웠다. 선택적으로 여론을 조성하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았다. 혐오 발언을 하는 사람들의 스피커를 크게 틀어주는 미디어, 조롱을 묵인하는 사람들이 문제다.
라이츄 : 첫째로 언론이 너무 잘못했다. 검증되지 않은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물들을 가져와 기사를 내고, 온갖 유튜버들이 우리 학교를 혐오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남학생들이 래커칠하고 자기 권리를 보장하라고 외쳤으면 우리한테 한 만큼 공격했을까 의문이다. 그나마 탄핵 집회가 우리에게 도움이 됐다. 여성들이 광장에 많이 나오면서 '동덕여대도 이래서 시위를 했구나'라는 기조가 생겼다. 적어도 앞으로는 아무 생각 없는 비난이 줄어들 거라고 기대한다.
프레시안 : 탄핵광장을 기점으로 한국 사회에 달라지기를 바라는 점이 있나.
리본 : 이제는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사람을 매도하지 않았으면 한다. 앞으로도 여러 의제가 광장에 나올 거고, 사람들의 투쟁도 계속될 거다. 그들을 도와주지는 못하더라도 조롱하지 않는 세상이면 좋겠다.
라이츄 : 동덕여대 학생들이 탄핵광장에 모인 시민들과 같이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주면 좋겠다. 학내 민주주의를 바라는 우리의 목소리가 단순 폭도 취급을 받지 않길 바란다.
아몰 : 탄핵광장에서 얻은 성취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단발적인 성취가 아니길 바란다. 일련의 과정들을 계기로 생각을 바꾸거나 새로운 감각을 느낀 사람들이 이 에너지를 끊임없이 가져가서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가 현실이 되면 좋겠다.
덕수 : 우리나라 거대 정당들이 정치적 유불리를 따져가며 보수 기독교계에 기대지 않길 바란다. 또한 꼭 차별금지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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