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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남산성: 폐주 윤석열의 졸렬한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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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소설 한남산성: 폐주 윤석열의 졸렬한 싸움

[새벽에 문득]

제19장 : 농성(籠城)

궁에서 쫓겨난 폐주(廢主)는 한남산성으로 황급히 몸을 피했다. 수도 한양의 방어 요충지인 한강진(漢江津)이 지척에 있는 요새였다.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망루마다 초병을 세웠다. 폐주가 거처하는 내전으로 향하는 길목 곳곳에 목책을 세우고 가시철조망을 둘렀다. 성 바깥 세상이 요동치고 법의 칼끝이 성벽을 두드렸으나, 그는 높은 담장 안에 몸을 깊게 숨긴 채 나타나지 않았다.

뜻있는 선비들이 일제히 붓을 들어 그를 꾸짖었다. "홀로 높은 담을 쌓고 버틴다 하여도 그 담이 끝내 그대를 보호하지는 못하리라. 성 안에서 버티며 때를 미룬다 한들 법이 닿지 않으리라 여기는가. 그대가 성 안에서 문을 꼭꼭 닫을수록 성 밖 백성들은 더욱 등을 돌릴 뿐이다. 부디 깊이 생각하라. 법의 바람이 성을 두드리니, 지금 문을 여는 것이 그나마 남은 그대의 체통을 지키는 길이요, 닫는 것은 나라의 존엄을 잃는 길이다."

폐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라의 숨소리는 거칠었으나, 폐주는 자신의 숨소리를 가늘게 하며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한때 나라를 호령하던 자의 위신이나 자존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몸뚱이는 밖으로 내놓고 머리만 굴속으로 처박은 모습으로 천하대세를 외면하고 구차한 삶을 훔치려 했다. '폐주 석열'은 이름 그대로 돌(石)처럼 아둔하고 졸렬(劣)했다.

폐주는 아침부터 술을 들이켰다. 원래 술을 탐닉하는 자였다. 두 해 남짓한 재위 기간은 술기운과 폭정의 그림자로 얼룩졌다. 술에 취하고 권력에 취한 세월이었다. 폭음과 폭정은 서로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갑진년 겨울에 변란을 일으킨 것도 술기운과 무관하지 않았다. 한남산성에 갇혀 지낸 뒤에는 폭음이 더 심해졌다. 술은 밀려드는 불안과 초조감을 달래주는 진정한 벗이요 동행자였다. 맥아(麥芽)로 빚은 술과 소주를 합한 혼주(混酒)가 스며들면서 목구멍에 차가운 눈보라가 휘날렸다.

폐주는 눈앞에 벌어지는 모든 일이 꿈인듯 싶었다. 세상을 호령하며 권세를 누리던 모습이 환영처럼 눈에서 어른거렸다. 갑진년 겨울, 수하 무사들을 동원해 정변을 일으키면 세상이 완전히 자기 것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갑진정변은 '삼일천하'도 아닌 '한 시진(時辰) 천하'로 끝났다. 병조판서 김용현, 어영대장 이진우, 별기대장 곽종근, 포도대장 조지호 등 폐주를 도와 변란을 일으킨 자들이 줄줄이 의금부로 압송됐다. 사관(史官)들은 '갑진정변'이라는 명칭마저 허용하지 않고 '석열의 난(亂)'이라고 역사책에 적었다. 이제 칼끝은 폐주 한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의금부와 포도청 등 한때 충성을 맹세했던 기구들이 일제히 폐주를 잡으러 달려들었다.

폐주는 내금위장 박종준을 불렀다. 원래 포도청 군관을 지낸 뒤 여기저기 벼슬자리를 기웃거리다 전임자인 김용현이 병조판서로 자리를 옮기면서 천거한 인물이었다. 폐주와 병판을 섬기는 데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이제 어찌하면 좋겠는가?" 폐주가 침통하게 물었다. "너무 심려하지 마소서. 비록 창졸한 곤경을 피해 잠시 성 안에 머물고 있지만 민심이 오로지 전하를 향하여 있으니 어찌 회복이 멀겠나이까. 제가 충심을 다해 전하의 옥체를 보호하겠나이다." 박종준은 변란의 모의 과정에서부터 깊숙이 관여했던 터라 더는 물러날 곳도 없는 처지였다. 폐위된 왕을 다시 복위시키는 것만이 자신이 살길이라 여겼다. 그는 애꿎은 내금위 병사들을 사병(私兵)으로 부려 사지로 몰아넣는 것에 어떤 거리낌도 죄책감도 없었다.

그해는 유난히도 눈이 많았다. 한남산성의 높은 담장에도, 성문 앞길에도 눈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성문 밖에 폐주를 지키겠다는 어중이떠중이 군중들이 모여들어 어수선했다. 그들은 악다구니를 쓰며 길거리에 드러눕기도 했다. 어리석고 사리분별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태극기와 함께 바다 건너 먼 나라의 깃발도 함께 쥐어져 있었다. 사대(事大)의 예로 섬기는 큰 나라의 깃발이었다. 그들의 기대는 바다 건너 황제에게 향해 있었으나, 난이 일어난 뒤 그 큰 나라도 폐주를 버렸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별과 줄무늬가 새겨진 깃발이 폭설에 젖어 힘없이 흐늘거렸다.

폐주는 격서(檄書)를 써서 성 밖으로 내보냈다. "흉도와 역도들의 준동으로 사직의 존망이 경각에 달렸다"고 적고, 엄동설한에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사람들을 극진히 치하했다. 엊그제까지도 만백성을 상대로 허언을 일삼던 그였으나 이제 그런 거추장스러운 위선도 내팽개쳤다. 자신을 따르는 한 줌의 무리에게 고개를 숙이며 매달렸다. 격서를 받은 군중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그 소리는 근처에 구름떼처럼 모여 폐주의 체포와 하옥을 요구하는 백성들의 우레같은 함성에 곧바로 묻혔다.

폐비 김씨는 매일 폐주와 만나 머리를 맞댔다. 한때 중궁전의 주인이었던 그는 남편이 보위를 잃으면서 함께 폐비의 신세로 전락했다. 그는 이 위급한 순간에도 강아지를 끌고 산성 안을 돌아다녔다. 이날도 강아지를 가슴에 품고 폐주와 마주 앉았다. "너무 심려하지 마소서. 신첩이 용한 무당들을 동원해 비방의 방책을 세워놓았나이다."

폐비 김씨는 원래 점치기를 좋아했다. 점술가, 예언가, 도사, 무당들을 가까이 두고 길흉화복을 물었다. 시시때때로 굿하기도 즐겼다. 일개 판의금부사에 불과했던 남편이 보위에 오른 것도 순전히 주술의 힘이라고 굳게 믿었다. 갑진년 변란도 "올해 대운이 들어 있다"며 폐주를 부추겼다. 김씨는 주술의 힘을 빌리면 폐주가 왕좌를 되찾고 자신도 중궁전 주인으로 복귀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김씨의 부탁을 받은 무당들이 곳곳에서 은밀하게 굿을 했다. 옥황상제, 태양신, 태음신, 산신, 지신, 용왕신, 성주신, 대감신, 군웅신 등 온갖 신들의 이름이 굿당에 쏟아져 내렸다.

병조판서 김용현 등 변란 주모자들에 대한 의금부의 문초가 이어지며 폐주의 죄상도 낱낱이 드러났다. 군사를 동원해 나라를 통째로 손아귀에 넣으려 한 계책은 잔인하고도 간특했다.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은 모두 납치해 지하감옥에 가두고 고문하려 했다. 북방의 위협을 거짓으로 꾸며내 백성을 현혹하고 온 나라를 군홧발이 짓밟는 암흑천지로 만들려 했다. 백성들은 경악하고 분노했다. 한남산성에 숨어 있는 폐주를 끌어내 곧장 하옥해야 한다는 함성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사방으로 퍼졌다.

폐주를 잡아들이기 위한 공성(攻城)이 시작됐다. 지체 높은 벼슬아치들의 비리 조사와 감찰을 위해 새로 만들어진 사헌부가 공성의 책임을 맡았고 포도청이 뒤를 따랐다. 그러나 폐주의 버티기는 완강하고 집요했다. 검은 갑옷으로 무장한 내금위장 박종준의 진두지휘 아래 내금위 병사들이 겹겹이 인의 장막을 치고 막았다. 내금위 군졸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왜 쫓겨난 왕을 보호해야 하느냐"는 볼멘 목소리가 새어 나왔으나 박종준은 "군령을 따르지 않으면 군율로 다스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사헌부를 새로 맡은 대사헌 오동운은 무능하고 심약했다. 공성전의 경험도 없었고, 사전 준비도 어설펐다. 박종준을 현장에서 붙잡아 내금위를 제압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머뭇거리다 놓쳤다.

내금위의 반란으로 국법이 허물어지고 나라의 기강이 곤두박질쳤다. 폐주 대신 정무를 맡고 있던 이는 호조판서 최상목이었다. 내금위를 엄히 다스려 법도를 바로 세우라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그는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최상목은 폐주가 매우 총애하던 신료였다. 그가 폐주의 은공을 잊지 못해 딴청을 부리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손가락질했다.

폐주가 궁에서 쫓겨난 뒤 애초 정무를 넘겨받은 이는 영의정 한덕수였다. 여러 군왕을 섬기며 부귀영화를 누린 노회한 인물이었다. 영의정 자리만 해도 두 번째였다. 그의 부인 최씨도 점치기를 좋아했다. 폐주와 별 인연도 없던 그가 영의정 자리를 꿰찬 것은 부인 최씨가 폐비 김씨와 점술로 얽힌 덕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영의정 한덕수는 폐주를 두둔하다가 보름도 지나지 않아 쫓겨났다. 그 뒤를 이어 호조판서 최상목이 나섰으나 자세는 엉거주춤했고 걸음은 비틀거렸다. 폐주의 그림자가 여전히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른 아침 동이 트면서 시작된 한남산성 싸움은 오후 들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한강진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잡으려는 자들과 막으려는 자들이 지루하게 대치했다. 공성군은 큰길을 버리고 산길을 통해 폐주에게 접근하려 했으나 그마저 내금위 병사들이 겹겹이 진을 치고 막아섰다. 먼저 포기한 쪽은 공성군이었다. 병력의 숫자에서도 공성군이 농성군에 밀렸다. 사헌부와 포도청 군관들이 물러서는 것으로 1차 한남대첩은 허무하게 끝났다. 지는 해 아래 성문이 다시 육중히 닫혔다.

폐주를 영수로 모시던 붕당(朋黨)의 무리는 크게 환호했다. 사헌부와 포도청의 퇴각이 큰 승리나 되는 것처럼 법석을 떨었다. 붕당의 무리는 변란 직후부터 폐주 편에 섰다. 폐주가 쓰러지면 자신들의 권세 또한 사라질까 두려워 발을 동동 굴렀다. 권영세 권성동 등 훈구대신들이 폐주 살리기를 총지휘하고 윤상현 김민전 등이 돌격대로 앞장섰다. 이들은 궤변으로 성을 쌓고, 허구와 기만으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사방팔방으로 쏘아댔다. 그들이 구사하는 말은 언어라기보다는 격렬한 무질서와 아우성이었다.

붕당 안에서도 바른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김상욱 김재섭 등 붕당의 신진세력들이었다. 폐주를 계속 감싸고 돌다가는 민심의 철퇴를 맞아 필경 붕당 전체가 무너질 것이라고 한탄했다. 하지만 이들의 말은 바람에 실려 가는 갈대의 소리처럼 외롭고 가냘펐다. 훈구파들이 쌓은 거대한 궤변의 성채를 뚫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부서져 흩어졌다.

그러나 붕당의 무리도 천하의 대세가 이미 기울어 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폐주가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그들이 잘 알고 있었다. 한남산성은 무너질 운명이었고, 그 시간을 늦출 방도는 없었다. 사헌부와 포도청이 더욱 단단히 2차 공성전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민심의 거대한 파도가 이미 둑을 넘어 한남산성으로 해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폐주가 출성(出城)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한남산성을 나서면 길은 과천으로 이어졌다. 그 길은 사헌부로 향하고, 다시 형조가 관할하는 의왕의 전옥서(典獄署)로 연결됐다. 앞으로 폐주가 가야 할 길이었다. 그 길은 변란으로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우는 길이기도 했다. 죽음을 딛고 신생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갑진년의 혼란, 무도한 군주의 폐위, 한남산성의 농성으로 이어진 파란의 시간이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 글은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김훈 작가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필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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