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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스트 김구>, '중꺾마' 백범 모해하려 증거조작뿐, 무엇을 걸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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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테러리스트 김구>, '중꺾마' 백범 모해하려 증거조작뿐, 무엇을 걸었나?

[프레시안 books] 정안기의 <테러리스트 김구> 下

(바로가기 ☞ : 정안기의 <테러리스트 김구> 上 : <테러리스트 김구>가 정말 하고싶은 말은 '김구는 테러리스트 아닌 연쇄살인마')

평화통일, 국가보안법 폐지, 또는 주한미군 철수와 같이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주장을 편 사람들이 북한의 주장에 동조한 종북좌빨로 몰려 국가보안법의 희생양이 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정안기 등 뉴라이트들은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가 북한의 교과서를 베꼈다고 아우성을 쳐왔다. 그런데 정안기가 김구는 살인마라고 가장 강하게 주장할 때 근거로 대는 자료는 놀랍게도 북한에서 간행된 서적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김구가 1948년 남북협상에 나서기 전까지 북한은 이승만과 김구를 한 데 묶어 남조선반동 살인 테러 집단의 두목이라고 갖은 욕을 다 퍼부었었다.

김구가 남북협상에 나선다니 북한이 급하게 도처에 써놓았던 이승만·김구 비난 구호에서 김구 이름을 지웠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가 아닌가? 정안기는 1946년 5월 북조선5·1기념공동준비위원회가 펴낸 <팟쇼·반민주분자의 정체>에 실린 김구에 대한 험한 말들을 금과 옥처럼 인용하여 자기의 논거로 삼고 있으니 종북도 이런 종북이 없다. 그런데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이승만과 김구를 싸잡아 욕하고 있다. <팟쇼·반민주분자의 정체> 18, 20, 56쪽에는 "살인강도단 '테로' 두목" 이승만과 김구는 "해외의 수십 년 역사를 반역자의 명부에 올린" 자들로 "지금 선두에 서서 '테로' 운동을 영도"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정안기는 이승만 부분은 놔두고 김구에 대한 비난만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내로남불'이 아닌 '이로김불'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출전은 악의적인 뇌피셜

정안기는 독립운동가들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깜짝 놀랄 무지를 곳곳에서 드러낸다. 예컨대 주 581에서는 이회영의 일가 가운데 임시정부에 참여한 인물은 없었다고 단언하는데, 임시정부에서 아마도 가장 오래 국무위원을 지낸 이시영(초대 부통령)은 이회영의 바로 밑 동생이었다. 정안기는 이규서와 연충렬(김구의 측근 엄항섭의 처남)의 처형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사건의 당사자였던 이규창(이회영의 아들이자 이규서의 사촌동생)은 이규서와 연충렬을 유인하여 백정기와 엄형순이 처형했음을 자신의 회고록 <운명의 여신(餘燼)>에서 자세히 밝혔다. 그러나 정안기는 엉뚱하게 상해 주재 일본총영사의 잘못된 정보를 인용해 두 사람이 "김구파에 의해 암살되었다"(212)고 했다. 문제는 정안기가 자기한테 유리할 때는 이규창의 <운명의 여신>을 7~8회나 인용하고 있지만, 정작 이렇게 중요한 부분은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안기는 안창호가 체포된 것이 김구가 윤봉길 의거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결과적'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무력입국론자인 김구가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비폭력 자강주의자 안창호를 제거하고 흥사단을 와해시키기 위해 윤봉길 폭살테러의 후폭풍을 이용했다는 것이다.(152) 그러나 당시 안창호를 지근 거리에서 모셨던 구익균의 회고록이나 최근 간행된 흥사단 이태복의 <안창호 평전>을 보면 안창호와 김구 두 분의 돈독한 동지적 관계는 정안기류가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또 안창호의 체포 과정을 전문적으로 다룬 한시준이나 이명화의 논문을 꼼꼼히 살펴봐도 정안기처럼 안창호의 체포를 백범 탓으로 돌릴만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

정안기의 독립운동에 대한 악랄하고 의도적인 왜곡은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다. 정안기는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주도한 무정부주의자 정화암이 옥관빈, 옥성빈, 이용노, 이태서 등을 암살한 행위를 두고 "이 모든 것은 '독립투쟁도 좋지만, 우선 먹고 살아야했다'는 정화암의 고백과 같이 '생계형 테러' 혹은 '청부살인'의 실상이었다"고 주장했다.(196) 이런 식의 서술은 마치 정화암 자신이 위에 열거한 암살행위가 먹고살기 위해 벌인 청부살인이었던 것처럼 고백했다는 인상을 준다. 소제목 자체가 '청살(청부살인)의 추억'이다. 그런데 정작 정화암이 '독립투쟁도 좋지만, 우선 먹고 살아야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은 그가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동지들과 아이스크림 가게를 열었다가 쫄딱 망해 자본금만 축냈다는 일화를 소개한 것이다.

정안기는 1939년 5월경 중경에서 실종된 안공근을 백범이 남화한인청년연맹 정화암을 사주해 암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32) 그런데 뒷부분에 가서 정안기는 구익균의 증언을 인용하여 "정화암은 자기가 하지 않지만, 무정부주의자가 맡아 가지고 청부살인을 했다는 그런 얘기야"라고 쓰고 있다.(260) 정안기는 구익균의 증언을 요약하면서 "그(안공근)가 정화암을 굉장히 미워했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정안기가 왜곡한 구익균의 증언 원문(국사편찬위원회, 2013, <독립운동과정병,식민 경험의 두갈래 길>, 47쪽)을 찾아보면

(면담자) 선생님은 이 사실을 누구한테 들었습니까?

(구익균) 누군고 하니 백범 맏아들이 김인이라. 김인이가 이 내용을 안단 말이야. 그가 굉장히, 정화암을 굉장히 미워하고 했어. 이이가 백범 아들이고 그러니까 이이한테 통해서 결국은 3인방이 안공근을 죽였으니까, 이이를 통해서 알았던 노태준이를 통해서 나는 그 얘기를 들었어.

라고 되어있다. 정안기처럼 지독한 확증편향에 사로잡히지 않고 정상적으로 한국어를 읽는 사람이라면 정화암을 굉장히 미워했던 인물은 안공근이 아니라 김인임을 알 수 있다. 구익균의 증언에 따르면 안공근 피살의 비화를 노태준에게서뿐 아니라, 정화암에게서도 직접(아마도 1950년대 구익균과 정화암이 진보당 운동을 같이할 때) 들었다. 정안기의 뇌피셜과는 달리 정화암은 안공근이 실종된 무렵이 1939년에 중경에 간 일이 없다. 그는 중경에 갈 계획을 세웠었지만, "당초의 계획을 보류하고 건양(복건성)과 상요(강서성)를 중심으로 새로운 항일운동 태세를 갖출 것"을 모색했던 것이다.(정화암 회고록, 214) 정안기는 정화암이 중경에 간 적도 없고, 260쪽에서 구익균의 증언을 인용하여 정화암 자신이 하지 않았다고 서술해놓고서도 270쪽에 가서는 안공근이 "1939년 5월 살인 청부업자 남화연맹 정화암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쓰고 있다.

▲ 백범김구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임시정부 시절 이봉창, 윤봉길 의사 등이 속했던 한인애국단을 조직한 김구 사진. ⓒ손호철

죽은 선우휘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왜곡 인용

백범 김구를 음해하는 세력이 백범에게 덮어씌우기 위해 가장 공을 들였던 사례는 장덕수 암살사건이었다. 정안기도 당시 미군정 당국이나 분단세력이 그랬던 것 이상으로 백범을 음해했다. 정안기는 대중들의 깊은 관심 속에 열린 법정에서 범인들에 대한 심문 결과 암살의 배후세력으로 한독당의 중견 간부들이 드러나자, 좌익 측에서는 "그것 보라며 일제히 야유와 힐난과 공격의 화살을 퍼부었다. 보수 반동으로 가는 길, 스스로 무덤을 향하여 가는 꼴이 악마의 피리 소리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강물에 빠져드는 돼지떼와 뭐가 다르냐고 빈정댔다"며 선우휘의 소설 <노다지>를 인용했다.(574) 그는 또 "피의자 심문에서 치밀한 암살 계획과 김구의 암살 지령이 드러날 때마다 방청객들은 충격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동아일보 기사를 인용했다. 이어 "당시 군사재판에 참석했던 방청객과 일간지를 받아 본 독자들은 누구라도 김구가 암살테러의 배후라고 확신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400) 정안기는 이에 대한 출전으로 또다시 선우휘의 <노다지>를 제시하면서, 작가 선우휘는 범인 심문에서 배후세력으로 한독당의 중견간부가 드러나자 "세간에는 한독당 당수 김구 주석이 직접 교사한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기 시작했다"고 증언했다고 주장했다.

필자가 문제 삼으려는 것은 역사를 서술하면서 소설을 인용했다는 점이 아니다. 소설도 얼마든지 역사적 사료로 인용될 수 있다. 문제는 얼마나 정확하게 그 소설이 의미하는 바를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았냐는 점이다. 선우휘의 소설 <노다지>에는 위에 정안기가 인용한 문장이 나오기는 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조금 길지만 선우휘가 백범의 증언광경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정안기는 1986년 동서문화사판을 이용했고, 필자는 1993년 학원한국문학전집판본을 인용했다. 아래 인용문에 페이지는 학원한국문학전집판본의 페이지이다.)

해방 뒤 중국에서 돌아온 동료 기자 한 사람은 핏대를 올리며 흥분했다.

「그따위 터무니없는 중상모략들을 마시오!」

재판이 시작되자 김구 주석은 증인으로 법정에 불려 나갔다. 주석의 출두 첫날을 보고 돌아온 법조 기자는 감격 어린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훌륭한 분이야.」

감개 어린 목소리였다.

「정말 당당하더군. 인정 심문을 하는데 직업이 뭐냐고 물었을 때 김구 씨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

수인도 다른 기자들도 한결같이 그의 얼굴을 지켜보며 숨을 죽였다. 그는 좀처럼 말하기 아까운 듯이, 그래서 자기 혼자 그것을 간직해 두려는 듯 한창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군가가 참다못해 다그쳤다.

「빨리 말해 봐.」

「뭐라고 대답했는가 하면 바위같이 태연한 자세, 위엄 있는 굵직한 목소리로, 나의 직업은 …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그렇게 말했단 말이야.」

순간 수인은 이루 형용하기 힘든 세찬 충격을 느꼈다. 커다란 쇠뭉치로 쾅 하고 가슴을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아팠다. 굳게 닫혔던 가슴의 문이 열리며 한없이 넓고 푸른 하늘로 트이는 통쾌한 그런 아픔이었다.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다른 기자들의 감명도 충격적인 듯 싶었다.

「거창한 말인데.」

「역사에 남을 명문구야.」

「평생을 그렇게 산 분이 아니면 못할 소리군.」

그때 사회부장이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 그렇게 뽑아! 타이틀은 그밖에 없어!」

인물이 있긴 있었구나 싶었다.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 평생 그렇게 산 분이 아니면 못할 소리임에 틀림없었다. 서슴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신념에 찬 그 한마디 … 인간은 모름지기 일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수인은 한없는 존경을 느끼는 한편 그가 몹시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자기도 한평생을 살고 나서 그렇게 스스럼없이 자랑스럽게 자기를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고 싶었다. 인생의 황혼녘에 섰을 때 자신도 그런 인간으로 마무리짓고 싶었다. 그러나 김구 주석의 그 한마디는 한평생을 살고 난 마무리의 한마디로 생각할 수만은 없었다.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 한평생 오로지 그것을 목적으로 신념을 가지고 살아왔건만, 그래서 내 나라 내 고장을 떠나 고초의 가시밭길을 걸어왔건만, 늘그막에 광복을 맞아 조국 땅으로 돌아왔건만 아직도 독립을 보지 못한 노투사의 한 맺힌 단장의 부르짖음이라고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한마디가 그토록 세찬 충격을 주는 것이 아닐까?

호랑이가 언덕에 올라 하늘을 우러러 포효하는 듯한 우렁차고 슬픈 가락때문에… 그가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이라고 말했을 때, 앞으로도 늙은 몸을 이끌고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독립운동을 계속하겠다는 굳건하고도 서글픈 결의가 가을바람처럼 그의 늙은 가슴을 오고갔으리라. (<노다지>, 477~478)

(...)

김구 주석은 항의하는 조선인 변호사를 가로막고 일어났다.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무섭도록 조용히 가라앉았다.

「나는 왜놈을 해치란 적은 있었지만 동포를 해치란 적은 없었소.」

순간 법정 안의 방청석에서 잔물결 같은 가벼운 동요가 일었다. 수인은 저도 모르게 몸을 조금 떨었다.

〈왜놈을 해치란 적은 있었지만…〉

그것은 김구 주석의 지난날 투쟁을 돌이켜보게 하는 증언이었다. 그가 전에 일본인 순사를 때려눕힌 일, 그리고 윤봉길 의사 같은 젊은이들에게 일본 타도의 의거를 격려한 갖가지 사실들…

〈동포를 해치란 적은 없었소.〉

아! 이 신념에 찬 한마디! 이 민족의식에 투철한 증언! 수인은 기자석에 못 박힌 채 온몸을 뒤흔드는 감격에 못 이겨 그만 원고지 위를 달리던 연필을 떨구고 두 팔로 힘껏 자기 가슴을 끌어안았다.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격동을 일으킨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노다지>, 478~479)

<노다지>의 주인공은, 아마도 선우휘의 조선일보 동료로 장덕수 암살사건의 재판을 밀착 취재했던 조덕송으로 보인다. 조덕송 역시 정안기가 몇 차례 인용한 저서 <머나먼 여로 2> (1989, 100)에서 백범이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이오"라고 말했을 때 "나는 순간 가슴이 빽빽해지도록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감격에 자기를 주체하지 못했다. 정말 명답이 아닌가! 나는 눈시울까지 뜨거워짐을 의식했다"라고 쓰고 있다.

정안기는 왜 느낌표 팍팍 찍어가며 백범을 찬양한 선우휘를 이렇게 터무니없이 왜곡해서 인용했을까? 선우휘가 자신의 소설이 백범을 중상, 비방하는 도구로 쓰였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다. 정안기나 <건국전쟁>류는 백범을 띄운 것은 주사파나 종북좌파라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선우휘가 누구인가? 선우휘가 종북좌빨 주사파인가? 오늘의 극우신문 <조선일보>를 만든 딱 한 사람을 꼽으라면 방일영이나 방우영보다 앞서 꼽힐 만한 인물로, 20세기 후반 보수진영 최고의 이데올로그가 아닌가? 선우휘는 이 소설에서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계초 방응모의 기명칼럼을 인용해 "일부에서 선생에 대한 과도한 비난과 폭언이 있음에 대하여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유감되는 바 적지 않다"라고 쓰고 있다.(<노다지>, 484)

아무리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최소한도로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하지 않을까? 주를 단다는 것은 자기 주장의 근거를 대며 독자들을 설득하는 것인데, 금방 들통 날 이런 사기를 쳐서야 어찌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안병직 교수가 일찌감치 정안기와 <테러리스트 김구>를 손절한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불량식품 섭취가 취미라면 모를까 더 읽을 이유가 없는 책이다. 아니, 책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의 심리와 사고방식 전혀 이해 못해

정안기의 눈에는 백범이 이봉창에게 거사 자금을 2차례 나눠 준 것이 김구의 입장에서 난봉꾼 이봉창은 결코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108)이라고 비친다, 정안기는 김구가 폭발력이 약한 마미 수류탄을 이봉창에게 준 것도, 천황 폭살의 후폭풍을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김구가 "폭살테러 자체가 애당초 실패하도록 설계"(111)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봉창 의거를 준비할 때 백범은 돈이 없었다. 태평양 건너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던 동포들이 모아서 보내준 돈으로 수류탄 겨우 두 개 구하는 데 1년이 걸렸다. 폭발력이 약한 마미 수류탄은 그 당시 백범이 현실적으로 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폭탄이었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 20여일 후 일본은 10만 대군에 비행기 300대, 군함 80척을 동원해 상해를 침략했다. 수류탄 두 개 마련하는 데 1년 걸린 우리 독립운동이 힘으로 일본을 꺾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이봉창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죽으러 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나태와 쾌락에 빠진 자포자기 상태의 난봉꾼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다. 이봉창에게는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으며, 궁극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봉창의 희생이 있었기에 백범은 윤봉길의 거사를 준비할 때 중국인들의 지원을 받아 폭탄 20여 개도 장만할 수 있던 것이다. 영화 <밀정>의 마지막 대사마냥, 우리는 실패를 딛고 한발한발 나갔던 것이다.

정안기는 안병직 교수가 책의 서문이나 목차도 보지 않고 자신을 비판했다고 펄펄 뛰었다. 그런데 정작 정안기는 백범 김구를 희대의 연쇄살인범으로, 이봉창을 "원초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기, 횡령, 절도 등 물불을 가리지 않는 난봉꾼"이라고 비난했다. 개인의 사적 이익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의 심리와 세계관과 사고방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뉴라이트들은 인간은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일본이 주는 떡고물을 받아먹던 친일파들에게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당장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독립의 길에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었다. 정안기는 '중꺾마'의 자세로 목숨을 걸었던 백범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을 모해하고 중상하기 위해 증거조작을 했을 뿐, 무엇을 걸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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