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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배신자' 프레임, "유대인은 전쟁 때 등을 찌른 볼셰비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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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배신자' 프레임, "유대인은 전쟁 때 등을 찌른 볼셰비키였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83]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⑪

지난 2004년 12월 <로이터통신> 보도로 히틀러 관련 기사 하나가 떴다. 독일 뮌헨의 공공도서관에서 히틀러의 세금 체납 기록이 발견됐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를 읽어보면, 히틀러를 가리켜 이른바 '악성 세금 체납자'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의 투쟁>을 발간한 1925년부터 독일 총리에 오르기 직전까지 8년 동안 히틀러는 뮌헨 세무서로부터 줄곧 "밀린 세금을 내라"는 독촉을 받았다.

도서관 자료에 따르면, 뮌헨 세무서는 히틀러가 <나의 투쟁> 판매로 123만 라이히스마르크의 인세 수입을 올렸으니 세금 60만 라이히스마르크를 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3분의 1인 20만 라이히스마르크만 내고 나머지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버텼다.

123만 라이히스마르크는 이즈음 화폐가치로는 200만 달러가 넘는 금액이다. <나의 투쟁>이 엄청나게 많이 팔렸음을 말해준다. 여기에 '히틀러 마법'이 작동했다. 1933년 히틀러가 총리에 오르면서 세금 체납 문제는 순식간에 풀렸다. 일본 국세청에서 오랫동안 조사관으로 일하다 퇴직해 작가로 나선 오무라 오지로(大村大次郞)의 글을 보자.

[히틀러는 절세(節稅)를 열심히 행했던 것 같다. 당시로서는 서민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자동차를 구입하여 경비로 처리하려 했다. 현대의 사업자들에게도 널리 퍼진 절세방법이다. 그렇다고 납세액을 줄일 수는 없었다. 히틀러가 1933년에 정권을 잡자 뮌헨 세무서장이 먼저 나섰다. 히틀러에게 편지를 보내 "지금까지의 체납액을 소멸시키겠다"고 했다. 히틀러의 측근은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답했다. 그 세무서장은 한 달 뒤 독일 세무본청의 수장으로 승진했다] (오무라 오지로, 『탈세의 세계사』, 더봄, 2019, 173쪽).

유대인을 '기생충' '페스트'라 비난하는 <나의 투쟁> 판매가 올라가면서 히틀러의 지지도도 급등했다. 지지도가 올라가면서 <나의 투쟁> 판매가 늘어났다고 말해도 같은 얘기다.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켰다고 보는 것이 맞다. 1932년 11월 총선에서 나치당이 득표율 33.1%로 제1당이 된 것은 그냥 된 것이 아니었다. 독일 국민의 선택을 받아서였다. 1933년 1월 히틀러는 권력을 잡자 그의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유대인을 못 본 체 놔둘 수는 없었다. 공권력과 법적인 뒷받침을 받아 유대인 박해는 가속도가 붙었다.

▲ 1927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당 집회에 나온 히틀러. 나치당이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 쓴 전략은 ‘유대인=볼셰비키’와 더불어 ‘유대인=배신자’ 프레임이다. ⓒ위키미디어

히틀러, "유대인이 정치권력 잡는다"

히틀러는 입만 열었다 하면 유대인과 볼셰비즘(러시아 사회주의)을 비난하면서 둘이 한 몸통이라고 주장했다. 히틀러뿐 아니라 독일의 극단주의자들은 끊임없이 '유대인=볼셰비키' 론을 펴면서 독일의 보통 사람들에게 안 그래도 미운 털이 박힌 유대인들이 마르크스주의자라는 편견과 더불어 두려움을 안겼다.

[유대인의 마르크스주의적인 무기에 대한 공포가 차츰 성실한 사람들의 머리와 마음을 악몽과 같이 괴롭힌다. 사람들은 이 무서운 적에 대해 떨기 시작하며 그와 동시에 그들이 결정적인 희생물이 되어버린다.]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동서문화사, 2014, 457쪽)

[커다란 최후의 혁명이 시작된다. 유대인은 정치권력을 쟁취했으므로 몸에 붙이고 있던 베일을 벗어던진다. 피에 굶주린 유대인, 민족의 폭군이 나타난다. 이러한 종류의 가장 무서운 실례는 러시아에서 찾을 수 있다. 그곳에선 유대인 저널리스트와 증권거래소의 악당들에게 (러시아)대민족의 지배권을 확실히 넘겨주기 위해서 3,000만의 인간이 실로 광신적인 야만성으로 비인도적인 고통 속에서 살해되거나 굶어죽었다.] (아돌프 히틀러, 460쪽)

히틀러 연구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한 뒤 히틀러가 퍼뜨린 반유대 독설이 독일 사회에서 공감을 더 얻은 것은 러시아와 독일에서 일어났던 사회주의혁명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차르 전제군주를 몰아낸 볼셰비키혁명(1917년 10월혁명) △카이저를 몰아내고 바이마르공화국을 탄생시킨 독일혁명(1918년 11월-1919년 8월)의 진행과정에서 일어났던 스파르타쿠스단(團)의 무장봉기(1919년 1월)를 가리킨다.

러시아에선 성공했고, 독일에선 실패했던 이들 혁명에는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함께 했다. 볼세비키혁명 지도자 레온 트로츠키, 스파르타쿠스단의 무장봉기 지도자 로자 룩셈부르크가 바로 유대인이었다.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의 파시스트들은 바로 그런 사실을 부풀리며 유대인과 공산혁명이 한 몸통이라 주장했다. 영국의 보수적 저널리스트이자 역사저술가인 폴 존슨은 다른 누구도 아닌 사회주의 성향의 좌파 유대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 패전 뒤 독일의 반유대 분위기를 심화시키는 데 (자신들의 의도와는 달리) 한몫 했다고 풀이했다.

[(1920년대 독일 반유대주의에는) 유대인에게도 책임이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19세기 후반 급진적 정치성향을 보이던 비(非)유대적 유대인, 다시 말해 (유대교를 믿지 않고) 유대인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던 유대인에게도 책임이 있다. 이 그룹에 속하는 유대인은 모두 사회주의자였고 짧은 기간이지만 유럽과 유대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포이에마, 2014, 754쪽)

마르크스, 유대인을 비판한 좌파 비(非)유대인

19세기 '비(非)유대적 유대인'의 대표적인 보기로 꼽히는 인물이 <자본론>(1867)을 쓴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이다. 유대인 변호사의 아들로 태생적으로 유대인이었던 마르크스는 어린 시절부터 유대인들이 겪는 차별을 보면서 자랐다. 하지만 그는 유대교를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의 눈에 '물질 만능주의 성향'을 보이는 유대인 사회와도 담을 쌓고 지냈다.

유대교 성직자인 랍비, 또는 토요일마다 시너고그(유대교 예배당)에 가는 유대교도의 눈길로 보면, 마르크스는 핏줄만 유대인일 뿐 그 스스로는 '유대인'임을 잊은 사람이다. 비(非)유대인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유럽 백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을 차별하고 경멸하는 반유대주의자'도 아니었다. 다만 거리를 두고 유대인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잘 알려진 대로, 마르크스는 물신주의(배금주의)가 판치는 불평등 세상을 비판하면서 혁명과 개혁을 통해 평등 세상으로 바꾸려 했다. 마르크스의 눈길로 본 유대인들은 이기주의와 실리적인 욕구에 사로잡힌 집단이었다. 따라서 그런 유대인은 죄악이고 부정돼야 한 존재다. 그는 <공산당선언>을 발표하기 5년 앞서 쓴 책(Zur Judenfrage, 1843)에서 유대인의 탐욕을 이렇게 비판했다.

[무엇이 유대인의 세속적인 제의(祭儀)인가? 악덕 상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무엇이 유대인의 세속적인 신인가? 화폐(돈)야말로 유대인의 세속적인 신이다. 악덕 상행위와 화폐로부터의 해방, 따라서 유대교로부터의 해방이 우리시대의 자기해방일 것이다. 악덕 상행위의 전제가, 악덕 상행위의 가능성이 완전히 뿌리 뽑히도록 사회를 조직하는 것이야말로 유대인을 존립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유대인의 종교적 의식은 무미건조한 향처럼 사회의 현실적인 삶의 공기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칼 마르크스,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책세상, 2021, 68쪽)

위 글은 1943년 프랑스 파리에서 발행되던 급진 좌파 성향의 잡지인 <독불연지>에 실렸던 글을 모아 책자로 펴낸 것이다. 청년 마르크스는 유대교가 악덕 상행위를 부추기는 '보편적이고 현재적인 반사회적 요소'를 지녔다고 맹렬히 비판했다. 하지만 유대교라는 종교를 잣대로 유대인을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유대인이라는 특정 민족의 역사나 종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시각에서 '유대인 문제'는 유대인들이 믿는 종교(유대교)가 아니며, 따라서 유대인이 유대교를 버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했다.

마르크스 주장의 요점은, 유대인 문제를 제대로 알려면 자본과 화폐 권력의 문제를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를 만드는 사회경제적(자본주의경제) 여건을 분석해야 한다는 얘기다. 유대인 마르크스가 유대인 문제를 사회과학적으로 꿰뚫어 보려는 접근 방식은 지금도 높이 평가받는다(이즈음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에서 벌이는 전쟁범죄를 마르크스가 봤다면 그는 더욱 세찬 비판을 내놓았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마르크스를 향해 '자기혐오에 빠진 유대인'이라 손가락질 할 게 뻔하다).

▲ 유대인 출신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9년 1월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가 실패로 끝난 뒤 즉결 처형됐다. 그의 시신이 던져졌던 베를린 란트베르 운하에는 추모 조형물들이 세워져 있다. ⓒ김재명

로자 룩셈부르크의 실패한 혁명

유대교의 시선으로 보면, '비유대적 유대인'은 더 이상 유대인의 종교를 믿지 않고 유대적 전통에서 벗어난 이방인들이나 마찬가지다. 19세기의 비유대적 유대인 혁명가가 마르크스였다면, 20세기의 비유대적 유대인 혁명가들 가운데는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와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를 뺄 수 없다. 두 사람은 패전 뒤 독일에서 히틀러를 비롯한 파시스트들이 '유대인은 볼셰비키'라는 편견을 심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됐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독일 패전 뒤인 1919년 1월 스파르타쿠스단(團) 무장봉기를 일으켰다가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던 독일 좌파 지도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 자모시치 출신이다. 그는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이 유대교 랍비였고,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 늘 토라를 들려주었을 만큼 신앙심 깊은 유대 핏줄을 지녔다. 집안 살림도 넉넉했다. 그럼에도 10대 소녀 때부터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1898년 독일 시민권을 얻으려고 독일인 인쇄업자와 겉치레 결혼을 한 뒤로, 룩셈부르크는 독일 사회주의 혁명 투쟁에 몸을 바쳤다. 하지만 그 자신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그의 투쟁 활동에서 '유대인'임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그 자신이 유대인이라 밝힐 경우 유리한 경우라도 입을 닫았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반유대 공격에 대해선 이를 무시하려고 애썼다.

[어째서 유대인의 불행만 특별하게 취급해야 하죠? 나는 (남미) 푸투마요의 가련한 인디언희생자나 아프리카의 흑인도 똑같이 불쌍하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 게토에만 특별히 마음을 내줄 생각이 없습니다.] (폴 존슨, 756쪽)

위의 글은 유대인이 겪는 폭력과 잔혹행위 등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지인에게 룩셈부르크가 보낸 편지의 일부다. 그의 판단에 따르면, 노동자 계급이 그랬던 것처럼 마르크스 추종자에게 유대인 문제 같은 것은 없었다. 유대인에 대한 공격은 러시아 남부처럼 혁명운동이 약한 곳이나 아예 없는 곳에서만 일어난다고 봤다.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좌파에 속했던 룩셈부르크는 동지인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1871-1919)와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을 조직해 1916년 5월1일 베를린에서 1만 명쯤이 참여한 대규모 반전시위를 이끌었다. 두 사람은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막을 내릴 무렵에 일어난 독일 11월 혁명의 혼란 속에서 독일공산당을 결성했고(1918년 12월), 해를 넘긴 1월 스파르타쿠스단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룩셈부르크는 "의미 없는 피를 흘려선 안 된다"며 섣부른 무장투쟁에 신중한 입장이었지만, 끝내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봉기를 이끌었다. 독일 군부의 우파 국수주의 장교들, 그리고 그들과 손잡은 민병대 조직인 자유군단(Freikorps)의 공세에 밀려 봉기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1919년 1월15일 늦은 저녁 은신처에서 함께 붙잡힌 룩셈부르크, 리프크네히트는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즉결 처형됐다.

▲ "유대인들이 독일군의 등을 찔렀다", "유대인 볼셰비키 때문에 전쟁에서 졌다"는 주장을 담은 커리커쳐. ⓒ위키미디어

돌격대원이 된 자유군단 민병대원들

피투성이가 된 룩셈부르크의 시신은 베를린 시내 란트베르 운하의 차가운 얼음 물속에 버려졌다. 불꽃같은 혁명가를 꿈꾸었던 그의 삶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4개월이 지나 얼음이 녹자 시신이 강물 위로 떠올랐고, 많은 이들이 모인 가운데 장례가 치러졌다(베를린에는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는 장소들이 여러 군데다. 시신이 버려졌던 란트베르에 추모 조형물이 있고, 시내에도 그의 이름을 딴 광장과 동상이 있다).

독일 좌파 지도자의 즉결 처형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자,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재판이 벌어졌다. 관련 장교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외국으로 도망쳤고, 룩셈부르크를 총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던 병사 룽에(Lunge) 혼자 실형을 살았다. 나치 정권이 들어선 뒤 룽에는 히틀러에게 여러 차례 청원서를 보낸 끝에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냈다. "룽에의 행위는 국가를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였다"는 것이 배상 근거였다(마리아 자이데만, <어느 여성혁명가의 사랑과 투쟁: 나는 지배받지 않는다>, 푸른나무, 2002, 254-259쪽 참조).

스파르타쿠스단 봉기를 진압하고 지도자들을 처형했던 자유군단 출신들 가운데 상당수가 히틀러가 조직한 나치당 돌격대(Sturmabteilung, 약칭 SA) 대원이 됐다. 지난 주 글에서 히틀러의 조직 능력은 나치당을 '씩씩하게 행진하는 선거전의 기계'로 바꾸었다고 했다. 그 전위대를 이끌었던 SA대장이자 히틀러의 친구였던 에른스트 룀이 바로 자유군단 출신이다. 히틀러는 권력을 잡고 1년 반 뒤인 1934년 7월, 그를 감옥에 가두고 권총으로 자살하도록 했다. 과격파이자 잠재적 경쟁자인 룀의 세력을 꺾은 독일판 토사구팽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유대 공화국'?

볼셰비키 혁명 지도자 레온 트로츠키는 우크라이나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 남부 오데사의 독일 루터교 학교에서 공부했다. 트로츠키도 룩셈부르크처럼 '비유대인'으로 행동했다. 볼셰비키에는 일반 당원뿐 아니라 고위층에도 유대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면 모든 사람이 불평등과 가난의 사슬에서 풀려날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유대인이란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혁명 투쟁을 벌이면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독일 보통사람들의 반유대 정서가 '유대인은 볼셰비키'라는 낙인 때문에 더 악화되었다면, 볼셰비키 혁명 뒤의 소련에선 독일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반유대주의가 드셌다. 혁명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은 유대국가를 내거는 시오니즘을 가리켜 유대인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에 어긋나는 '반동적' 이념이라고 비판했다. 레닌의 소비에트 정부는 유대인을 학살하진 않았지만, 감싸주지도 않았다. 유대인 교회당을 폐쇄하고 종교공동체를 해체하려 했다.

독일의 보통 사람들은 나치 히틀러가 선전하는 대로 바이마르 공화국이 유대인과 관계가 깊다고 의심하며 '유대 공화국'이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유대인이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맡았던 역할은 아주 적었다고 평가한다. 영국 역사가 폴 존슨의 글을 보자.

[유대인이 독일 공산당 성립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스탈린주의가 득세하면서 고위직에서 밀려난 소련의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독일에서도 당 핵심부에서 밀려났다. 1932년의 총선거에서 공산당은 500명의 후보를 내서 100명이 당선되었는데, 그 중에 유대인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런가 하면 사회민주당(SPD)을 지탱한 것은 비유대계 노동자 계급으로 이루어진 노동조합이다. 그들은 대부분 유대인 좌파 운동가를 바람직하지 못한 중산층 출신의 인텔리로 여겨 기피했다.] (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802쪽)

정치테러로 숨진 유대인 외무장관

유대인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가리켜 '유대 공화국'이라 비난했지만, 공화국 각료 가운데 유대인 출신은 고작해야 기업인 출신으로 외무장관을 지낸 발터 라테나우(1867-1922), 좌파 경제학자 출신으로 재무장관을 지낸 루돌프 힐퍼딩(1877-1941)뿐이다. 이 두 사람이 유대인으로선 바이마르 공화국에선 처음이자 마지막 각료였다.

라테나우는 독일의 대기업인 AEG 창립자의 아들로, 뮌헨 공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라테나우는 AEG 회장을 지내며 독일 무기생산에 깊이 관계했다. 그는 조국인 독일에 충성을 바친 이른바 동화 유대인의 한 사람이었다. 1922년 1월 그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외무장관에 임명되자, 극우 국수주의자들의 반발을 샀고 5개월 뒤에 암살됐다. 자동차를 타고 가던 라테나우를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암살한 자들은 모두 20대 청년들이었다.

암살범들은 '국제 유대인'인 라테나우가 <시온 의정서>에 나오는 시온 장로들로부터 명령을 받고 행동한다는 궤변을 내세웠다. 20세기 초 제정 러시아의 비밀경찰이 만들었다는 <시온 의정서>는 독일인의 반유대 정서를 악화시키는 데 한 몫 했다. 유대인이 금융과 언론을 장악해 세계를 지배한다는 음모론을 담은 이 괴문서는 제1차 세계대전 뒤 독일어로 번역이 돼 금세 베스트셀러가 됐다. 많은 독일인들이 이 책을 읽고 유대인에 대한 반감을 더했다. 청년 히틀러도 물론 읽었다.

라테나우 암살은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일어난 여러 정치 테러 가운데 하나였다. 나치 히틀러 정권이 앞으로 휘두를 국가테러의 전조(前兆)이기도 했다. 독일 전역에서 라테나우의 죽음을 슬퍼하는 추모 집회가 열렸다. 하지만 지난주 글에서 봤듯이, 베를린대학에서는 나치와 연결된 대학생들의 폭동을 염려한 탓에 추모 집회가 취소됐다. 히틀러는 집권 뒤 라테나우 살해현장에 세워졌던 추모 명판을 없애버렸다(1946년 추모비가 다시 세워졌다).

▲ 유대인의 배신 탓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졌다는 소문에 대응하려고 만든 유대인 단체의 포스터. 독일 유대인 참전자 1만 2,000명이 전사했음을 보여준다. ⓒ위키미디어

패전이 유대인 탓이라는 '등에 꽂힌 칼' 신화

히틀러와 나치당이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 쓴 전략은 '유대인=볼셰비키'와 더불어 '유대인=배신자' 프레임이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을 끝내는 휴전협정이 맺어질 무렵만 해도 서부전선에선 독일군이 독일영토 바깥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내세우며 1920년대 히틀러의 나치당은 "독일군 병사들의 등을 유대인이 찔렀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한 베르사유 강화조약 제231조는 전쟁의 책임이 독일에게 있다고 못 박았고, 이에 따라 프랑스는 베르사유조약을 통해 독일에게 가혹한 징벌적인 배상금을 물리는 데 앞장섰다. 그로 말미암아 독일에게 매겨진 막대한 배상금은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에 엄청난 걸림돌이 됐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전쟁 뒤의 상황(베르사유 조약의 굴욕, 천문학적 인플레와 경제난)은 당연히 독일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현실을 냉정하게 살펴보면 전쟁에서 독일이 이길 수는 없었다. 1917년 4월 미군의 참전 뒤 갈수록 독일군은 수세에 몰렸다. 언제까지 독일이 전쟁을 이어나갈 힘이 있었는가는 논란거리다. 전쟁 연구자들에 따르면, 1918년의 휴전협정이 아니었더라면 독일은 1919년에 더 치욕적인 패배를 맞았을 것으로 본다(피터 심킨스 외,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플래닛미디어, 2008, 662쪽 참조).

그런데도 히틀러는 유대인을 볼셰비키라고 공격하는 한편으로 '유대인은 배신자'라는 프레임을 걸었다. "유대인이 독일을 배후에서 배신했기에 전쟁에 졌다"는 비난이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러했다. △암시장 거래를 통해 폭리를 취했고 △증권 거래에서 투기를 일삼았고 △유대인 군수업자는 불량 무기를 공급했다는 따위였다. 따라서 전쟁 중에 이익을 챙기는 데 몰두한 유대인이 독일의 전쟁 패배에 책임이 크다는 식으로 낙인찍었다.

유대인 10만 명 참전, 1만2000명 전사

1918년 패전 뒤 독일 보통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싶어 했다. 독일 극우 세력은 베르사유조약을 비판하는 것이 국민들의 지지를 더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을 재빠르게 알아챘다. 국민 정서에 맞는 캠페인이기도 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사람이 독일의 노장군 파울 폰 힌덴부르크(1847-1934)였다(힌덴부르크는 1933년 1월30일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으로서 히틀러를 총리에 지명해 나치 독재의 길을 열었고, 1934년 8월 그가 죽은 뒤 히틀러는 스스로를 지도자Führer로 부르며 철권을 휘둘렀다).

[우익의 반(反)베르사유조약 운동이 국민의 공감대 속에서 시작되었다. 1919년 가을에는 결정적인 공세가 있었다. 이들은 ('패전은 유대인의 배신 탓'이라는) 선동적 민족주의를 펼쳐나갔다. 1919년 11월18일 참모총장 힌덴부르크 장군이 독일 의회 조사위원회 앞에서 '등에 꽂힌 칼 신화'(Dolchstosslegende)를 밝힘으로써 그런 주장이 사실이라 인정한 셈이었다.] (오토 단, <독일 국민과 민족주의 역사>, 한울, 1996, 224쪽)

독일 유대인들로선 답답한 일이었다. 그들이 보기엔, 힌덴부르크가 '등에 꽂힌 칼 신화'를 사실이라 했던 까닭은 그를 비롯한 독일 전쟁 지도부가 져야 할 패전 책임을 유대인에게 떠넘기는 비겁한 짓이었다. 유대인들로서는 할 말이 없지도 않았다. 조국의 부름을 받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독일 유대인은 10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 독일 유대인 50만~55만쯤이었음을 떠올리면, 매우 높은 참전율이다. 유대인 전사자는 1만2000명이 이르렀다. 철십자훈장 등 무공훈장을 받은 이들도 많았다(로버트 위스트리치,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을유문화사, 2004, 50쪽 참조).

이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패전의 이유로 꼽힌 '유대인 배신론'이 널리 퍼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무렵 독일에서 활동했던 반유대주의 협회와 단체는 400개를 넘었고, 그런 성향의 잡지(월간지나 주간지)만도 약 700종이나 됐다(로버트 위스트리치, 82쪽). 독일의 반유대 조직들은 베르사유조약으로 자긍심에 상처를 받았던 독일 보통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히 자극하면서 반유대 정서를 키웠다.

이렇듯 히틀러는 유대인을 주적으로 돌리면서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1933년 집권 뒤 히틀러의 반유대 정책과 더불어 유대인에 대한 억압과 폭력이 점점 더 심해져 갔다. 대량학살(홀로코스트)로 가는 길목은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찌감치 독일을 떠나는 것이 목숨을 건지는 지름길이었다. 그런데도 왜 많은 유대인들이 독일을 떠나지 못했을까. 다음 주에 이 부분을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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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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