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김유리 씨는 평범한 직장인이자, 에세이 <너와 함께라면>(김유리·김영아 지음, 지식과감성 펴냄)을 쓴 발달장애인 작가입니다. 말보다 글이 편하다고 말하는 천생 글쟁이입니다. 푸르메재단에 칼럼 '발달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을 연재하며 장애 당사자로서의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김 작가는 안정된 직장에서 일하며 오랫동안 홀로서기를 꿈꿨지만 잘 살 수 있을지 확신이 없습니다.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갖고도 자립한 사람들이 어떻게 용기를 냈는지 늘 궁금했다고 합니다. 마침 푸르메소셜팜과 무이숲에서 일하는 장애 직원 중 8명이 자립했거나 자립 훈련을 받는 상황. 그중 동료들에게 자립을 권할 정도로 만족도가 높은 육서정 직원이라면 김 작가에게 좋은 조언자가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푸르메가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했습니다. 김 작가는 A4용지 4장을 꽉 채운 질문지를 안고, 푸르메소셜팜을 찾았습니다. 편집자.
자립 선배 육서정 직원을 만난 김유리 작가의 이야기
육서정 님과의 만남을 위해 경기도 여주에 위치한 스마트 농장인 푸르메소셜팜에 다녀왔다. 에어컨 바람을 막기 위해 집에서 챙겨온 가디건을 지하철에 두고 내릴 정도로 긴장이 되었다. 누군가를 인터뷰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인터뷰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은 내가 섣불리 준비한 질문들이 인터뷰 대상자에게 실례가 되는 건 아닐지 염려스러웠다. 다행히 내가 준비한 모든 질문에 미소로 답해주셔서 감사했다.
육서정 님은 어릴 때부터 장애인 시설에서 지내다가 1년 전 장애인 자립생활 체험홈에 들어왔다. 푸르메소셜팜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와 같이 살며 자립을 준비 중이다. 장애인 시설에서는 한 공간에서 6~7명이 함께 살았다. 이와 달리 장애인 자립생활 체험홈은 거실 하나에 방 두 개짜리 집으로 둘이 살기에 너무 좋다고 했다. 서정 님 이야기를 들으니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우리 집, 내 방으로 돌아왔을 때 느꼈던 기분이 생각났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에 있는 장애인 직업전문학교에 다니며 기숙사 생활을 한 적이 있다. 한방에 6명까지 들어가는 곳에서 지냈는데, 모르는 사람들과 좁은 방에서 생활하려니 너무 힘들었다. 그렇게 6개월쯤 살다가 직장을 다니게 되어 6인실 기숙사를 벗어났는데, 천국이 따로 없었다. 둘이서 생활하니 너무 좋다는 서정 님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장애인 시설의 선생님들에게서 이제 혼자 살아볼 것을 권유받았다는 서정 님은 복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설에 머무는 많은 발달장애인이 탈시설을 못 하는 이유가 반대에 부딪혀서라고 알고 있다. 나가 살고 싶다고 하면 "네가 혼자서 어떻게 지내려고!" 같은 말을 듣는다고 한다. 이것은 집에서 사는 발달장애인 당사자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가족의 반대에 부딪혀서 나가 살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발달장애인의 자립은 주변의 적극적인 지지가 바탕이 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예쁜 그릇만 놓고도 살아질 것이라고 생각한 20대 초반에, 부모님께 혼자 나가 살아보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때 부모님께선 아직은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때보다 사회 경험이 더 많이 쌓이고, 돈도 많이 모은 지금도 여전히 혼자 살아보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안 된다는 말을 또 들을까 봐서다. 서정 님의 말 한마디가 나의 이런 걱정을 잠재워 주었다. "시설 선생님들은 자립한 제가 기특하대요. 너무 잘하고 있대요." 부모님도 당장은 내가 혼자 사는 걸 걱정하시겠지만, 막상 자립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자랑스러워하시지 않을까 싶다.
서정 님은 집안일을 까먹거나 하는 일은 없을까? 나는 취미생활을 하느라, 손빨래한 것을 탈수한다며 세탁기에 돌려놓고 이튿날 꺼낸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서정 님은 절대 집안일을 미룬 적이 없다고 했다. 집안일 중에서 청소가 가장 좋다고 한다. 지저분한 게 있으면 못 본다고 했다. 조금 부끄러웠다. 내 방은 책상부터 여러 가지 물건으로 난장판이기 때문이다. 내 방만 정리하는 것도 힘든데 집 전체를 잘 관리할 수 있을까? 서정 님은 시설에서 살 때, 규칙에 따라 청소, 빨래 등을 하며 자연스럽게 집안일을 터득했다고 한다. 가장 자신 있는 요리는 볶음밥과 계란찜이라고 했다.
나는 서정 님이나 내 어머니만큼 집안일을 깔끔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청소, 빨래, 쓰레기 버리기 정도는 할 수 있다. 부모님이 집을 비우셨을 때 김치찌개를 끓여 본 적도 있다. 이쯤 되면 나도 혼자서 살아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 인터넷 포털에서 '발달장애인 자립'이라고 검색해 보면, 검색 결과 상단에 발달장애인은 인지능력 부족으로 자립역량이 부족하거나 불가능하여 지역사회에서의 자립이 어려운 경우가 대다수라는 글이 보인다. 그래서 발달장애인이 자립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연습이 필요하다는 말들이 나오나 보다. 그렇다면 비장애인은 태어날 때부터 자립역량을 타고났을까? 내 주변에 독립한 비장애인들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사촌동생이 독립하고 얼마간은 고모가 자주 집을 들여다보고, 반찬도 해 주신 걸로 알고 있다. 부모님의 귀농으로 원래 살던 집에서 동생과 함께 반 자취 중이라는 비장애인 친구도 있다. 처음에는 요리할 줄 몰라서 이웃들이 밥 굶고 살지는 않을지 걱정할 정도였는데, 1년이 지난 지금은 웬만한 음식은 할 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몇 년 전 남동생도 자취했었는데, 한동안은 부모님 전화기에 불이 났었다.
자취생 이야기를 담은 방송이나 에세이, 만화 등을 보면 혼자 살면서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은 이가 없고, 타인의 도움을 단 한 번도 받지 않은 이도 없다. 처음부터 자립이 가능한 사람은 없다. 반대로 자립이 불가능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유독 발달장애인에게만 자립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걸까? 모든 걸 혼자서 완벽하게 해낼 수 있기 전까지 독립을 미뤄야 한다면 비장애인 중에서도 자립이 가능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장애, 비장애를 떠나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발달장애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일평생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간다.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지원하기 위해 행정적으로 장애, 비장애를 구분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서정 님은 병원에 가거나 장을 볼 때 활동지원사의 도움을 받는다고 한다. 나는 신체 움직임이 자유로운 발달장애인은 혼자 살아도 활동지원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이다음에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서정 님이 활동지원을 받는다고 하니, 나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나에게 필요한 도움은 무엇일지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옷이나 신발을 사야 할 때, 새로운 미용실에 가야 할 때, 은행에서 적금을 들거나 대출을 받아야 할 때처럼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필요할 경우 지원받고 싶다. 집안 살림은 어설프게라도 할 수 있지만, 혼자서 매장을 방문하면 내 말을 잘 못 알아들어서 필요한 서비스를 받고 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자립생활 체험홈을 떠나서 혼자 살아볼 거라는 서정 님은 자립을 준비하면서 배운 점이 많고 뿌듯하다고 했다. 보안이 잘된 집으로 이사 가서 방 하나는 서재로 쓰고, 장식품으로 예쁘게 꾸미고 살고 싶다는 서정 님의 목소리는 들떠있었다.
체험홈을 떠나면 집세에 대한 부담은 없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히 서정 님이 사는 경기도 여주는 서울보다 부담이 훨씬 적다고 한다. 나도 이다음에 혼자 살게 된다면 서울을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푸르메소셜팜처럼 발달장애인이 일할 수 있는 곳이 다른 지역에도 많이 생기기를 바란다.
"제가 겁이 많아서 자립하기 전에 시설 선생님들이 걱정도 많이 하셨는데 지금 너무 잘하고 있다고 얘기해주세요. 저도 자립했으니 유리 작가님도 도전해보세요. 분명 잘할 수 있을 거예요."(육서정)
서정 님은 자립을 원하면서도 아직 실천하지 못한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자립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풀렸다. 나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인생의 고민과 걱정들을 지금보다 수없이 더 겪을 것이다. 인생의 난도가 높아지면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은 일을 자주 접할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마다 내 안에만 갇혀 움츠리지 않고 이번처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며 나만의 길을 한 걸음씩 만들어 가보련다.
발달장애인의 자립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뿐"
오랫동안 자립을 꿈꾼 김유리 작가와 자립을 이루고 있는 육서정 직원의 만남. 많은 문답이 오갔지만, 김 작가가 가장 묻고 싶던 질문은 이것입니다. "서정 님은 어떻게 자립할 결심을 했나요?" 누가 자립을 권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어떻게 실행에 옮길 수 있었는지 궁금했지요.
'장 보는 건?', '요리나 청소는 어떻게?' '빨래는 어디서?' '물건이 고장났을 때는?' 같은 혼자 살 때 발생할 일에 대한 소소한 질문도 많았습니다. 간단해 보여도 지금의 김 작가로서는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문제거든요. 이에 대한 육서정 직원의 답도 하나입니다. "모든 것은 자립하며 배울 수 있으니 용기를 내라"는 것입니다. "제가 겁도 많고 눈물도 많아요. 자립 시작할 때는 울면서 시설에서 나왔는데 막상 자립하니 자유로워서 좋아요.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나도 했으니 다들 할 수 있을 거라고 자립을 권하고 있어요."
육서정 직원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김 작가는 "서울에도 발달장애인들에게 자립을 지원해주는 곳이 있는지, 활동지원사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다"고 얘기합니다. 자립 선배의 격려로 조금은 용기가 생긴 걸까요?
유독 발달장애인에게만 '안 된다', '못한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회. 이제껏 그들의 자립을 막아온 건 그들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던, 그들에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던 우리 사회일지도 모릅니다. 최근 많은 발달장애인이 자립하면서 대다수가 예상보다 더 행복하게 자신의 삶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편견은 역시 편견일 뿐이라는 것을 멋지게 증명하지요. 장애인 자립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발달장애인의 독립이 당연해지는 날까지 푸르메재단이 함께하겠습니다.
*위 글은 비영리공익재단이자 장애인 지원 전문단체인 '푸르메재단'의 글입니다.(☞ 바로 가기 : http://purm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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