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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이재명의 '제왕정치' 둘 다 싫다, 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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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이재명의 '제왕정치' 둘 다 싫다, 그러면?

[언어가 언어에게] ② C. 더글러스 러미스의 <래디컬 데모크라시>

래디컬 데모크러시의 ‘뒷것’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방식은 직역과 의역뿐만이 아니라 발췌 번역, 편집 번역 등 다양한 방식이 있습니다. 저는 번역이란 원저자와 번역자의 공동 창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와 문화, 정치경제사회 상황이 전혀 다른 외국 작가의 느낌과 생각, 철학사상을 번역자가 자신의 모국어로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정확하게 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언어 자체가 사회성 동물인 인간의 언어공동체 네트워크 시공간을 넓고 깊게 켜켜이 쌓아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언어란 특정 언어 사용자들의 사회 속 시공간에 갇혀 있는 개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승렬, 하승우 역자의 <래디컬 데모크라시>(C. 더글러스 러미스, 한티재 펴냄)는 번역서가 원저자와 번역자의 공동창작이라는 제 생각에 딱 들어맞는 책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더글러스 러미스가 살고 있는 일본의 번역판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펴낸 이 책의 맨 앞과 뒤에 실린 역자 서문과 후기 두 편의 에세이는 더글러스 러미스의 책에서는 한 군데도 언급이 없는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와 현주소에 대해 '래디컬 데모크러시'를 준거로 그야말로 깊이있고 의미있게 성찰하는 글입니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쓸 수 없는 글입니다. 번역의 유려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더글러스 러미스가 이 책을 영어로 출판한 게 1996년입니다. 러미스는 1936년에 태어나 1960년에 미해병대원으로 오끼나와에 근무했고,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분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70년대 초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고, 1980년에는 도쿄의 쓰다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집필과 사회활동을 해왔습니다. 지금은 오끼나와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동무로서 그와 함께 공부모임을 하기도 했습니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안식년 기간인 1987년~1988년 필리핀대학의 제3세계연구센터 방문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이 책의 초고 대부분을 집필했습니다. 이런 삶의 여정에서 알 수 있듯 '래디컬 데모크러시'의 인식 범위에는 1986년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필리핀의 민주혁명은 있을지 몰라도 군사독재정권을 타도한 1987년 한국의 6월민주항쟁은 없습니다.

한국에서 더글러스 러미스를 발굴해낸 사람은 <녹색평론>의 김종철입니다. 민주주의를 공부한다는 한국의 어떤 정치학자도 주목하지 않는 정치사상가이자 사회운동가인 그의 글을 한국에 소개하고 초청까지 해서 강연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번역자 이승렬은 러미스와 연락하고 이메일을 주고 받고 하면서 초청 실무를 맡는 등 러미스 알리기의 '뒷것' 역할을 마다하지 않은 숨은 조력자였습니다.

뒷것이란 말은 얼마전 세상을 떠난 '아침이슬'의 김민기가 스스로 자신에게 붙인 이름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의 김개남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긴 김민기의 모심과 살림 정신을 잘 드러내는 이름입니다. 스승인 장일순의 치열한 삶과 언행과 똑 닮았습니다. 여담이지만 1980년대 제가 노동운동을 한답시고 돌아다닐 때 가끔 만나면 정색하고 특유의 진동있는 저음으로 "얏마, 목에 힘 좀 빼"라고 할 때 저는 늘 서늘했습니다.

김종철의 뒷것 이승렬은 10여년 전에 번역을 맡겼던 고 김종철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친다고 헌사를 적었습니다.

민주주의의 최초 번역어, 하극상

러미스는 서구의 민주정 개념과는 다른 동양 3국 한자문화권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스스럼없이 씁니다. 이승렬이 서문에 썼듯이 19세기 말 한중일 지식인들이 데모크라시의 번역어를 만들 때 제일 먼저 등장한 용어가 '하극상'입니다. 가장 하층의 백성, 곧 인민이 직접 나라를 통치한다는 정치 체제는 당시 군왕제, 천황제의 완강한 신분제 사회에 갇혀 살던 사람들에게는 강한 충격이었습니다. 하극상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다가 영어 발음 그대로 데모크라시(德謨克拉西)라고 쓰기도 하고 민주지제(民主之制), 민주정체(民主政體), 민본 등등을 혼용해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민주주의라는 말이 대세를 이루며 굳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왕정, 귀족정, 독재정 등과 더불어 서구에서는 단순히 정치 체제 가운데 하나였던 민주정을 이데올로기로 격상시키는 패러다임의 일대 전환이었습니다. 당시 서구의 충격 아래 조선과 청, 일본 등 3국 지식인들이 얼마나 강렬하게 썩어빠진 왕정을 타도하고 인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건설하고자 염원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러미스는 공자의 정명(正名)을 강조하면서 민주주의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왜곡과 곡해를 가차없이 버려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민주주의는 만드는(making)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acting) 것이며, 어떤 존재가 아니라 행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 민주정은 이제 너무나 닳고닳아 너덜너덜해지고 뒤죽박죽 의미없는 미사여구의 관용어로 전락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세습왕정인 북한의 정식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입니다. 사실상 선거를 통한 단기 왕정의 반복인 서구의 대의정, 엘리트 귀족정 또한 거의 모두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왜곡, 곡해가 오히려 정명이 되어버렸습니다.

거대한 사기, '선거 민주주의'

러미스는 민주주의의 왜곡 사례를 하나하나 분석합니다. 민주주의는 인민을 위한 정부를 말한다, 민주주의는 인민의 지지를 받는 지도자를 얻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경제성장과 발전이다, 민주주의는 자유시장이다, 공산주의가 아니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공산주의다, 민주주의는 미국 헌정 체계의 이름이다 등등등.

러미스가 지적한 민주주의에 대한 왜곡 중에서 가장 거대한 사기는 뭐니뭐니해도 민주주의는 자유선거라는 주장일 것입니다. 선거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이상한 조어입니다. 늑대를 양이라고 우기는 것과 똑같은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서구에서 인민들이 선거를 어떻게 민주주의와 동일시 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은 이보 모슬리가 상세히 추적, 분석하고 있습니다.(김정현 옮김, <민중의 이름으로>, 녹색평론사, 2022.) 인민의 직접 통치라는 민주주의에 걸맞는 제도는 추첨과 국민발의제, 국민투표제입니다. 선거로 지도자를 뽑는 것은 결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대의정, 엘리트 귀족정입니다.

우리는 지금 미국과 유럽 등 서구를 비롯하여 전세계에 걸쳐 선거를 통해 엘리트 귀족들을 뽑아 국가의 통치를 위임하는 대의정이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 그 실상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는 중입니다. 디지털 기기와 결합된 정당정치와 선거가 어떻게 인민들을 홀로그램 가두리 양식장같은 극단화된 보수-진보 진영에 가두어 놓고 적대적 공생을 통해 국가와 사회를 분열, 해체해 가고 있는지 경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 캠프란 수억 원의 연봉을 받는 '회전의자'들과 각종 이권들을 바라보고 모인 마적떼들 집합소와 똑같습니다. 2024년 현재 우리는 지금 일부 정치검찰 마적떼가 ‘주식회사 대한민국’을 왜구들과 결탁해 마구잡이로 노략질하는 사태를 그저 눈 뻔히 뜨고 참담하게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왕정으로 귀결된 엘리트 대의정

조선의 21대 임금인 영조(英祖) 대왕조차 지금의 청와대 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는 궁녀 한 명을 마음대로 늘리지 못했습니다. 영조는 궁녀 한 명을 더 늘리고 별군직(別軍職, 조선 후기 국왕 친위군 조직의 하나로 오늘날 청와대 경호실에 해당)에 인척 한 사람을 임명하지 않았느냐는 과거 응시자의 호된 비판을 받아 조정과 비변사(備邊司, 조선 중?후기 의정부를 대신하여 국정을 총괄한 최고 관청) 대신들 앞에서 울음을 터트린 적이 있을 정도였습니다.(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영조실록> 43권, 13년[1737년] 3월 26일[갑인] 2번째 기사)

영조의 권력은 지금의 한국 대통령이 갖고 있는 권력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왕이라는 이름만 붙이지 않았을 뿐 손바닥에 '王'(왕)자를 써붙이고 대선을 치러 실제로 대통령이 된 윤 대통령은 영조대왕보다 훨씬 더 세고 더 막강한 절대 왕권을 확실하게 행사하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이 왕이라면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제왕 대표와 다를 바 없습니다.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윤석열도 이재명도 다 싫다는 부동층과 정치 혐오층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것은 촛불 정신을 철저히 배신한 문재인정부의 무능과 처절한 실패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16/2017 촛불항쟁 당시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 가사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입니다. 그런데 지금 국민에게 권력은 일도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부동산을 비롯하여 이전보다 더 간극이 벌어진 극단의 불평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기후재난은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데, 믿을 수 있는 안전한 사회안전망은 거의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인민들은 끊임없이 주권자로서의 집단행동, ‘원천 권력’의 행사를 분출시켜 온 역사와 경험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1919년 3.1운동, 1960년 4.19혁명, 1980년 광주민중항쟁, 1987년 6월민주항쟁, 2016년/2017년 촛불 항쟁 등은 이같은 한국 인민들의 끈질긴 자각과 저항, 주권자로서의 힘의 분출이었습니다. 언제든 다시 터져나올 원천 권력의 힘입니다.

결국은 왕정으로 귀결된 6공화국 정치체제에 대한 인민들의 피로감과 실망감은 극에 달해 있습니다. 주권자들이 아무리 애원하고 청원하고 시위를 해도 삶의 질을 개선하는 정책과 법, 제도는 기득권들의 카르텔에 막혀 번번이 오히려 후퇴를 거듭할 뿐입니다. 엘리트 지도자를 뽑아 국가 운영을 맡긴 업보입니다.

노동자와 농민들, 소상공인들을 착취하는 새로운 제도들만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대통령과 장관, 국회의원들과 법조인, 재벌과 족벌 언론 등 오직 소수 기득권자들의 이익 챙기기에 혈안이 된 한국의 이른바 선거 민주주의, 대의제 민주주의, 보수-진보 정당 정치는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상태입니다. 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 문재인 정권, 윤석열 정권 모두 다 초록이 동색입니다. 여고 야고 기득권 엘리트들 뿐입니다. 지하 단칸방에서 여의도에 출근하는 국회의원이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4월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집무실에서 영수회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도 이재명도 다 싫다, 그러면?

2024년 4월 10일 22대 총선에서 국민들은 야당에게 개헌과 탄핵이 가능한 200석에서 8석이 모자라는 의석 수를 주었습니다. 인민들로부터 긁어간 엄청난 세금을 흥청망청 뿌려대면서 왕과 왕비 놀이만 하며 허구한 날 술이나 퍼마시는 최악의 무능 대통령과 집권 여당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공공연히 탄핵이 거론되고 있고, 헌법개정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국회를 비롯해서 사회 곳곳에서 튀어나오고 있습니다.

주권자인 국민들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선거밖에 없는 현행 헌법 체제에서는 오직 4~5년에 하루만 국민이 권력자입니다. 나머지 길고긴 세월은 을로 전락해 하릴없이 골방에서 정치인들의 ‘남반부’ 정치활극 중계만 봐야 하는 관객, 정치 노예일 뿐입니다.

한마디로 오늘날 헌법 개정과 새로운 제7공화국 체제에 대한 인민의 기대감은 2017년 대통령 탄핵 직후보다 더 높아진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6공 헌법 개정에 대한 찬성률은 70%를 넘습니다.

유능한 1급 목수인 줄 알고 건축 일을 맡겼는데, 알고 보니 초등학생보다 못한 얼치기에 오직 엄청난 양의 자재를 빼내 팔아먹지를 않나 일도 하지 않고 해외로 놀러만 다니질 않나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습니다. 목수를 갈아치우려고 하니 아뿔싸! 우리 조상님들이 갈아치우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반영구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놨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헌법의 현실이 지금 이렇습니다.

주권자인 국민들이 대한민국의 권력자, 주권자들입니다. 더글러스 러미스의 말 그대로 민주주의는 국민이 직접 통치하는 제도이자 국민이 직접 행동하는 어떤 상태입니다. 우리 자신이, 주권자인 인민들이 1급 목수입니다. 인민들이 스스로 직접 통치할 수 있는 헌법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인민들이 스스로 나서서 기후재난의 튼튼한 피난처가 될 수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지역사회의 공동체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지금이 헌법 개정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여야 공히 왕 놀음으로 귀결된 6공화국 헌법의 끝이 역으로 주권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임기단축 개헌 또는 이원집정부제, 내각제 개헌 논의는 엘리트 여야 정치인들과 기득권들이 그들만의 마적떼 노략질 정치를 계속하겠다는 뻔뻔스럽고도 새빨간 교언영색일 따름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민주주의 제도는 국민발의제와 국민투표제입니다. 임기단축이니 뭐니 결국은 또다시 선거로 왕을 뽑아야 하는 사기극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권자가 민주주의의 본디 뜻인 하극상에 충실한 행동을 하면 얼마든지 인민들이 직접 헌법개정을 할 수 있는 국민발의제 개헌을 실현시킬 수 있습니다. 보수-진보 할 것 없이 노동조합과 시민단체들은 길고 지리한 세월을 국회의원들에게 구걸하듯이 입법 청원을 하고 매달리는 헛수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1927년 좌우합작의 신간회운동을 통해 식민지 해방운동이 최고조로 고조되었을 때처럼 주권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국회의원 선거구별로 좌우합작의 국민발의제 제7공화국 헌법개정 추진운동을 벌여나가면 됩니다. 표를 가지고 있는 수천 수만 명의 선거구 주민들이 국민발의제 헌법개정에 대해 서명을 했는데, 이를 무시하고 국민발의제 개헌을 반대할 국회의원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상식을 가진 보통 국민들이 적어도 판검사, 변호사, 사장, 교수, 장차관, 기자 출신의 이른바 스펙 좋은 엘리트들보다 보통 국민들의 민생 살리기에서는 훨씬 더 일잘하는 1급 목수들입니다.

그래야 불평등한 제도를 주권자 스스로의 힘으로 혁파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기후재난의 피난처를 주권자 스스로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인민들의 고통스런 삶을 개선할 수 있습니다.

러미스의 래디컬 데모크라시는 지금 여기 오늘 한국에서는 21세기 차티스트 운동인 주권자들의 국민발의제 헌법개정 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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