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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을 죽여라!" 프랑스 폭민(暴民)은 나치 돌격대의 예고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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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을 죽여라!" 프랑스 폭민(暴民)은 나치 돌격대의 예고편이었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78]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⑥

[드디어 드레퓌스가 군사법정에 섰습니다. 재판은 완전 비공개로 진행되었습니다. 적에게 국경을 열어 독일 황제를 노트르담 성당까지 안내한 반역자라도 이보다 더 쉬쉬하며 재판을 하진 않았을 겁니다. 아!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기소장인지요! 이런 기소장으로 한 인간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진다면, 그야말로 불의의 극치입니다. 저는 정직한 사람이라면 이 기소장을 읽고 저 '악마의 섬'에 갇혀 말도 안 되는 속죄를 강요당하고 있는 한 인간(드레퓌스)을 생각하면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반항의 외침을 내지르지 않을 수 없으리라 장담합니다](에밀 졸라, <나는 고발한다>, 책세상, 2005, 93-94쪽).

윗글은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1840-1902)가 쓴 논설 '나는 고발한다'(J'accuse)의 일부다. 졸라가 누군지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의 작품들을 읽지 않았어도, 1898년 1월13일 프랑스 신문 <로로르〉에 실린 '나는 고발한다'는 논설 제목만큼은 들어봤을 듯하다. "나는 한 정직한 인간으로서 온 힘을 다해 큰 소리로 진실을 말해야겠다"는 졸라의 외침은 국경을 넘어 널리 퍼졌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은 <뉴욕 헤럴드>지에 이렇게 썼다.

"겁쟁이·위선자·아첨꾼은 한 해에도 100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에밀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니홀라스 할라스,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 한길사, 1983, 193쪽).

슬로바키아 출신의 미국인 작가 니홀라스 할라스는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역작(원제목은 Captain Dreyfus, The Story of Mass Hysteria, 1955)을 냈다. 부제목에 '집단발작'(Mass Hysteria)이 들어가 있는 데서 짐작되듯이, 19세기 말 드레퓌스 사건 무렵의 프랑스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졸라가 그의 글을 <로로르〉편집국에 보낼 때 제목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그것을 '나는 고발한다'라는 격문 투로 바꾼 이는 편집국장 조르주 클레망소(1841-1929,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총리)였다. 가뜩이나 휘발성이 높은 글에다 '나는 고발한다'고 자극적인 제목을 붙인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언론사 수습기자 교육 때나 신문방송 관련 학과 수업 때면 흔히 나오는 얘기다).

▲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의 논설 ‘나는 고발한다’(J'accuse).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고 프랑스 군부를 고발함으로써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위키미디어

공화파와 반공화파의 갈등

유대인 출신의 프랑스군 포병대위로 참모본부 소속이었던 알프레드 드레퓌스(1859-1935)에겐 군 기밀을 적에게 넘긴 혐의가 따랐다. 1894년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 무관에게 프랑스군 정보가 담긴 명세서를 건네주고 돈을 챙기려했다'는 혐의였다.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졸라의 글은 폭발적인 화제와 더불어 엄청난 찬반 논란을 빚었다.

프랑스혁명을 겪은 뒤 19세기의 프랑스에는 두 세력이 서로 갈등하고 있었다. 하나는 인권과 평등권에 바탕한 공화국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공화파 인물들과 언론, 다른 하나는 공화정에 반감을 지닌 구 귀족 가문의 장군과 장교들, 예수회를 중심으로 왕정복고를 바라는 가톨릭 성직자들, 그리고 이들과 이념을 같이하는 반동적인 보수 언론들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이 터지자, 대체로 전자는 드레퓌스 옹호파, 후자는 반(反)드레퓌스파로 갈라졌다.

양극화된 프랑스-이것이 19세기 말 프랑스의 모습이었다(큰 틀에서 보수-진보로 갈려 갈등을 빚는 21세기 한국사회의 양극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떠올리며 이 글을 읽어나가길 권한다). 프랑스 전역에서 에밀 졸라와 드레퓌스를 싸잡아 비난하는 시위와 더불어 유대인을 겨냥한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할라스는 당시의 혼란상을 이렇게 썼다.

[낭트와 보르도, 몽펠리에, 르아브르, 오를레앙 등에서 대규모 군중이 유대인 상점들을 약탈했고, 유대인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그들은 졸라의 기사가 실린 신문을 공개리에 불태웠으며 졸라의 초상을 목매달았다. 파리의 군중들은 "졸라를 죽여라! 유대인을 죽여라!'는 깃대를 들고 대로를 행진했다. 대규모 항의 집회가 열렸고 유혈충돌이 빚어졌다. 한 달 이상 전국의 도시들이 소요에 휩싸였다. 대부분의 경우 경찰이 유혈을 막을 힘이 없어 군대가 출동해야 했다](니홀라스 할라스, 193쪽).

드레퓌스와 강기훈

그렇다면 에밀 졸라는 누구를 고발한다는 것일까. 먼저 드레퓌스에게 간첩 혐의를 씌운 프랑스 국방부를 고발했다. 그는 주장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국방부 사건'이라고. 프랑스군 장군들과 장교들은 (나중에 정작 독일대사관에 기밀정보를 팔아넘기려 했던 진범이 나타났음에도) 진상을 밝히려들지 않고 쉬쉬하며 덮으려 했다.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는 격문에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늘어나자, 반유대주의자들이 반격에 나섰다. 프랑스 군부는 <레클레르> 같은 반유대 성향의 보수 언론들과 손을 잡고 유대인을 겨냥한 폭력을 부추겼다. 졸라는 이를 두고 '반유대주의의 어둠 속에 몸을 숨기는 범죄행위'라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는 또한 3명의 필적 전문가를 고발했다(드레퓌스가 독일 간첩이라는 증거는 그가 넘기려 했다는 프랑스군 기밀정보 명세서에 나타난 필적이 전부였다).

[저는 세 명의 필적 전문가(벨롬, 바리나르, 쿠아르)를 고발합니다. 의료 진단에 의해 그들의 시력과 판단력에 문제가 있었음이 입증되지 않는 한 그들이 날조된 거짓 보고서를 작성했음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에밀 졸라, 107쪽).

(아마도 독자 분들 가운데는 뭔가 익숙하다는 기시감을 느낄 것이다. 다름 아닌, 1991년 5월 노태우정권 때 일어났던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다. 드레퓌스와 마찬가지로 옥살이 끝에 뒤늦게 무죄로 결론이 나긴 했지만, 누구의 필적이냐를 놓고 큰 논란을 빚었다. 서강대에서 분신자살했던 이가 남긴 유서가 대필이라 판단했던 문서분석 전문가는 1995년 사기범들과 짜고 토지문서를 허위 감정해준 혐의로 구속돼 눈길을 끌었다.)

독일 간첩 만들어낸 반유대 정서

1894년 12월 파리 사관학교 법정에서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에게 무기징역형이 선고됐다. 해를 넘긴 1895년 1월 사관학교 연병장에서는 드레퓌스의 불명예 퇴역식이 열렸다. 몸집이 큰 선임 하사관은 그의 제복 어깨에서 견장을 거칠게 뜯어냈고, 그가 차고 있던 칼을 두 동강 냈다. 법정 밖에 모여 있던 군중들은 "드레퓌스에게 죽음을!", "유대인에게 죽음을!"이란 구호를 외쳤고,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부러진 칼을 든 드레퓌스 동상이 노트르담 드 샹 지하철역 출구와 파리 유대인 미술사박물관 마당에 서있다).

드레퓌스는 알자스 지방 출신의 유대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방직공장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1871년 프랑스가 프러시아(독일)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알자스-로렌 지방이 독일에게 넘어가자, 스위스를 거쳐 파리로 옮겨왔다. 드레퓌스 가족들은 유럽 백인 사회에 동화(同化)하려는 생각을 지녔다. 원래의 성(리브만)도 드레퓌스로 바꾸었고 세속적인 삶을 살았다. 드레퓌스 자신도 여자들의 환심을 사려고 재산을 얼마나 축냈는지를 군대 동료들에게 줄곧 자랑삼아 떠벌리곤 했다(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한길사, 2022, 225쪽 참조).

사건의 진범은 낭비벽이 심한 노름꾼인 프랑스군 대대장 페르디낭 에스테라지 소령(백작)이었다. 그는 1894년 7월 파리 독일 대사관 무관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군사정보를 팔아넘기려고 흥정을 했고, 전달예정인 정보 목록을 적어놓은 문서를 건넸다. 일이 꼬이려고 그랬는지, 그 문서가 프랑스군 방첩부대로 넘어갔다.

여기서 프랑스 군부의 반유대 정서가 한 몫 했다. 방첩부대장 상데르 대령은 드레퓌스와 같은 알자스 출신으로 독일과 유대인을 혐오하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반유대주의자였다. 문제의 문서를 들여다보며 누구의 필적일까 생각하던 중에 곁에 있던 또 다른 반유대주의자 웨베르 앙리 소령이 드레퓌스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상데르는 무릎을 탁 쳤고, 드레퓌스는 곧 붙잡혔다.

문제는 문서에 나타난 필적이 드레퓌스의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프랑스군 참모본부는 드레퓌스 기소를 망설였다. 그러자 반유대주의 신문 <리브르 파롤>이 불을 당겼다. '드레퓌스가 간첩으로 붙잡혔는데 참모본부가 이 '매국노'를 감싸주느라 기소를 망설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보수 신문들도 들고 일어났다. 그러자 당황한 참모본부는 드레퓌스를 반역 혐의로 서둘러 재판에 넘겼다. 무기형 판결 뒤 드레퓌스는 프랑스령 기아나에 있는 '악마의 섬'에 갇혔다. 여기까지가 드레퓌스 사건의 1막이다.

▲ 독일 스파이 혐의를 받은 드레퓌스 포병대위는 사관학교 연병장에서 불명예 퇴역식을 강요 당했다. <Le Petit Journal> 1895년 1월 13일자 삽화. ⓒ위키미디어

두 쪽으로 갈라진 프랑스, 결투만 32건

사람들이 드레퓌스를 잊어갈 무렵인 1896년 사건이 다시 불거졌다. 프랑스군 정보국장 조르주 피카르 중령이 "문제의 명세서 필적으로 미뤄 사건의 진범은 드레퓌스 대위가 아니라 에스테라지 소령이라는 증거를 찾았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하지만 상부에선 피카르를 튀니지 주둔군 연대 지휘관으로 내보내며 "입을 다물라"고 압박했다. 결정적 증거도 없이 졸속 재판을 서둘렀던 잘못을 덮으려던 군부의 태도는 입소문을 타고 후폭풍을 몰고 왔다.

여기서 드레퓌스 사건의 2막이 올랐다. 글 맨 앞에서 살펴본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는 논설이 신호탄이었다. 지식인들이 편을 갈라 저마다 들고 일어나면서 프랑스는 격렬한 논쟁에 휘말렸다. 영국 저널리스트이자 역사저술가인 폴 존슨의 책(A History of the Jews, 1987)에서 그 때의 살벌했던 상황을 보자.

[1898년 2월 드레퓌스 지지파는 '인권동맹'이란 전국조직을 결성했다. 이에 맞서 반드레퓌스파는 프랑스군의 명예를 지킨다며 '프랑스조국동맹'을 결성했다. 라자르는 드뤼몽과 결투를 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32건이 넘는 결투가 벌어졌고 유대인 한 명이 죽었다. 1899년 1월 하원 앞에선 흥분한 군중들이 맹렬한 주먹싸움을 벌였다. 콘스탄티노플에서 파리로 돌아온 외교관 폴 캉봉은 이렇게 불만을 나타냈다. "무슨 소리를 하고 무슨 짓을 하건 유대인 편 아니면 군부 편, 아군 아니면 적군으로 분류되고 만다."(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포이에마, 2014, 653-654쪽).

위 인용문에서 결투를 벌였다는 라자르와 드뤼몽은 당시대의 유명 작가들이었다. 라자르는 드레퓌스파에 속하는 열혈 작가였고, 드뤼몽은 반드레퓌스파로 <프랑스 유대인>이란 책을 내 단시일 안에 100쇄를 찍은 작가다. 펜으로 먹고사는 작가들이 칼을 들고 싸웠다니 그 무렵의 격앙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유럽사회 움직이는 '지식인' 출현

10년 동안 프랑스 사회를 들썩이게 만든 드레퓌스 사건은 한 가지 흥미로운 결과물을 냈다. 다름 아닌, 지식인 계층의 탄생이다. 파스칼 오리(베르사유대)와 장-프랑수아 시리넬리(릴리 제3대학)는 둘 다 프랑스 현대정치사와 문화사를 전공했다. 두 연구자는 '지식인'(intellectuel), 또는 '지식인 집단'이란 어휘가 '공간적으로는 프랑스문화, 시간적으로는 드레퓌스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고 풀이한다. 오늘날 흔히 쓰이는 '지식인'이란 단어는 드레퓌스 공방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두 연구자는 함께 쓴 <프랑스 지식인>(Les intellectuels en Frnace, 1996)에서 '지식인'이란 단어를 처음 쓴 인물로 조르주 클레망소를 꼽았다. 클레망소는 앞에서 봤듯이, 졸라의 논설 제목을 '나는 고발한다'로 바꾼 언론인이다. '지식인들'을 이탤릭체로 표기한 관련 글을 보자.

[(에밀 졸라의 글이 실린 열흘 뒤인 1898년) 1월23일, 마침내 클레망소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대열에 합류했고, 낯설음을 나타내기 위해 '지식인'이란 어휘를 이탤릭체로 표기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한 가지 이념을 위해 사방에서 몰려든 지식인들, 이것은 (드레퓌스가 무죄라는) 하나의 징후가 아니겠는가?"](파스칼 오리, 장-프랑수아 시리넬리, <지식인의 탄생-드레퓌스에서 현대까지>, 당대, 2005, 6-7쪽).

언론인이자 정치인이었던 클레망소가 쓴 '지식인'이란 단어는 그 무렵 사람들 사이에선 낯익은 것이 아니었다. 열흘도 안 돼 '지식인'이란 표현이 반(反)드레퓌스 진영의 논설에서 나왔다. 프랑스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던 작가인 모리스 바레스가 1898년 2월1일, ('나는 고발한다'를 실었던〈로로르〉신문보다 발행 부수가 훨씬 많은 신문인) <르 주르날>에 '지식인들의 항의!'라는 제목의 반론을 실었다.

[바레스는 이 글에서 드레퓌스를 옹호라는 언론이 '항의자들'이라고 불러온 사람들을 비웃으면서 이렇게 결론지었다. "결국 유대인과 신교도들을 제외하고, 이른바 지식인이라 불리는 명단은 대부분 멍청이 아니면 외국인 그리고 일부 선량한 프랑스인들로 이뤄져 있다"(파스칼 오리, 장-프랑수아 시리넬리, 7쪽).

바레스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믿는 사람들을 '멍청이'라며 비웃으며 '지식인'이란 단어에 경멸적인 뜻을 담았다. 그 뒤부터 드레퓌스 논쟁에서 '지식인'이 자주 나왔다. 이렇듯 지식인은 프랑스에서 출발부터 이념적인 균열에서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두 연구자는 '드레퓌스사건과 같은 만성적인 첨예한 대립의 단계에서 양극화는 필연적'이라고 말한다(파스칼 오리, 장-프랑수아 시리넬리, 79쪽).

그 무렵 프랑스 사람들은 즐겨 읽던 오노레 드 발자크의 소설(고리오영감, 잃어버린 환상, 인간희극 등) 속 인물들이 현실세계로 튀어나와 싸우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을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을 보는 시각 차이로 말미암아 양극화된 프랑스에선 보기 민망한 모습들이 많이 일어났다. 전에는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끼리도 얼굴을 붉히며 절교를 선언하곤 했다(보수냐 진보냐의 잣대로 갈등하며 친척이나 학교 동창생이라도 서로를 멀리 하는 한국 사회를 보는 듯하다).

유대인 증오, 드레퓌스 사건의 주요 배경

한나 아렌트(1906-1975)는 나치의 억압과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유대인 정치학자다. 1933년 독일을 떠나 프랑스 파리에 머물던 아렌트는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 뒤인 1941년 어렵사리 미국 뉴욕에 닿았다. 정치학자로서 그의 존재감을 처음 알린 역작(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은 드레퓌스 사건을 길게 다루었다. 아렌트는 드레퓌스 사건이 19세기말 프랑스를 양극화시킬 만큼 공방이 뜨거웠고 그 정치적 의미가 20세기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기억으로 남게 된 까닭을 두 가지로 꼽았다.

[첫째 요소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였고, 둘째 요소는 공화정 자체, 즉 의회와 국가기구에 대한 의혹이었다. 국민 대다수는 옳든 그르던 간에 국가가 여전히 유대인의 영향력과 유대계 은행의 권력 아래 있다고 생각했다. 현재까지 반드레퓌스라는 용어는 반공화정, 반민주주의, 그리고 반유대주의의 경향을 띠는 모든 것에 대한 공인된 명칭으로 사용된다](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한길사, 2022, 227쪽).

19세기 프랑스인들의 반유대 정서엔 여러 요인이 겹쳤다. 프러시아와의 보불전쟁(1870-1871)에서 패해 독일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다. 비스마르크의 지도 아래 프러시아 군은 파리를 점령하고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빌헬름 1세를 황제(Keiser)로 한 독일제국의 선포식을 올렸다. 프랑스인에겐 수치스런 기억으로 남았다(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는 베르사유 강화조약으로 독일에게 엄청난 배상을 강요한 곳이 같은 거울의 방이다).

전승국 프러시아(독일)에 지불하는 전쟁 배상금 협상에 유대인들이 개입했다는 것도 프랑스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협상을 통해 배상금 지불과 관련된 조문을 다듬고 손질하는 프랑스와 독일 양쪽의 대리인들이 유대인 금융재벌인 로스차일드(Rothschild, 독일 발음으론 '로트실트') 가문 사람들이었다.

<연재 76>에서 짧게 살펴봤듯이 로스차일드는 18세기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권력자와 유착한 대부업(고리대금업)으로 떼돈을 번 가문이다. 마이어 암셀 로트실트(1744-1812)는 다섯 아들 가운데 맏아들을 뺀 나머지 네 아들을 런던·파리·비엔나·나폴리로 보내 은행을 차리도록 했다. 그들은 오랜 악명을 지닌 고리대금업보다는 좀 더 교묘하고 복잡한 형태의 금융업(대부업, 주식과 부동산 투자, 투기 등)으로 '로스차일드 금융왕조'를 일궈냈다.

금융자본가로 자리잡은 유대인들을 보는 유럽 백인들의 눈길은 싸늘했다. '유대인들은 고리대금업자라는 전통적인 이미지에다 '개미 투자자의 주머니를 터는 증권 투기군'이란 이미지가 더해졌다. 프랑스의 로스차일드 가문은 비유대계 가톨릭 자본으로 세워진 위니옹 제네날(Union Generale) 은행을 1882년 파산시킬 만큼 강했다. 그 은행 파산으로 손해를 본 프랑스 투자자들은 물론 일반 프랑스인들의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한나 아렌트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인들의 불편한 심기를 이렇게 적고 있다.

[반유대주의자들은 유대인 벼락부자들을 출세한 하층민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모든 유대인 행상인들이 로스차일드 같은 인물이 되지 않을까, 벼락부자가 되지는 않을까 두려워했다](한나 아렌트, 268쪽).

▲ 드레퓌스 문제로 두 동강 난 프랑스를 그린 삽화. 한 가족이 “밥 먹을 땐 드레퓌스 얘긴 꺼내지말자”고 다짐했지만, 끝내 싸움으로 번졌다. 1898년 2월14일자 <피가로> 삽화. ⓒCaran d'Ache, 위키미디어

파나마회사 파산과 유대인 중개인

파나마운하 회사의 파산도 프랑스인들이 유대인을 미워한 배경으로 한몫 했다. 잘 알려졌듯이, 프랑스 외교관이자 기술자인 페르디낭 레셉스는 수에즈운하를 만든 주역이다(1869년 개통). 레셉스는 그 경험을 살려 1880년 파나마운하 건설에 뛰어들었다. 이를 위해 13억 프랑의 사채와 융자를 끌어 모았다.

파나마는 수에즈와는 달리 난공사였다. 말라리아와 황열병, 각종 사고 등으로 2만 명 넘는 노동자들이 죽는 등 여러 문제에 부딪쳤다. 1892년 끝내 파나마 회사가 쓰러졌다. 이로 말미암아 프랑스 중산층 50만 명이 투자금을 잃었다(드레퓌스 사건 2년 전의 일이다. 미국은 1902년 프랑스로부터 파나마운하 사업권을 4000만 달러의 헐값에 사들였다).

파나마 회사가 왜 쓰러졌는지를 프랑스 의회 조사위가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엄청난 정경유착과 부패가 드러났다. 레셉스는 신규 대출을 승인받으려고 모든 관련 고위공무원들, 절반가량의 의원들, 그리고 언론을 매수했다. 거액의 사례비를 주고 대출 중개인들을 고용했는데, 이들이 다름 아닌 유대인들이었다. 투자금을 날린 피해자들은 물론 많은 프랑스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또 미워하게 됐다. 바로 그 무렵에 마침 드레퓌스 사건이 터지자, 분노의 창끝은 유대인 쪽으로 더욱 쏠렸다.

프랑스 사회의 반유대 정서에도 불구하고 결과만을 놓고 보면, 드레퓌스는 살아남았다.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가 나온 다음해인 1899년, 논란을 부른 재심 끝에 대통령의 사면을 받았다. 사건 10년 만인 1904년 재심 청구가 있었고, 2년 뒤 면죄부를 받고 복직했다. 1년 뒤 은퇴한 드레퓌스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다시 군복을 입었다. 프랑스-독일 양쪽 합쳐 30만 명의 전사자를 냈던 베르됭 전투(1916)에서 싸웠고, 최고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드레퓌스 사건 100년이 지난 1995년, 프랑스 육군은 "드레퓌스는 무죄이며 당시 군법회의가 조작되었다"며 공식적으로 잘못을 인정했다.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도 같은 뜻을 나타냈다).

프랑스 폭민(mob), 나치 돌격대로 이어지다

앞서 살폈듯이, 프랑스혁명을 겪은 뒤 프랑스 사회는 공화국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공화정에 반감을 지닌 반동적인 보수우익 세력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한나 아렌트는 유럽이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가는 길목에서 빚어진 이들 두 세력 간 갈등은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크게 충돌했다고 본다. 그렇기에 드레퓌스 사건이 지닌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20세기 유럽(특히 독일과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나치즘,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가 생긴 이유는 연구자들마다 여러 가지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해 아렌트는 단순 명쾌해 보이는 설명 하나를 내놓았다. 경제가 어려워 민중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달콤한 미래를 말하는 지도자가 나타나 선동을 해대면, 민중은 순식간에 '폭민'(暴民, mob)으로 바뀌어 (희생양으로 점찍은 유대인 등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전체주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여기서 '폭민'이란 용어를 썼다. 그는 갈색 셔츠를 입은 히틀러의 '돌격대'나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단'처럼 (다양한 개성과 사고를 포기하고 마치 한 사람처럼 움직이는) 거대한 폭력적 군중을 '폭민'이라 했다. 아렌트에 따르면, 폭민은 독일이나 이탈리아보다 프랑스에서 먼저 나타났다. 드레퓌스 공방을 둘러싼 10년의 갈등기를 가리킨다. 반유대 정서가 강한 프랑스 군부와 가톨릭 세력과 손잡은 보수 언론들의 선동에 휩쓸린 폭민들은 거리에서 "유대인을 죽여라!"라고 외치고 다녔다. 에밀 졸라는 영국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폭민들은 에밀 졸라가 한마디라도 의견을 나타내면 그의 창문으로 돌이 날아왔다. "유대인에게 죽음을!"이란 외침이 나라를 휩쓸었다. 리옹, 낭트, 보르도, 마르세유 등 프랑스 모든 곳에서 반유대주의 폭동이 일어났다. 반유대주의 돌격부대가 거리에 나타나 모든 친드레퓌스 집회는 피바다로 끝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경찰은 명백하게 이들과 공모했다](한나 아렌트, 255-256쪽).

1930년대 나치 독일에서와 같은 일이 바로 40년 앞서 1890년대 프랑스에서 벌어졌다. 드레퓌스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폭력은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미리 보여준 예고편이자 전주곡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드레퓌스 사건이 낳은 유일하게 가시적인 성과는 시온주의 운동의 탄생"이라 했다. 오스트리아 신문의 파리 특파원으로 있던 테오도르 헤르츨은 (<연재 77> 글에서 다루었던) 러시아 포그롬과 그에 따른 유대인 난민 행렬, 그리고 10년에 걸쳐 프랑스를 양극화시켰던 드레퓌스 공방을 지켜봤다. 그러면서 박해받는 유대인의 유럽 탈출을 꾀했다. 다음 주엔 시오니즘이 지닌 의미와 문제점을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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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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