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전쟁>의 백범에 대한 총질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 당한지 75년, 그 어느 해보다도 백범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남북관계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있다는 것만도,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위아래 할 것 없이 통일을 외쳐오던 북한이 최근 남과 북은 서로 상관없는 다른 나라라고 선언한 탓만도 아니다. 올해 초 <건국전쟁>이라는 이승만 선전물에서 백범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음해를 일삼는 등 75년이 지난 지금도 이승만의 추종세력들이 백범에게 총질을 해대고 있기 때문이다.
<건국전쟁> 측은 성격과 신뢰도가 의심스러운 <유어만(劉馭萬) 비망록>이라는 자료를 토대로, 자료에 나오지도 않는 말("북한이 내려오면 그냥 남한은 끝이다. 근데 내가 왜 이승만을 도와주느냐 이렇게 얘기해요", 류석춘 발언)을 백범이 했다고 억지를 부리면서 백범을 이중적인 위선자(류석춘)로, 나아가 반역자(정안기)로 몰고 있다. <조선일보>(온라인판 '유석재의 돌발史전', 2024.01.25)조차 "이승만 영화에서 과연 이 얘기까지 꺼낼 필요가 있었을까"라고 할 정도로, 매우 무리한 주장과 해석을 내놓은 것이다.
과연 <유어만 비망록>이라는 자료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기에 <건국전쟁> 측에서 마치 백범의 결정적인 약점을 잡은 듯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건국전쟁>이 인용한 <유어만 비망록> 중 문제의 김구 발언 원문을 살펴보자. 지면 관계상 영어 원문은 생략하고 우리말로 번역했다.
"내가 남북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동기 중 하나는 이북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 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이북 군대의 증강을 앞으로 3년간 멈춘다 하더라도, 그 사이 이남에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현재의 공산군 수준에 달하는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하다. 러시아 사람들은 이북 군대를 동원하여 비난 받을 틈도 없이 손쉽게 남한을 급습할 것이며, (전쟁이 발발하면) 지금 여기에 잠정적으로 서있는 정부는 인민공화국으로 대체될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백범이 남북협상에 나선 것은 동족상잔의 비극만큼은 피해야한다는 생각때문이었다. 더욱이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백범은 해방 후 3년이 채 안 되는 기간 이북이 군사력 포함 전 분야에서 미군정 하 이남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발전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백범으로서는 동족상잔을 피해야한다는 절대절명의 과제에 더하여, 만약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북과는 상대도 안 될 남쪽이 무력대결이 불가피한 분단정권 수립의 길로 달려가는 것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정상적인 사고방식과 독해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런 오해가 없을 내용을, 이승만의 추종자들은 저급한 상상력을 발동하여 억지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수상한 자료에 근거한 괴이한 주장
<건국전쟁> 측의 백범에 대한 음해도 황당하지만 그들이 근거로 삼고 있는 자료도 매우 수상하다. 이 자료를 <월간조선>에 처음 공개한 조갑제는 "유엔한국위원회의 중국대표인 류위완 공사는 1948년 7월 11일 오전 11시 김구를 자택으로 방문,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유 공사는 대화의 내용을 영문으로 요약하여 국회의장 이승만에게 전달했다. 이 문서는 이화장에 보존되어 있다"라고 주장했다. 즉 이 비망록은 유어만 본인이 작성하여 이승만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건국전쟁> 측도 이 문건에 대해 더 이상의 설명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윌슨센터나 이승만연구원에서 제공하는 <유어만 비망록>을 꼼꼼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자료가 유어만 본인이 작성한 자료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자료에서 유어만의 영문 표기가 유어만 본인이 쓰는 방식과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유어만 본인은 자신의 이름을 영문으로 Liu Yuwan으로 쓰고 있는데, 이는 20세기 중엽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Wade–Giles 방식이나, 현재 널리 통용되는 pinyin 방식이나 동일하다. 그런데 이 문서에는 이도저도 아닌 Liu Yu-man으로 표기하고 있다. 노련한 외교관이 자신의 이름을 잘못쓸 수 있을까? 또한 이 문서에서는 유어만의 경교장 방문을 "surprise visit made by the Minister"라고 하여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기록하고 있다. 유어만 자신이 작성한 문서라면 그저 "my surprise visit"이라 했을 것이다.
또 중일전쟁 시기 중국국민당 중앙비서장으로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여 한국에도 잘 알려진 우티쳥(吳鐵城, 한국어 발음 오철성)의 영문표기를 Wu Tieh-cheng이 아니라 O Chul-sung이라는 한국어 발음으로 표기하고 있다. 한국어를 모르는 유어만이 Wu Tieh-cheng의 한국어 발음이 O Chul-sung이라는 것을 알았을 리도 없고, 설혹 알았다 하더라도 O Chul-sung으로 표기할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또 이 문건은 유어만이 직속상사인 당시 중국외교부장 Wang Shijie(王世杰, 한국어 발음 왕세걸) 역시, Wang Sish-gul이라는 한국식 발음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이 문건의 작성자는 유어만이 아니라 유어만을 만난 이화장 측 인사임이 분명하다.
<건국전쟁>에서 백범을 강력히 비난한 정안기는 "유어만은 경교장 밀담에서 김구의 불궤지심(不軌之心: 마땅히 지켜야 할 법이나 도리에 어긋나는 마음, 모반하는 마음)을 확인"하고 이 "중대한 사실을 알리고자 별도로 '비망록'을 작성해서 이승만에게 전달"했고, 이 비망록은 이승만이 7월 20일 '김구와 합작 불가'를 선언하는 "단호한 결단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아시아투데이, 2024.3.11) 이는 엄청난 사실왜곡이다.
백범과 장개석과 유어만
유어만이 백범 찾아간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유어만이 1948년 7월 11일 백범을 만난 이유는 정안기 등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김구가 소련의 대변인, 공산당의 제5열(스파이)이 되었다는 세평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부에 참여하여 부통령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유어만은 이승만을 위해 백범의 속내를 염탐하기 위해 백범을 만난 것이 아니라, 백범이 마음을 돌려 새 정부에 참여하도록 권유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다. 당시의 언론을 봐도 유어만이 본국 정부의 훈령에 따라 이승만과 김구를 각각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확인된다. (한성일보 1948.7.22) 이승만 추종자들은 유어만이 김구와 이승만과 왜 만났는지 그 이유부터 왜곡하고 있다.
사실 유어만과 백범, 또는 유어만의 상사인 장개석과 백범의 관계는 이승만과 유어만, 장개석과의 관계와는 비할 바 없이 훨씬 깊고 돈독한 사이였다. 냉전의 심화, 점점 국민당에 불리하게 진행되는 국공내전의 전황 때문에 국민당의 미국 의존은 심해졌다. 그래서 미국의 한반도 분단 정책을 지지하게 되었을 뿐이지, 유어만이 이승만을 위해 김구를 염탐하고 보고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경교장이 사용한 2대의 승용차 중 1대는 서울 주재 중화민국공사로 있던 유어만이 제공한 것이었다. 또 장개석은 해방 후 김구가 귀국할 때 전별금으로 20만 달러를 주었는데 이 중 10만 달러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이 사용하고 나머지 10만 달러는 미군정의 반대로 국내로 들여오지 못한 채 주미 중국대사관에 보관 중이었다.
이승만은 이 돈에 눈독을 들였고, 김구는 이승만에게 이 돈을 제공하기로 했다. 이승만은 프란체스카와 함께 유어만을 찾아가 이 돈을 자신에게 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승만이 1946년 하반기 미국을 방문하고 중국을 거쳐 귀국한 중요한 목적들 중에는 이 돈을 받아내기 위한 것도 포함돼 있었다. 이승만의 집요한 요청에도 장개석은 이 돈을 이승만에게 주지 않았고, 유어만은 10만달러를 백범의 아들 김신에게 주어 백범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생활비와 <백범일지>의 출간비용으로 사용했다.(정병준, <우남 이승만>, 614-618쪽)
장개석과 중국정부가 이승만보다 김구를 중시했던 이유는 김구와의 오랜 인연 이외에도 다급한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중국 국공내전의 승패는 만주에서 결정되는 상황이었는데, 많은 재만한인들이 중국공산당 편에 가담하고 있는 것은 장개석 입장에서 큰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백범의 역할을 기대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장덕수 암살사건이 발생하고, 수사책임자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김구가 장덕수의 암살에 책임이 있다"는 입장을 보이자, 유어만은 이승만에게 '장택상을 수도경찰청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설득한 바 있다. (G-2 W/S No.126 (1948.2.13), <백범 전집> 9, 436) 그만큼 중국과 유어만은 백범의 정치적 입지를 지키려 노력했다.
남북협상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과의 긴밀한 협의 속에 추진
백범과 우사 김규식이 1948년 2월 남북협상에 나서려 할 때 이승만을 포함한 우익 3영수 회동을 주선한 사람은 바로 유어만이었다. 소련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에 따라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추진해야하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주요성원이기도 했던 유어만이 2월 10일 중국대사관으로 우익 3영수를 초치한 것은, 남북협상이라는 명분을 거스를 수 없었고, 이승만으로 하여금 남북협상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공개적으로 반대하지는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 위함이었다. 물론 미국의 원조 하에 국공내전을 힘겹게 치르고 있던 중화민국은 미국의 뜻대로 남북협상보다 남한단독정부 수립으로 완전히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엄청난 명분을 지닌 남북협상에 대해 '실패할 기회'를 정중하게 제공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남북협상은 <건국전쟁> 류가 생각하듯이 "북한의 김일성이 당신을 통일 정부의 대통령으로 모시겠다고 그런다. 한번 우리가 만나보자 그렇게 해서 김구는 거기에 넘어가게"(정안기)된 것이 아니다. 북한은 이런 주장을 한 적도 없고, 백범은 자리에 연연하는 분도 아니었다. 남북협상은 백범이나 우사의 개인생각만이 아니었다. UN한국임시위원단의 공식적인 요청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냉전에 대한 입장이 미국과 달랐던 영국 블럭 국가(호주, 캐나다, 인도) 대표들은 백범과 우사에게 남북협상에 나설 것을 종용했다. 또 백범과 우사가 공동명의로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낸 편지는 UN한국임시위원단에 의해 영국정부의 공식 외교 경로를 통해 평양에 전해진 것이었다.
유어만 비망록의 진실
유어만이 김구를 방문한 진짜 목적은 김구로 하여금 대한민국 정부의 부통령 직을 수락하라고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어만은 당연히 김구와의 만남에 대해 본국정부에 보고했다.(국사편찬위원회, '중국․대만 소재 한국사 자료 조사보고' Ⅱ, 211-213쪽) 이 보고의 내용은, 유어만이 비망록을 작성해 김구의 반역적 태도를 이승만에게 알려서 이승만이 김구와의 합작 불가를 선언하는 "단호한 결단의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는 <건국전쟁> 측의 주장과는 완전히 다르다.
유어만은 이승만과 여러 차례 의견을 교환한 결과, 김구가 "공개적으로 정부에 반대하지 않고 북한과 타협하지 않을 것임을 인정"한다는 조건으로 이승만이 김구에게 부통령 자리를 제안하는데 동의했다면서, "이승만은 곧 국회에 김구를 부통령으로 제안할 것"이라고 장개석에게 보고했다. 김구에 대한 부통령 제안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첫째, 김구 자신이 단호하게 단독정부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둘째, 뿐만 아니라, 장개석의 압박을 받은 이승만도 겉으론 '전제조건'을 달아 김구에게 부통령직을 제안하겠다고는 했지만, 속마음은 김구와의 합작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전문은 백범이 "어떠한 경우에도 풍옥상(馮玉祥)과 같은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공산당과 합작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1948년 8월 6일 이승만이 유어만을 통해 장개석에게 보낸 전보에 따르면, 이승만은 김구가 자신을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을 보이지 않지만, 장개석의 바람대로 김구와의 합작을 최단 기간 내에 실현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국편, 218쪽) 이를 보면 중화민국 정부는 김구에 대한 부통령직 제안이 무산된 뒤에도 여전히 이승만에게 김구와 손잡을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사실 중국국민당 정권은 김구와 임시정부에 대해 장기간에 걸쳐 막대한 투자를 해 온 처지였기 때문에 김구를 '손절'하고 의심 많고 중국을 신뢰하지 않는 인물인 이승만(유어만 보고)으로 쉽게 '환승'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유어만은 본국정부로부터 백범을 새로 출범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부통령으로 만들라는 강력한 지시를 받는 입장이었지, 백범을 비방하여 부통령이 되지 못하게 하려는 입장을 가진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유어만이 만난 이화장 측 인사는 김구가 부통령이 되거나, 김구 휘하의 인물들이 신정부의 요직에 기용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유어만과의 대화를 이승만에게 보고할 때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평가대로 "백범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함정에 빠뜨리려는 의도"를 갖고 왜곡한 것이다. 이승만 비서정치의 폐해는 초기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의 이승만의 추종자들은 70여 년 전의 추종자들이 왜곡해 놓은 자료를 무지의 소산인지, 사악한 의도로 알면서 그랬는지, 유어만 자신이 작성한 자료로 왜곡하여 백범에게 또다시 총질을 한 것이다.
사족
백범의 남북협상은 비록 5·10총선과 단독정부 수립을 당장 막지는 못했지만,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한반도의 남북한에서는 미소 양군이 철수하면서 남북 간의 통일논의가 활성화될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남쪽 내에서도 이를 위해 정부수립 과정에서 갈라선 우익 3영수의 합작이 필요하다는 기운이 일고 있었다. 이는 친일세력에게는 재앙이었고, 이들은 국방장관 신성모의 지휘 하에 국회프락치 사건(국회에서 김구를 지지하는 소장파들의 대량 검거), 반민특위 습격, 그리고 백범 암살로 이어지는 '6월공세'를 추진했다. 백범의 암살은 한반도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을 수 있는 장벽이 무너진 것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놓고도 백범 암살의 배후 국방장관 신성모는 전쟁이 터지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는 헛소리만 늘어놓고 있었다. 백범이 가시고 딱 1년 뒤인 1950년 6월 25일 한반도는 전쟁에 휩싸였고, 백범의 묘소 뒤로 수백만의 이름도 알 길 없는 무덤이 늘어섰다. 이승만이 "외교에는 귀신이지만, 인사에는 등신"이라는 속설에서 최악의 인사는 단연 신성모였고, 백범암살, 국회 프락치 사건, 한국전쟁 초기 참패,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학살 등 이승만 정권 초기의 대표적인 실정은 대부분 신성모가 중대한 책임을 져야 할 일들이었다.
<건국전쟁>은 이승만이 1960년 대통령 선거에 또다시 나선 것은 권력욕이 아니라 재일교포 북송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소가 웃을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북송사업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공작 책임자가 바로 안두희였다. 백범 암살범 안두희는 이승만 정권에서 단순히 비호를 받은 것이 아니라, 암흑의 정보세계의 핵심요인이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이 공작의 현지 책임자로 안두희의 파트너가 된 위혜림은 1935년 상해 일본총영사관이 백범 암살을 시도할 때 핵심분자였다.
안두희와 함께 일본에 파견된 공작원들을 훈련시킨 자는 바로 박종철 고문치사은폐조작사건 당시 대공경찰의 대부였던 치안감 박처원이었다. 백범 암살에서 선명하게 드러난 한국현대사의 악의 축은 이렇게 이어져 왔고, 우리는 아직 그 축을 끊어내지 못한 채 백범 서거 75주년을 보내고 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책임편집인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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